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문학에서 해답찾기 -<청부살인자의 성모>편
바예호가 그려낸 콜롬비아에는
열일곱의 나이에 백명이 넘는 사람을 죽인 시카리오, 알렉시스가 있다.
그를 사랑하는 천박한 문법학자인 페르난도도 있다.
알렉시스를 죽인 또 다른 시카리오가 있고,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페르난도 바예호의 "청부살인자의 성모"는 현실과 환상의 세계가 고루 짬뽕된 붐 소설과 달리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를 다룬다. 오래 전부터 라틴 아메리카의 고질적 사회 문제로 손꼽히는 "시카리오(Sicario)" 즉, 청부살인자와 콜롬비아 메데인의 빈민가인 "코무나"가 글의 소재이다.
메데인에서는 죽음이 참 흔하다. 시카리오들은 어깨를 부딪혔다고 지나가는 행인을 죽이고, 노래를 크게 틀었다고 택시기사를 죽이고, 서로 싸우던 두 아이를 죽이고, 그걸 지켜보며 바람을 넣고 있던 네명의 어른들을 죽인다. 이것 외에도 죽이는 장면이 너무 많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진다. 도시 전체가 증오와 범죄로 가득 차있다.
"이봐, 당신에게 말하는데, 메데인에 사는 건 죽은 채 이 삶으로 스쳐지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야. 내가 이 현실을 만들어낸 게 아니라, 이 현실이 나를 만들어 내고 있어. 그래서 살아있는 죽은 사람인 우리는 메데인 거리로 가면서 도둑질과 강도에 대해 말해."(p.116)
하지만 드뇌 빌뇌브 감독의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를 본 사람이라면, 시카리오를 둘러싼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시카리오는 수많은 인간의 목숨을 빼앗은 살인자인 동시에, 이미 마약과 범죄로 병들어버린 사회에 의해 암살을 강요당한 피해자이기도 하니까.
얼마전 브라질에서 대대적인 갱단 소탕 작전이 벌어졌는데, 유가족들을 비롯한 시민들이 이를 '살인'으로 규정하며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제3자의 시각에선 저 사회악인 암살자들을 죽인게 뭐가 잘못된 일인가 싶을 것이다. 갱단이란 사라져야 마땅한 도시의 암덩어리 같은 존재들일테니.
하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빈민가 아이들은 선택지 없이 시카리오의 삶을 살게 된다. 너무 어렸을 적부터 총을 잡고 사람을 죽이는 방법, 몸을 팔아 돈 많은 누군가에게 기생하는 방법을 배운다. 사람을 죽이는게 참 쉽고 당연하다. 시카리오가 되라는 제안을 거절하면 살해 당하기도 한다.
이미 큰 죄를 지은 그들을 옹호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단순히 그 수많은 시카리오를 악마로 규정하고, 쉽게 죽이는게 정의는 아닐 것이다. 본질적으로 정부나 시카리오나 서로를 쏴죽인건 똑같으니까. 빈민가 아이들이 세상은 증오와 폭력으로만 이루어진게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 그래서 스스로 시카리오가 되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살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주는 게 정부의 역할 아닐까.
각설하고. 창작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청부살인자의 성모>는 1인칭 주인공 시점과 관찰자 시점을 넘나들고 있다. 화자의 역할을 하는 페르난도는 콜롬비아 출생이지만 다른 나라에서 공부를 하다가 다시 메데인으로 돌아온 중년의 문법학자이다. 문법학자라는 고상한 직업과 대비되게 페르난도는 천박하고 변태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콜롬비아인 친구 호세 안토니오 바스케스로부터 열일곱의 알렉시스를 '선물 받고' 그와 연인 관계를 유지한다. 알렉시스가 사람을 죽여도 메데인이라는 도시를 욕할 뿐 알렉시스는 그에게 여전히 '천사'이다.
페르난도는 화자로써 외국인 관광객인 누군가에게 메데인에서의 생활을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글 전체가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로 서술되어 있다. 꽤 독특한 작법. 독자는 이 천박하고 고약한 문법학자가 쏟아내는 메데인에 대한 불평과, 알렉시스와의 일화를 활자를 통해 들어야만 한다. 종이를 180번 넘기면서.
사실 이야기적 측면에서, 전체적으로 스토리가 훌륭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시공간적 배경과 플롯도 뒤죽박죽이고 서술이 정제되지 않아서 눈에 잘 안들어온다. 180페이지밖에 되지 않지만 읽는데 한참 걸렸다. 장 구분도 없다. 이런 문체나 플롯이 폭력으로 얼룩진 콜롬비아의 혼란스러운 사회를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 꼭 배우고 싶었던 부분은 알렉시스라는 캐릭터로 만들어낸 비극의 효과다. 알렉시스를 파헤쳐보자.
알렉시스가 하는 일이라곤 사람을 죽이는 것밖에 없다. 누군가를 죽이는건 방아쇠 하나 당기는 것만큼 쉬운 일이다. 그래서 별것도 아닌 이유로 살인을 저지르고, 그리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래서 알렉시스는 참 잔혹하고, 감정없는 무뢰한일 것 같은 느낌. 그런 거칠고 다가가기 어려운, 독기에 가득찬 남성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알렉시스는 매일같이 티비앞에 앉아 축구를 보고, 음악 듣기를 좋아하는 어린아이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음악에는 너무 진심이라 펑크와 헤비메탈을 구분할 줄 알고, 매일 페르난도와 함께 성당을 찾아다니며 성모님께 기도를 한다. 페르난도가 주는 돈에도 딱히 관심이 없고, 사랑하는 그를 위해 뭐든 해줄 준비가 되어있다. 사람은 백명 넘게 죽여 놓고선 개는 죽이지 못한다. 강한 자에게는 강하게 대응하지만, 약한 존재에게는 한없이 약해진다.
그렇게 우린 폭력에서 순수를 발견한다. 그 순간부터 알렉시스는 열일곱 소년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어쩔 수 없이 정이 들기 시작한다. 비열한 거리, 신세계 류의 느와르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을 생각해보자. 무자비하고 거칠지만 의리와 사랑을 중시하는 면모, 약한 것에게 약하고 강한 것엔 누구보다 강하게 대하는 면들. 이런 캐릭터에 우린 꽤 익숙하고, 그들에게 마음이 간다. 여기선 한술 더떠서 그런 느와르 영화의 남주가 해맑은 웃음을 지닌 소년이라면? 어느 순간 우린 그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그래서 알렉시스가 또 다른 시카리오인 블루 라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때, 그 비극은 깊어지고 또 깊어진다. 알렉시스의 죽음이 단순히 슬프게만 다가오는게 아니라, 매우 찝찝하다. 윤리적으로 아주 불쾌한 일이 일어난 느낌이랄까. 죽여도 마땅하지만 죽이면 안될 것처럼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난 그런 복합적이고 불가해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글이 수준 높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모순'이라는 인간의 본질이 자연스럽게 녹아든 글. 그런 감정을 느끼면서 또 인간은 모순덩어리라는 불변의 명제를 상기하곤 한다.
그렇게 알렉시스가 죽고, 페르난도는 또 다른 시카리오인 윌마르를 사랑하게 된다. 그렇게 또 다른 천사를 찾았나 싶었지만 바예호는 메데인이라는 공간에서 조금의 행복도 허락하지 않는다. 윌마르가 바로 블루 라군이었으니까. 페르난도는 윌마르를 용서하고 지옥같은 메데인에서 함께 탈출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시도도 통하지 않는다.
윌마르도 곧 알렉시스의 곁으로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폭력과 순수의 공존.
불가능해 보이는 두 특성이 만날 때 우린 그 순수함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 맘 속에 아직도 알렉시스의 죽음이 잔류하고 있는건가.
앞으로 또 우연히, 어디에서건, 시카리오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한참 마음이 무거울 것만 같다.
알렉시스에 대한 한 구절로 이 글을 마친다.
"알렉시스의 눈에는 순수함이 서려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상처입고 아팠어. 그리고 어느 날, 그러니까 그가 가장 원했을 때, 그리고 가장 예상하지 못했을 때, 그는 살해되었어. 우리는 모두 그렇게 죽고 말 거야. 그러면 우리의 재는 모두 같은 묘지로, 그러니까 같은 평화의 들판으로, 즉 낙원으로 가게 될거야."(p.11)
다음 편엔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으로 찾아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