실험적 글쓰기 - 4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상황을 도출해 낸 어떠한 원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원인에 대한 이미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말이다. 이러한 원인을 가정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식은 그 기능을 정지할 것이며 우리는 어떠한 이야기도 전개할 수 없을 것이다. 이야기는 관계이며 작용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나름대로 정리된 상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시간은 계속해서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흐르며(현재에서 과거로 흐르거나 미래에서 현재로 흐르지 않고 말이다), 여기엔 이것이 있고, 저기엔 저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구별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사물을 보고 그 사물의 성질을 추정해 내고 그러한 추정을 다른 사물과의 성질과 종합시켜 또 다른 사유를 전개시켜 나간다. 하지만 어찌 이러한 것이 가능한 것인가? 어떻게 구별하고 정리하고 종합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건담, 프라모델은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를, 그러니까 종합된 형태를 가지지 않는다. 프라모델이 완성된 형태를 가지기 위해서는 누군가 ‘분리된 프라모델 피스들을 조립함’이라는 원인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나름의 종합된 세계를 보지만 그러한 종합은 일차적인 것이 아니며 그 종합을 수행하는 나름의 인식의 기능이 전제돼야 하는 것이다. 프라모델이 처음부터 완성돼있지 않고 낱낱의 피스로 분리돼 있고 그 분리된 것을 조립하고 종합하는 어떤 존재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낱낱의 피스들을 구별할 수는 있겠지만 이 또한 일차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피스들은 원래부턴 하나의 플라스틱 덩어리였을 것이며 그것을 인위적으로 공장에서 구별 가능하게 분리하고 정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식이 무언가를 구별할 수 있는 것 또한 이러한 구별하고 정리하는 인식의 기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프라모델이 완성되고, 종합되고 나면 그것은 마치 엄청난 변화를 겪은 것만 같다. 공장에서 그 프라모델의 부품들을 찍어낼 때의 그 번잡함과 동일함으로써의 반복적 순환에 의한 공허함과 또한 낱낱의 피스들의, 대체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포착할 수 없는 그 모호함을 알록달록하고 세련된 자태를 통해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을 나는 ‘피상적 종합’이라고 부른다. 분명 이것은 종합이지만 그 이면을 가려버리는 종합이기 때문이다.
피상적 종합은 그 이면을 가려버리지만 이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이면이라 하는 것은 때때로 그 부정성에 의해 삶의 의지를 가로막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상적 종합이라는 가면을 면밀히 관찰해 그 구석구석을 심층적으로 파악하려는 존재는 삶의 일반성을 꿰뚫으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 또한 네 속을 들여다볼 것이므로.”라는 니체의 “선악의 저편”의 그 유명한 구절이 가르쳐주는 것처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작업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변화하며 동일한 상태로 정지해있지 않는다. 잠수부는 바닷속에 들어갈 때 온 신경을 집중한 채 숨을 참고 잠수하지만 그 잠수가 끝나고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면 고조된 신경은 자연스레 풀리며 참았던 숨도 다시 그 일상성을 되찾는다. 이러한 전환은 다양한 삶의 순간에서 다양한 외관을 형성한 채 드러난다. 피상의 이면을 들여다보며 잠수해 있는 자는 평상시엔 미처 보지 못했던 광경을 보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지속하기 위해서 언제나 일상 속으로 복귀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해져 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그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소수자적 자아의 특성으로서 소수자-쾌락을 형성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이 쾌락조차 지나치면 고통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소수자-고통의 역치를 내리기 위해서 우리는 일상 속으로 돌아와 적응자-쾌락을 만끽한다. 소수자적 자아처럼 세계의 이면을 보는 게 아닌, 그저 그 피상성을 있는 그대로 보며 쾌락을 얻고 그것을 긍정하는 것이다(마찬가지로 적응자-쾌락이 적응자-고통으로 전환될 때는 소수자-쾌락으로의 넘어섬이 필요할 것이다).
그 이면을 들여다보며 가치를 창조하는 자들 도처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또한 그들이 그러한 선택을 함에 있어서 그 정신이 분열되고 파괴되며 으스러지지 않을 수 있는 하나의 히든피스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자연이 그들에게 외관(피상)을 긍정할 수 있는 힘, 깊은 심해에 잠수한 채 다시 육지로 올라온 지치고 피폐해진 그들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힘, 즉 긍피(肯皮)를 선물해 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