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잠에서 깼다.
우리집의 새벽은 이상하리만치 분주하다. 잠귀가 밝은 나는 소음 때문에 잠을 잘 수 없고, 그렇게 누적된 피로에 매일같이 아침마다 곤두서있다. 나에게 '우리 집'이란 무엇인가에 진득하게 집중할 수 없는 불안함의 공간이다. 고요함 또는 평화 따위의 것은 우리 집에서 허락된 적이 거의 없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출근 시간이 각기 다른 넷이서 뭉쳐 살면 이런 비극이 벌어진다. 그나마 막내 동생이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군인이 되어 다섯이 넷으로 줄어있는 지금. 속으로 막내동생의 제대 날짜가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내 자신에게 스스로 무서워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내 공간에 대한 본능적인 소유욕은 결국 가족애까지 집어삼킨다. 짜증을 주체할 수 없어 무성의 아우성을 치다가 분을 삭인 후 잠깐 월세방을 구해야겠다는 고민을 해봤다. 그러자 순식간에 악명 높은 서울 땅값에, 생활비, 쥐꼬리만 한 월급이 파노라마 스치듯이 머릿속에 펼쳐지고 나는 독립에 대한 염원을 단념하고 만다. 돈 생각하니 또 저번 달에 시작한 주식 소식이 궁금하다. 코인에서는 매일같이 파란색만 떴고, 내 안색도 그러했다. 푸르게 푸르게 수익률이 -90을 찍는걸 보고서야 코인에서 손뗐다. 미련 덩어리. 코인도 주식도 돈이 있어야 하지. 출근이나 해야겠다. 침대에서 벗어난다.
대충 계란프라이를 입에 구겨 넣고 집을 나섰다.
-김혜석 또 남겼니, 그러게 아침에 10분만 일찍 일어나면...-
잠시나마 귀에 잔소리가 머물렀다. 아침에 10분 일찍 일어나는 거 엄마 말처럼 쉬운 일 아니다. 어차피 나는 내 맘대로 되지 않으니까.
그래도 봄은 또 어김없이 다시 찾아와서 아직 잠들어있던 내 감성 세포를 두들겨 깨운다. 고맙게도 봄 햇빛은 공짜다. 봄기운이 가득 찬 햇빛을 한껏 머금고 집앞역 5번 출구 계단을 빠르게 밟아 내려간다. 내려가고 내려가다 보면 어느샌가 8-1 승강장 앞에 봄 햇빛의 온기가 떠나간 지 오래인 내가 서있다. 출근이 힘든 건 연차랑 관계없다. 입사 2년 차에게도 출근이란 여전히 힘든 여정이다. 가면 갈수록 더 힘들고.
아침 8시에 직장인들이 뿜어내는 그 암울한 기운은 말도 못 할 정도로 전염성이 강하다. 짓고 있는 표정도 하나다. 코로나 때문에 하관에 하나같이 마스크를 차고 있어 더 그렇다. 나는 그래도 그들 사이에서 다른 점들-'그 사람만의' 특징-을 찾아보고 싶어 잠깐의 시간을 할애했다. 당신들도 다 당신들의 생각이 있잖아요. 왜 출근길에서부터 무색무취인척해. 검은 백팩을 매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내 앞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파헤쳐보려 노력한다. 그러다 내가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에 극도의 피곤함을 느껴 다시 눈꺼풀을 내렸다. 이렇게 그냥 엄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면 참 좋겠다.
회사에 도착하기 10분쯤 전부터 아주 밝고 높은 텐션의 사운드에 나를 폭삭 적셔놓는다. 사무실에서는 한 시간 단위로 - 점심시간 이후에는 삼십 분 단위로- 에너지가 급격한 하강곡선을 그리기 때문에 하루의 시작 즈음부터 에너지를 콸콸 펌핑해주어야 한다. 곧 바닥날 에너지라도 미리 확보를 해놔야 하니까. 원기옥 모으듯 오늘 사용할 에너지를 싹싹 끌어모았으면 비로소 오늘 근무가 시작되는 것이다. 컴퓨터의 전원을 켠다. 내 뇌의 스위치도 켠다. 달칵.
분명히 얼마 전 졸업한 대학에서 나는 살아있는 암모나이트 취급을 당하곤 했으나 회사에서의 나는 갓 태어난 신생아나 다름없다. 안녕하세요! 아침에는 모두에게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인사한다. 때때로 사무실 문을 열기 바로 전에 세상에서 내가 제일 행복하고 활기찬 사람이라는 암시를 걸기도 한다.(암시는 암시일 뿐 실질적인 효과는 없음) 밝게 인사하면 - '혜석씬 어려서 그런지 매일 활기가 넘쳐'-꼭 이런 종류의 코멘트가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들어오더라. 나는 어려서 활기찬 사람이 아니라 그냥 활기찬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어제 보고서 하나를 쓰다가 말아서 퇴근 전까지 무조건 마무리하고 검토를 받아야 한다. 일부러 안 쓴 건 아니다. 아직 초짜 중에 초짜라 퇴근시간에 맞춰 일을 끝내는 게 어려울 뿐. 길고 지저분한 문장을 보기 좋게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정리하는데 집중한다. 본연의 나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말단의 작업들인데 이제 자간과 들여 쓰기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니. 어제는 Alt + Shift + n 단축키를 외워놓고 마치 컴활자격증 딴 것 마냥 뿌듯해했다지.
나에게 가장 큰 인내심을 요구하는 시간이 바로 이때다. 보고서를 쓰다 보면 잡생각에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사고, 생각, 사유 비스무리한것들은 회사생활하는데 해롭다. 이곳에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경을 돋우거나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매일 매일 일어나기 때문에. 그 사건들에 매몰되어 끝까지 고민하고 생각하다 보면 사유에서 순도 높은 즐거움을 찾던 나는 어디 가고 그저 퇴사만 고민하는 나만 덩그러니 남아있게 된다. 그러니까 그냥 생각의 싹을 잘라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애초에 내 머릿속에 생각의 씨앗이 내장되어 있음) 전복된 공간. 이상하게 사무실에서 뒤는 앞이고 앞은 뒤가 되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