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만 해도 여리고 여린 꽃사슴이었던 아내가 얼굴 붉히며 눈 마주치지 못하고 내민 한 마디가
바로 "바보야~"였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어기 주방에는 눌어붙은 프라이팬을 철수세미로 박박 닦으며 신경질 내고 있는 꽃사슴인 적 있던 그분이 서계셨습니다.평소 쓰던 세제가 아니라서 마음에 안 든다며 한숨 푹푹 내쉬며 연거푸 "바보야"를 읊조리다 사라지셨었죠.
이거 아니라고~ 이걸 왜 사 왔어!!! 딱 보면 몰라? 내가 쓰던 거? 안 닦이잖아!!!
헹굴 때 뽀도독 소리도 다르잖아!!!
그러고는 어김없이 한마디 날립니다.
"아이고 ~~~~~바보야"
딱 삼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경우
"아~나는 바보인가 보다 그걸 몰랐다니!!!" 라며 자책했던 적도 있었건만.
근래 들어 목구멍까지 "난 바보가 아니다"라고 항변하고 싶어 집니다.
아니 남편한테 "바보"라니.
세상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하는 억울함도 "퐁퐁" 샘솟습니다.
-"퐁퐁"이라는 표현을 쓰다 보니 다시 한번 퐁퐁이 모든 주방세제를 지칭하는 일반명사란 사실이라는 것을 똑똑히 말하고 싶어 집니다. "퐁퐁"을 사 오라는 건 수많은 세제 중 아무거나 사 오면 되는 거다! 그것이 제품명 "퐁퐁"이 아니라고 해서 내가 "바보"라는 근거는 없다. 인격무시이고 인간 존엄성에 대한 도전이자 남편에 대한 도발이다!!! 이건 너무 막대하는 거다!!!라고 말하고 싶어 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화가 나고 얼굴 붉어지며 가슴 답답해지다가도.
바보랑 20년 살아내 주고 있는 꽃사슴도 돼 본 적 있었던 저 사람 마음생각하면서
또 한 번 그냥 바보가 되어보기로 마음먹어봅니다.
그러자 착해집니다. 눈빛도 온화해졌나 봅니다. 이 상황을 다 느낀 듯합니다.
아무 말 없이 그 말 다 받아내는 내가 보기 안쓰러웠나 봅니다.
"그래도 이건 냄새는 좋네 ~"라며 내 눈치 한번 쓰윽 봅니다.
몇 달 만인지 모릅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긴 것도 같고 오래간만에 이 집 가장대접도 받는 것 같습니다.
아주 큰마음 오늘 먹었나 봅니다.
나모르게 지하냉장고 구석에 보물처럼 숨겨놓은 그 귀한 소주 한 병 꺼내 올라옵니다.
김치전에 매콤 새콤 콩나물무침도 한 움큼 만들어 내옵니다.
그랬어야만 했습니다.
마음 큰 이십 여전 전 키다리 아저씨여야 했습니다.
고맙다 말 한마디면 족했습니다.
기어이 참지 못하고 기회는 이때다 한마디 던지고 나서.
캐나다 이국땅에서 두 달 만에 마주했던 그 귀한 소주는 따보지도 못하고 떠나보내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