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고등학교. 그것도 캐나다 현지인들과 경쟁하는 소위 캐나다 명문 사립 고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다. 머야 자랑이야? 흉보지만 말고 끝까지 들어주시길 바란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따로 있으니.
기록으로만 보면 이렇다.
고등학교 전 과목 평균이 98점. 요즘 한국서도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는 그 어렵다는 IB 디플로마를 고등학교 시절 함께 공부했고 45점 만점에 44점을 기록했다. 심심해서 봤었다는 AP는 만점을 기록했다. 미국 대학입시에서 필요한 SAT를 준비 하나 없이 그냥 설렁설렁 보러 갔다 오더니 수학 800점 만점, 영어 760점을 받아 1600점 만점에 1560점을 받아왔다. 공부 좀 하면 만점 받을 거 같다고 실실 웃는다. 특히 수학은 이곳에 이민 온 후 단 한 문제도 틀린 적이 없고, 워털루대학 수학경시대회에선 매번 장난감처럼 메달을 손에 휘휘 돌리며 가지고 왔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2014년 영어로 자기소개 하나 못하던 놈이 이 년쯤 지나자 영어로 반 아이들과 말싸움에서 이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3년쯤 지나자 캐나다 역사를 캐나다에서 태어난 아이들보다 더 잘 알고, 불어로 농담을 하더니 중간에 스페인어를 공부하며 전화로 스페인 친구와 여자 친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가고 싶은 고등학교가 명문 사립 고등학교라며 사립고등학교 입학시험인 SSAT를 본다고 어느 날 갔다 나오는데 다 풀었다고 제일 먼저 시험장에서 나오더니 그 성적으로 명문 사립고등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그리고 그 학교를 전교 1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자. 이쯤 되면 사람들이 물어본다.
어떻게 공부를 시키고 아이를 키웠냐고. 제발 알려달라고 한다. 부럽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른다 얼마나 "소위" 더럽고 치사한 시간을 이 캐나다에서 그 아이의 엄마 아빠라고 불리는 사람이 참고 또 참으며 인내의 시간을 보냈는지. 그랬다. 우리가 해온 아이의 양육과 교육은 "나는 모르겠소" "진짜 모르오"를 외치며 참고 또 참아내며 수치스러움을 견디는 고행과도 같은 시간이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공부 잘하는 아이를 키운 단 한 가지의 비법이라면 비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척"이 아니라 진짜 모르는 것이 문제였다. 동안거나 면벽수행을 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우리의 이 과정에 동의를 못하는 소위 엘리트 부모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분들은 내 얘기서 논 외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영어가 현지인을 능가하고 외국서 공부하며 외국서 자리 잡은 분들이라면 이쯤에서 다른 좋은 글들을 읽으시길 권한다. 해. 당. 사. 항. 없으시므로.
아이 엄마와 나는 지극히 한국적인 마인드로 내 나이 40까지 외국생활을 단 한 번도 꿈꾸지 않은 한국인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았으며 작은집 대출을 갚아가며 아이 하나 키우던 지극히 평범한 그들 중의 하나였다. 영어라고는 26년 전 취업을 위해 토익시험 본 것이 전부였고, 생활영어란 것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 흔한 해외여행도 먹고살기 바빠서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이 캐나다행을 선택한 이후. 아이가 영어로 반 아이들과 말싸움에서 이기고 집으로 돌아오기 딱 그전까지만, 소위 말하는 "육아"가 가능했다. "지도"와 "훈육"이 가능했다.
어느 날 자신을 무시하던 캐나다 현지 아이와 대판 싸우고 씩씩대던 아이가 전화 한 통을 받고는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 싸운 친구가 집에 와 생각해 보니 네 말이 맞았고 자신이 잘못했다며 잘 지내보자고 사과 전화를 해온 것이다. 그날 이후 아이는 세상에 없는 자신감으로 부모 앞에 서기 시작했다.
인내와 고통의 시간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선 이 시기부터 한국에서는 다들 하고 있는, 당연한 한국 엄마 아빠의 역할을 우리는 하려고 해야 할 수가 없었다. 교과서가 있기는 하지만 학교서 주지도, 잘 사지도, 들고 다니지도 않는 이곳에서 노트북 하나로 모든 수업과 과제가 학생과 선생님 사이에 오고 가니 학습 진도나 난이도 확인이 불가했다. 아니다. 할 수는 있었지만 봐도 하나도 모르겠었다. 어려운 영어로 가득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그 쉬운 수학이나 과학 문제들도 풀 수는 있겠지만 도대체 무엇을 묻는지 해석이 불가하니 시도조차 할 수가 없었고, 캐나다 역사나 불어와 같은 수업은 도와주려 해도 도와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교복 입는 날, 야외활동 가는 날, 학교 기부행사 돈 내는 날, 일찍 끝나니 빨리 데리고 가라는 학교 통지가 거의 전부였다.
그것을 아는가? 아이의 학습지도 부분에서 처음에는 "할 수 있는 것도 있음"에서 "도저히 할 수 없음"으로 변하더니 기어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으로 변해가는 부모의 쓰라린 자책을. 그런데 문제는 자책이 자책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 모든 것을 아이가 눈치채고 있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더 이상 나를 도와줄 수 없다에 결론에 이르자. 아이는 모든 것을 혼자 해내야 살 수 있다는 절박함에 이른 것 같았다. 물론 바로 이 부분에서 그대로 주저앉고 포기해 버려 그동안의 수고를 모두 날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많은 아이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지 않았음에는 아이에게 감사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그 인내의 시간을 보상받기엔.
그날 친구에게 사과 전화를 받던 날. 아이는 우리를 바라보며 그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던 것 같다.
일방적인 친구의 괴롭힘에도 내 부모는그 친구 엄마 아빠는커녕 그놈에게도 큰소리 한번 쳐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혼자 싸워 이길 칼을 갈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아들은 그 첫 전쟁에서 승리한 후 걸리적거리는 엄마 아빠를 제쳐두고 혼자만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그 아들의 엄마 아빠는 그 아이에게 더 이상 어떤 "훈육"과 "지도"도 해줄 수 없었다.
아이에게 해줄 것이 없다. 마치 이 말은 무책임한 아동방임 같은 뜻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사실은 그 반대의 뜻을 여기서는 내포하고 있다. 도움 받을 수 없는 아이의 "부모 방임"이 되어버렸다. 배움이라는 것이 꼭 학교에서 배우는 것뿐만이 아닌 사람의 도리. 인간의 가치, 인류애에 대한 희생정신 이런 숭고한 것도 있다.라고 강조하신다면. 과연 한국 고3 부모 중 몇 명이 학교 시험기간과 수능 준비 공부 중간중간에 이런 "부모 됨"의 교육을 시키고 계시냐고 묻고 싶다. 오늘은 학원 가지 말고 인간의 존엄성과 사람됨에 대해서 아빠 엄마와 이야기해 볼까? 이렇게 말이다. 그냥 공부라도 열심히 해라 제발! 이렇게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지금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것 뿐이다. 그것이 핑계라 할지라도.
그래서 우리도 똑같이 그 부분까지는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좋은 부모"의 역할 중 "할 수 있는 것"에 고민하고 있었으나. 이미 아이에게 우리는 집 마당 한켠 볼품없는 오래된 소나무 두 그루에 불과했다.
이렇게 혼자 서기 시작한 아이는 여러 분야에서 너무나 좋은 성과를 내고 있었으나. 이것을 바라보는 이 아이의 부모인 나와 아내는 그저 눈만 껌뻑일 수밖에 없었다. 공부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도, 공부 방법을 알려주는 것도, 시험을 준비하는 계획도 대학을 정하는 것도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봐도 들어도 아무리 노력해도 학사 일정과 학교생활 자체가 생소한 우리에게는 너무도 무리한 부분이었던 거다.
이렇게 해야 되지 않니?라고 물으면 이 도움 안 되는 부모에게 아이는 너무도 쉽게 웃으며 그냥 웃지요의 표정을 지어 보낸다. 결국 시험이 끝나는 날 시험이 끝났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성적표가 나오는 날 이게 도대체 무슨 성적인지 아이의 설명을 들으며 겨우 이해해야 했으며 49점 성적표에 당황해하던 나에게 아이는 세상 해석 불가한 표정을 지으며 50점 만점이잖아요.라고 나 어색할까 봐 속삭여주더니 "지" 방으로 들어간다.
험한 인생 살아가기 위한 아비로서의 "훈육"을 해야 했던, 아니 꼭 하고 싶었던 이 아빠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저 있다면. 가지고 온 결과물에 대한 해석을 부탁하는 것 이외엔. 없었다.
처음에는 친절하게 부모의 도움 없이 해낸 것에 대한 자랑으로 들떠 이야기하던 아이도 고등학교 졸업이 다가오자 그 시절 사춘기 아이들이 그러하듯 삐딱선을 가끔 타곤 했는데, 자격지심 가득했던 이 아비로서는 가끔씩 아들놈에게 무시당한 것 같은 편치 않은 마음에 내가 사춘기 소년이 되곤 했었다. 하지만 티를 낼 수 없었다. 벌거벗는 느낌이었던 거다. 그냥 누르고 누르고 인자한 아비의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러길 꼬박 3년.
아이는 소위 캐나다 좋은 대학 좋은 학과에 부모 도움 없이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가고야 말았고. 그게 좋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비 도움 없이 해낸 것에 대한 서운함도 어쩔 수 없이 느껴지곤 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그거였다.
가끔 집에 들러 함께 예전 이야기를 한다. 이제는 맥주 한잔 하며 지난 못다 한 이야기도 하고 서운한 말도 종종 하곤 하는데... 가끔 술상 엎고 다 큰 놈 궁둥이 팡팡 두드려주고 싶을 때가 많다. 이제는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안보이며, 귀가가 있되 듣지 못하는 자가 돼버린 채 오랜 시간을 지내온 "지" 부모의 인내와 고행의 고충을 이해해 주기는커녕. 부탁하나 하더란 말이다.
아버지. 그냥 계셔주시는 것 그냥 지금처럼 바라봐주기만 해 주시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큰 행복입니다. 계속 오래 지금처럼만 있어 주세요. 애쓰지 마시고 노력하지 마시고요. 그냥 이렇게 있어 주시는 게 제일 좋아요. 라며 웃음 짓는다. 나와 아내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이게 칭찬인지 흉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