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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인철 Jan 15. 2021

R600으로 보내는 보고서-A

arche (  )

                                                                         




“Et lux in tenebris lucet”




1-1

 “그러니까 말이죠......”  여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살던 곳엔 붉고 얕은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어요. 하늘이 푸르다고 말하는 걸 며칠 전에 처음으로 들었어요. 그래요. 내가, 아니 우리가 살던 곳에도 색은 존재해요. 그래서 그 무엇보다 색을 익히는데 많은 노력을 해야 했어요. 그곳에는 푸른 색을 한마디로 정의하지 못하죠.” 여자의 눈이 왠지 파르르 떨렸습니다.

“음악이요?” 여자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했습니다.

“물론 존재하죠. 하지만 그곳의 음악은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아요. 여기선 울려 퍼진다는 표현을 쓰더군요.”

“잠깐만요. 제가 한 번 설명해볼게요. 음…….” 여자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생겼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그곳의 음악은 회상으로부터 탄생하죠. 회상을 위한 필요조건은 간단해요. 삶이죠.” 여자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사라지지 않고 우리와 함께 시간 속에 머물러 있어요.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음악가가 될 수밖에 없는 셈이죠. 그건 아름다운 일이죠. 아름다움이란 증폭될수록 우리 마음 속 상처를 더 깊게 만들어요. 그러곤 어떻게 되냐고요?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우리의 마음에선 피가 흐르기 시작하죠. 우리가 열 수 있는 곳은 마음뿐이기 때문이죠. 놀라셨나요?” 여자는 자신감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습니다.

“여기선 그런 것들을 겪지 않나 보죠? 하염없이 흐르는 피를 바라보는 일은 놀라운 경험이죠. 그 순간에도 음악은 거침없이 시공간을 가득 채우지요. 아! 우리에게도 시공간이 존재하냐고요? 물론이죠. 우리는 신이 아니에요.” 여자는 갑자기 고통스러운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더는 흐를 피가 없어지고 새로운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마치 상처가 난 후에 새살이 돋듯 말이죠. 우리는 이미 세 살때 깊은 고독을 경험해요. 당신들은 절대 알 수 없을 그런 깊은 고독이죠. 짧다면 짧은 그 순간에 피를 흘리며 고독과 싸워야 하는 거죠. 하지만 그 당시에는 우리도 그것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고통스러워 하지요. 하지만 새로운 마음이 들어앉게 되는 순간 깨닫기 시작해요. 음악과 심장에 대한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해요.” 여자는 말을 마치고 나무의자가 불편한 듯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자세를 고쳐 앉으며 하얀 벽에 걸린 시계를 흥미로운 눈으로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차분한 음성으로 무언가를 읊조리듯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이곳에 사는 당신들은 참 재밌는 거 같아요. 빈약한 개념일 뿐인 수를 가지고 ‘시간’을 붙잡아 두려고 하다니……. 아니, 용감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해하기 힘든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에요. 우리에게 시간은 개념도, 지배해야 할 어떤 것도 아니에요. 우리는 그저 시간을 묵묵히 관조하죠. 그냥 바라보고 있을 뿐이라고요. 그곳엔 시계가 존재하지 않아요. 누구도 시간을 묻지 않죠.”

 “잠깐만요.” 소파에 앉아 묵묵히 여자의 말을 듣고 있던 남자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낮고 짙은 음성으로 그녀의 말을 끊었습니다. 

 “당신의 말은 이해하기 힘들군요. 대신 내 말을 들어보는 건 어때요?” 남자의 눈빛은 의미심장했습니다.

 “좋아요. 그럼 어디 한 번 당신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죠.” 여자는 기분이 상한 듯 얼굴을 붉혔지만, 이내 웃으며 남자에게 차례를 넘겨주었습니다.

 “난 곧 죽습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죽음은 찾아오기 마련이지요. 그렇습니다. 내일이 될지, 일 년 후가 될지 혹은 몇 분 후가 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미래가 우리 모두를 잘근잘근 씹어 삼킬 테지요. 그것보다 자명한 사실은 없어요.” 남자의 얼굴은 굳어있었습니다.

“그렇지요. 죽음은 탄생보다 더 강력하고 자명하며 확실합니다. 문제는 그 자명하신 분이 곧 나를 방문한다는 겁니다. 며칠 전부터 몸이 뻐근하더군요. 저는 당장 의사에게 달려갔죠. 의사는 그러더군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환자분은 희귀한 병을 앓고 있습니다. 병의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병의 결과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의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잘도 주절거리더군요. 매우 지쳐있었던 것 같아요. 불쌍하지요. 매일 병든 사람들을 상대하는 직업이란.” 남자는 투덜거렸습니다.

“아무튼, 의사는 계속해서 말했어요. ‘환자분의 몸은 굳어가고 있습니다. 근데 그 진행속도가 너무 빨라요. 루게릭병이나 파킨슨병의 경우에도 빠르면 3년, 길게는 10년이란 시간을 갖고 진행되는데, 환자분의 경우에는 길게 잡아도 5개월을 넘기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의사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어요.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그 상황이란 게 너무도 심각하면 오히려 알 수 없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마음의 여유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저는 의사에게 물었어요. 도대체 왜 제게 이런 병이 생긴 것인지. 의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을 뿐이었죠.” 남자의 음성이 흥분의 문턱을 넘으려 하자 여자는 피식 웃었습니다.

 “뭐죠? 왜 웃으시는 거죠?” 남자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아니, 아니에요. 계속 하세요.” 여자는 남자의 시선을 피해 손짓하며 말했습니다.

 “제 얘기가 웃긴가요? 전 당신처럼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있는 지금, 난 당신에게 마음을 열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웃을 일은 아니지 않나요? 좋아요. 듣기 싫다면 더는 제 얘기를 늘어놓지 않겠습니다.” 남자의 음성에서 약간의 노여움이 느껴졌습니다.

“아니, 계속 하시라고요. 계속 듣고 있었잖아요. 그렇게 쉽게 마음을 닫기엔 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지 않은가요?” 여자의 조롱기 섞인 말은 남자의 얼굴을 더 붉게 만들었습니다.

“알겠습니다. 당신은 지금 저를 비웃고 있지만, 좋습니다. 맞아요. 이런 작은 것에 에너지를 허비하기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남자는 다시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어디까지 얘기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아, 그래요. 의사는 제 질문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의사에게 어떠한 답을 원하고 질문을 했던 것도 아니었죠. 저는 진찰실을 성급히 빠져나와 무작정 택시를 타고 단골 술집으로 갔죠. 전 그때가 정오란 걸 잊고 있었어요. 굳게 닫힌 술집에 침을 뱉어버렸습니다. 그냥 제 마음속 분노를 뱉어 버리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삼청동으로 향했습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담뱃갑을 꺼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내가 살았던 그곳에선 말이죠. 담배는 필요치 않았지요.” 여자는 남자의 꾸겨진 담뱃갑을 쏘아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저는…….” 남자는 여자의 차가운 시선을 피하며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보세요. 폐가 썩어들어가는 속도보다 제 비루한 육체가 굳어가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 뭐가 중요하단 말이죠? 결국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다면 지금을 즐겨야 할 의무만이 남아있습니다. 아시겠어요?” 남자는 여자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저는 삼청동으로 향했습니다. 햇살이 골목 구석구석에 달라붙어 있는 날이더군요. 감상적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요.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싶었습니다. 걸었습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저의 비루한 육체는 곧 지치고 말더군요.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숨을 돌리고 싶었습니다. 담배도 한 대 피고 싶었고요.” 

“잠깐만요. 그날 있었던 일을 전부 다 말할 작정은 아니시죠?” 여자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아,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당신이 살았다던 그곳에서는 상대방의 얘기를 끝까지 듣는 법이 없나 보군요. 제 얘기가 지겨운가요? 지금부터가 진짜 재밌어 질 텐데요. 인내심을 조금 더 기를 필요가 있겠군요.” 남자는 여자를 나무라듯 말했다.

“그래요?” 여자의 얼굴은 조금 붉어졌습니다. “ 그럼 어디 한번 해보세요.”

“그래요. 아무튼, 저는 커피 두 잔을 주문했고, 의자에 앉아 커피가 나오기도 전에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죠.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어요. 담배 맛이 좋더군요. 흡연같은 작은 기쁨들과 곧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저를 슬프게 했습니다. 죽음을 실감하는기는 쉽지 않아요. 죽음은 너무나 거대하잖아요. 하지만 죽음이 가져오는 부수적인 것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슬픔과 허무함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튼, 그렇게 슬픔에 잠시 잠겨있을 때였어요. 주문한 커피 두 잔이 나왔습니다. 커피 향이 진하고 좋더군요. 에스프레소를 들이켰습니다. 쓰고 신 맛이 입 전체를 상쾌하게 하던군요.” 남자는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습니다.

“담배 한 대를 더 물었습니다. 커피와 담배보다 더 환상적인 조합은 없을 겁니다. 카페에 있는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왠지 정겨웠습니다. 그때 시선이 한 쌍의 남자들에게 가 멈췄습니다. 저는 제 눈을 의심했지요. 그 짧은 순간에 저는 자신이 촌스럽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히 저의 두 눈은 그 한 쌍에게 못 박혀 버린 듯 멈춰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둘은 손을 맞잡고 있었어요. 저는 얼른 시선을 거두고 싶었지만, 뭐에 홀린 듯 그 둘을 넋 놓고 바라보았답니다. 둘은 제 시선을 느꼈는지 조금 불편해하는 것 같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서로의 손을 어루만졌어요. 저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마시던 커피를 계속해서 마셨죠. 심장이 두근거리더군요.” 남자는 여자의 못마땅한 듯한 시선을 느끼고는 물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하고 싶은 얘기가 도대체 뭐죠?” 여자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그곳엔 사랑이 존재했나요?” 남자는 여자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물었습니다.

“우리도 숨을 쉬고 산다는 걸 아직 모르셨나요?” 여자는 남자를 향해 도전적으로 물었습니다.

“그렇군요. 사랑이 존재하는군요. 그럼 동성 간의 사랑도 존재했나요?” 남자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모든 형태를 즐기지요. 신은 사랑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여자는 웃으며 여유롭게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신은 아니지요.” 남자는 여자를 책망하듯 말했습니다.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군요. 우리에겐 모든 사랑이 존재하고 모두가 용감하게 사랑을 하지요. 또한, 모든 이가 용감하게 사랑을 받아요.” 여자의 두 눈은 자신감으로 번쩍였습니다.

“모든 사랑이 존재한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더라도 그것이 장벽을 뛰어넘었다는 말 아래 허용된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 제 말이 틀렸습니까?” 남자는 따지듯 물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이곳과 그곳의 삶의 방식은 다르다고요. 이곳의 개념을 그곳에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제가 아무리 설명을 한다 해도 당신은 이해할 수 없을 거에요.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하도록 하지요.” 여자의 여유 넘치는 대답에 남자는 조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자는 어렵게 잡은 승기를 끝까지 밀고 나가 승리를 하고 싶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그런 남자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남자의 결투신청을 능숙하게 피했습니다.

“계속 하시죠.” 여자가 물었습니다.

남자는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대화를 그만둔다면 자신의 옹졸함을 드러내는 꼴이 될 것이고, 그것은 더 큰 패배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나 한 듯 어렵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부러움과 질투에 앞서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마시던 커피를 놓아두고 그곳에서 나와버렸습니다. 그곳에 앉아있을 수 없었거든요. 그 게이 커플을 보고 혐오감을 느꼈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오히려 저는 저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습니다. 제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요. 누구나 죽습니다. 죽음은 혐오해야 할 대상은 아니지요. 하지만 외로움은 그렇습니다. 고독감과 외로움의 차이를 아시나요? 저는 항상 제 자신을 고독한 존재라고 여겼지요. 그리고 그 고독감을 의연히 받아들이며, 심지어는 즐긴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제게 남은 건 지독한 외로움뿐이었어요. 누군가를 안고 싶었습니다. 카페에서 나와 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모든 사람을 안고 싶었어요. 당장에라도 내밀한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마음속의 외침은 시작되었고, 저는 그 외침을 현실의 세계로 끌어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길을 걷고 있는 저는 혼자였습니다.” 남자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사랑하지 않나요?”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물었습니다. 

“사랑하지 않냐고요? 사랑하고 싶습니다. 사랑하고 싶습니다.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싶어요. 단 한 사람만을 용감하게 사랑하고 싶어요. 두려움 없이 사랑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너무 늦었어요. 그 누구도 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 저 역시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구요. 용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없어요. 제겐 남아있는 시간이 없다구요. 모든 걸 빼앗아 버렸어요. 시간이…….” 남자의 두 눈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사랑하지 않는 거군요. 간단히 말하자면.” 여자의 음성은 차가웠습니다.

“…….”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묵묵히 땅바닥으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들어 여자를 바라보았습니다. 

“저……. 혹시……. 아니에요.” 남자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다시 시선을 아래로 떨궜습니다.

“뭐지요? 말해봐요. 말해보시라고요. 괜찮으니까 말해봐요.” 여자는 거의 보채듯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제 시간도 늦었고 피곤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제 잠자리에 드는 게 어떨까요?” 남자는 여자의 두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뭐야? 오빠,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여자는 손바닥으로 남자의 허벅지를 세게 내리치며 소리쳤습니다.

“왜? 이제 밤이 깊지 않았습니까? 벌써 열 한시야. 내일 회사 가려면 이제 자야지. 뭐 잘못된 거야? 넌 안 잘 거야?” 남자는 겸연쩍게 웃으며 여자의 양어깨를 감쌌습니다.

“아, 이거 놔! 매번 이런 식이야. 내 얘기는 하지도 못하게 매번 가로막고는 자기 얘기만 하다가 피곤하다고 하고. 맨날 이런 식이잖아.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은데 일주일에 한 번인데, 내가 얼마나 많이 준비하는 줄 알아? 나 집에 갈래.” 여자는 감싸 안은 남자의 손을 뿌리치며 일어섰습니다. 

“그래, 그럼 네 맘대로 해라. 나도 피곤하다고. 이제 상황극도 질린다고!” 남자는 두 눈을 부릅뜨고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방을 나가버렸습니다. 


 1-2.

“기억과 형상에 시간을 더해 왜곡을 만들어 아름다움에 살을 부풀린다. 

작은 오르막길을 바라보며 너를 떠올렸다. 골목길은 변하지 않았고 시간은 박제되어 진화했다. 그 길이 있었고 우리가 있었고  시간이 있었다. 우리는 어렸고, 술이 없었고, 초콜렛이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순정의 시간은 너무도 빠르게 지나가 버렸다. 

잎이 피고, 지고, 썩어서 지금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이 되고,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니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고독했다. 서로를 위해 고독했다. 고독을 위해 서로를 사랑했다. 

서로의 영혼을 갈구했던 시간은 어디를 향해 날개짓 했을까. 

나는 가끔 네가 그립다. 

그리움은 가끔 내가 된다. 

되어버리고, 흩어진다. 

우리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날 저녁. 

꽃 향기 흐드러져 공기 속을 난무할 때

내 몸속 어떤 것은 

‘처음’을 맛 보았다. 

마음의

처음을

잊겠다니. 

이제 꽃은 향기를 날려 보냈다. 

날린 꽃 향기는 이제 돌아올 수 없다.” -Pablo Mentiroso-


 존경하는 R600 행성 장관님께.

이곳으로 보내진 지도 벌써 열 달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는 벌써 이들의 시간 개념을 받아들여 불편함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1943년 이후 70년 만에 재개된 지구별탐사계획에 제가 선택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1943년 프랑스의 한 작가가 우리 행성계의 문제였던 ‘어린 왕자’-이곳에선 그를 여전히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와의 조우에 관한 글을 발표한 이래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의 충격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파견되었던 이들은 급히 귀향해야만 했고, 그들의 모든 보고서는 전부 불에 태워졌던 그 날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B612의 그 녀석이 우리의 비밀을 발설한 이유는 외로움이었을 겁니다. 저 역시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 그에게 저의 비밀의 전부를-아니 일부만이라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나 느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경솔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매일 제게 주어진 임무를 용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이 즐겨 말하는 운명이란 것은 실제로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떠나기 전 받은 집중교육이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선배들의 노력과 수고가 헛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후배들을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업적을 쌓고 싶습니다. 물론 그 정도의 업적을 쌓으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구에 처음 도착해 겪었던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바로 이들의 ‘시간’에 적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시간’이 저희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는 것은 아직 불가능합니다. 단지 그 차이점이란 걸 살갗에 스치는 바람처럼, 그렇게 느낄 따름입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이 부분에 대한 섬세한 보고서를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첫 보고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첫 보고서가 장관님의 마음에 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만, 아직 제게는 보고서란 형식이 낯설고 어색하다는 것 또한 말씀드립니다. 물론 장관님께선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 아니지만, 제게는 정확하고 객관적인 보고서를 올려야 할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사실 저는 이 ‘객관성’과 ‘사실성’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해 보았습니다. 첫 보고서를 쓰고 지우길 몇 차례 반복하면서 ‘왜 장관님은 영상보고서를 원하지 않으셨을까?’란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영상보고서야말로 객관성과 사실성을 전달하는데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저의 머릿속을 끝없이 맴돌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장관님이 원하시는 것은 딱딱하게 문서화된 보고서가 아닌 객관성의 유지와 사실 묘사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저를 통해 걸러진 일종의 ‘이야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니었겠느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올린 보고서의 두 남녀를 처음 만난 곳은 한 커피 가게에서였습니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는 둘의 첫인상은 ‘건조함’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기쁨의 색이 없었습니다. 둘은 커피를 주문하고 앉아 각자의 전화기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둘의 관계가 궁금해져 이들을 한 달가량 쫓아다녔습니다. 지구인들은 누구나 한 번씩 서로에게 빛이 되어주는 존재를 발견해내고 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관계가 막 시작될 때, 이들은 서로에게 엄청난 열정을 쏟아부으며 서로의 시간 속으로 침투하기를 갈구합니다. 그 열정은 이들이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죽음마저도 이길 정도의 강렬한 에너지를 뿜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서로를 향한 열정과 노력은 이내 사그라지고 맙니다. R600에서 일어나는 정반대의 일이 이들에게는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들은 나름대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앞의 보고서에서 읽으신 바와 같이 이들은 새로운 것들을 시도했고,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장관님, 여자의 직관력이 놀랍지 않으셨습니까? 이 여자로 인해 저는 모든 지구인이 다 지리멸렬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지구인을 발견하는 것은 이곳에서 누리는 저의 작은 행복 중 하나입니다. 이 남자 역시 제게는 흥미로운 발견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곧 저는 이 남자의 무료함에 싫증을 느꼈습니다. 여자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쏟았던 노력과는 달리, 남자는 또 다른 사랑을 찾는데 자신의 열정을 쏟으려 했습니다. 지구인들의 대부분은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원합니다. 이들은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들이 그토록 바라는 새로운 것도 언젠가는 낡은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왜 이들은 깨닫지 못하는 걸까요? 우둔한 것인지, 무모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역시나 이 남자의 마음속엔 새로운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엄청난 욕망이 끓어 오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 남자는 여자의 몸을 끊임없이 원했습니다. 여자 역시 그렇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자는 육체적 관계를 통해 상대방의 영혼 깊숙한 곳에 도달하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여자가 남자와 사랑을 처음 나눈 날의 일기를 몰래 읽어 보았습니다. 장관님께 기억을 되살려 여자의 일기를 적어 보내드립니다.

‘(나)는 (그)와 사랑을 나눈다.

그의 숨이 나의 살을 스친다.

그는 눈을 감고

나는 눈을 감는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며 멈추었다.

살을 통해 우리의 마음은 전달된다.

그와 사랑을 나눈다. 입을 맞추고 시간 속에서 몸을 섞는다.

신비로운 시간이 시작된다.

사랑의 몸짓은 분명 그 자체의 행위보다 더 커다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가까워진다. 가깝지 않고는 사랑을 나눌 수 없다. 그와 나는 하나가 되려한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는 둘이다.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슬픈일이 아니다.

우리의 영혼은 끊임없이 하나가 되려 철저하게 몸부림친다.

그렇지 않다면 이 모든 것들은 다 부질없는 짓이다. 아름다운 음악이 나의 귓가에 울려퍼진다. 나와 그는 서로 다른 육체를 갖고 서로를 갈구한다.

영혼이 포개어지는 순간이 찾아오기를.

나는 그렇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가 멀어져간다. 

내 마음은 그를 재생시킨다. 그가 들어왔던 자리는 꽃향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남자는 그것을 끓어오르는 욕구의 해소로 여겼습니다. 남자는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담배를 한 대 피웠을 뿐입니다. 남자의 이야기 역시 진부하지 않았습니까? 죽음을 목전에 둔 사내라는 상황 설정은 그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습니다. 진부하기 짝이 없습니다. 결국, 이 둘의 공통된 문제점은, 저의 부족한 판단에 의하면, 책임감의 결여였습니다. 지구인들의 사랑은 추위에 떠는 작은 새와 같습니다. 이 둘은 각자 서로 다른 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지구인들은 너무 성급합니다. 이것 역시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 중 하나입니다. 이 둘이 각자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앞으로 둘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는 다른 보고서를 통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지구별에서 ensoph 올림


추신 1:지구인들은 피상적 관계가 끊어지면 모든 관계가 소멸한다고 믿습니다. 하나의 관계가 소멸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무한하다는 것을 이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급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신 2: 이곳의 중력 가속도는 아시다시피 대략 9.80665 m/s² 입니다. 즉, 제 투명 망토가 견딜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에서 두 시간 남짓하다는 것을 참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존경하는 R600 행성 장관님께

첫 번째 보고서를 올린 지 한 달 남짓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들의 ‘시간이 흐른다’는 표현이 흥미롭지 않으십니까? 사실 얼마 전 흥미로운 이야기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습니다. 한시바삐 장관님께 전달해드리고자 하는 열망이 저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기에 서둘러 보고서를 보내드립니다. 짐작하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들은 이야기는 바로 ‘시간’에 관한 한 지구인의 이야기입니다. 늦은 오후, 저는 벤치에 앉아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선 오후의 어느 순간이 되면, 태양이 길게 눕기 시작하며 만들어내는 빛으로 지구인들의 긴장감이 살짝 사그러집니다. 이때가 되면 사람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느린 걸음으로 길을 배회하기도 합니다. 마치 태양이 사라지기 전에 소란스럽게 그들만의 의식을 치르는 새들과 같습니다. 아! 장관님. 저는 수많은 새들이 떼 지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R600에는 이 정도로 많은 새가 떼 지어 나는 광경을 볼 수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실제로 저는 단 한 번도 이렇게 많은 새를 한꺼번에 본 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새들의 신비로운 비행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장관님께서 영상보고서 방식을 채택하셨다면 이 진풍경을 전해드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 수많은 새가 태어나는 곳은 어디이며 이들의 무덤은 어디인지 알아낼 길은 없지만, 만약 알아낸다고 해도 이들의 진짜 비밀을 밝혀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새들의 비행을 바라보면 저는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져 버립니다. 처음엔 그것이 슬픔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슬픈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야 그 감정의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검은 물’과 같은 감정입니다. 장관님은 분명 ‘검은 물’과 같은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드리고자 하는 이야기를 이어나가겠습니다. 저는 투명망토를 걸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죠. 투명망토를 걸치지 않아도 제게 관심을 두는 지구인들은 거의 없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단지 무수히 많은 사람 중에 의미 없는 한 사람일 뿐입니다. 떼 지어 나는 무수히 많은 새 중에 한 마리가 없어져도 그들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튼, 제가 앉은 벤치에 두 사내가 앉았습니다. 그들은 너무 젊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늙지도 않은 그냥 적당한 나이의 사내들이었습니다. 한 명은 누구나 끼고 다니는 두꺼운 테두리의 안경을 끼고서 연신 머리카락을 만져댔고, 다른 한 명의 팔뚝엔 지워지지 않는 그림이 잔뜩 그려져 있었습니다. 지구인들 사이에선 몸에 지워지지 않는 그림을 새겨넣는 것이 새로운 유행입니다. 이들의 대부분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항상 새로운 것을 찾습니다. 영원히(‘영원’이란 의미를 이들은 이해하고 있는 걸까요?) 몸에 남을 그림을 그리는 것을 새로운 유행으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모습은 저로 하여금 질문을 하도록 합니다. 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새로운 것일까요, 아니면 영원한 것일까요? 아니면 이들은 너무 욕심이 많은 나머지 ‘영원한 새로움’을 원하는 것일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장관님. 장관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도 이들이 즐기는 ‘담배’를 피워보고 싶습니다. 도대체 어떤 맛을 가지고 있기에 이토록 ‘담배’에 열광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뿜어져 나오는 연기의 냄새는 지독하지만, 분명 제가 알 수 없는 뭔가가 이들의 육체와 마음을 위로해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빨아들이는 연기가 마음을 따듯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질문들을 머릿속으로 저 자신에게 던지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한 아이가 있었답니다. 그 아이는 너무 작고 연약해서 세상의 빛을 처음 보았던 그 순간 생명을 고스란히 바람에 되돌려 줄 뻔했다고 합니다. 그 아이는 너무도 작고 연약해서 여섯 살이 되던 해까지 집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답니다. 아이에게 집 밖의 세상은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유리창을 거치지 않고는 세상을 보지 못했답니다. 처음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느낀 것은 바람과 빛이었답니다. 아이의 부드러운 머릿결이 바람에 날렸고 따스한 빛이 아이의 연약한 살결을 어루만져주었을 것입니다. 아이는 언제까지고 밖의 세상에 머무르고 싶었지만 연약한 아이의 건강은 그의 간절한 바람을 이루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답니다. 어느덧 아이는 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었습니다. 작고 연약한 아이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었지만 그건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답니다. 어린아이들이 친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함께 뛰노는 것인데, 아이에겐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아이는 소외됐고, 혼자 의자에 앉아 그의 유일한 친구들인 햇빛과 바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뿐이었답니다. 아이가 열 살이 되던 해, 아이의 생일선물로 부모님은 손목시계를 선물했답니다. 아이는 그전까지 시계를 본 적이 없었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겠죠. 그리고 아이는 선물 받은 손목시계로 인하여 특이한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는 며칠을 시계만 바라보며 지냈답니다. 열두 살이 되던 해 아이는 한 여자아이를 짝사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아이는 시계 바라보기를 그만두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무시무시한 일은 여기서 발생하였답니다. 평소 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던 아이가 어느 날 자신이 좋아하던 여자아이 앞에서 모욕을 당했다는 겁니다. 그 아이가 당한 모욕의 세세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아이는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짝사랑의 상대 앞에서 당한 모욕에 아이는 얼마나 큰 수치심을 느꼈을까요? 아이는 며칠 동안 침대에 누워 앓았다고 합니다. 한 차례 깊은 열병을 겪고 난 아이는 문득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하지만 아이는 강해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체육 시간이었답니다. 아이는 늘 그랬듯이 운동장 옆 계단에 앉아 아이들을 지켜보아야만 했답니다. 그날은 체육대회의 단거리 달리기 반 대표를 뽑는 날이었답니다. 아이는 반 대표가 되려 죽을 힘을 다해 달리는 아이들을 조용히 앉아 지켜보았답니다. 그런데 단거리 달리기 반 대표가 된 아이는 자신을 모욕했던 패거리의 주동자였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짝사랑했던 여자아이조차 그 주동자 녀석의 선출을 기뻐했다는 겁니다. 아이는 다시 한 번 영혼 깊이 지워지지 않을 모욕감을 느꼈을 겁니다. 아이는 계단에 앉아 강해진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답니다.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은 그 녀석보다 더 빠르게 달리는 것으로 생각했답니다. 그 날 이후로 아이는 방과 후 운동장을 뛰기 시작했답니다. 처음에 아이는 운동장 한 바퀴를 완주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같은 반 아이들은 그런 아이의 연약함을 비웃었답니다. 아이를 조롱하며 ‘병신’이라고 외쳐댔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이의 귀에는 그 외침이 들어오지 않았을 겁니다. 아이에겐 태어나 처음으로 목표가 생겼던 것입니다. 아이는 목표를 향해 달렸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아이는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어느새 운동장 한 바퀴를 완주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되었답니다. 아이는 등굣길에도 달렸고, 하굣길에도 달렸답니다. 미친 듯이 달렸고 또 달렸답니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나 운동회 날이었답니다. 아이는 운동회 내내 긴장감과 초조함에 시달렸을 겁니다. 드디어 운동회의 마지막 순서인 단거리 달리기 시합이 다가와 아이는 천천히 그리고 비장한 얼굴로 반 대표로 뽑힌 아이들 곁으로 다가갔답니다. 아이는 물론 반 대표가 아니었답니다. 아무도 출발선을 조금 벗어난 곳에 서 있던 아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이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답니다. 긴장감에 두 다리가 벌벌 떨렸을 겁니다. 그리고 땅! 하는 소리와 함께 경주가 시작되었답니다. 아이는 두 눈을 감고 달렸다고 합니다. 아이는 바람을 가르며 마치 빛의 속도로 달리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을 겁니다. 그렇게 달렸답니다. 경주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고 합니다. 경주선 옆에서 뛴 아이는 가장 먼저 결승점에 도착하였답니다. 사람들은 놀랐고, 아이도 놀랐답니다. 아이를 모욕했던 주동자 녀석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그 날 아이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모든 아이가 그에게 몰려왔고, 아이는 승리감을 만끽하였답니다. 아이는 강함이 수반하는 기쁨을 그날 처음으로 느꼈을 겁니다. 하지만 승리감과 기쁨도 잠시였다고 합니다. 운동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여느 때와 같이 아이는 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뛰고 있는 아이 옆으로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갔답니다. 자동차의 열린 창문에서 그 주동자 녀석은 아이를 향해 뭐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차는 주동자 녀석 어머니의 차였습니다. 아이는 달리기를 멈추고 쌩하고 지나가 버린 자동차를 허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답니다. 아이는 들었을 겁니다. 자신의 강함이 더 거대한 강함 앞에서 산산이 조각나는 소리를. 그 날 아이는 더없는 기쁨과 심연의 슬픔을 동시에 맛보았을 거고, 더 강한 것은 쓴맛이었을 겁니다. 아이는 그 날 이후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이의 마음을 파괴한 것은 자동차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시간’이란 강력한 존재였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아무리 강해진다고 해도 ‘시간’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이는 방 안에 자신을 가둔 채 한 없이 반복되는 시간을 곱씹고 또 곱씹었답니다. 그러다 아이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엄밀하게, 아주 엄밀하게 접근해보면 결국 현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그렇게 현재의 존재를 부정해보아도 시간의 지배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었을 겁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빛도 지구에 도달하는데 8분이란 시간이 걸리고, 영롱하게 빛나는 달빛도 지구까지 도달하는데 1초 남짓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현재란 끊임없이 소멸하며, 남는 것은 과거일 뿐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론은 아이에게 커다란 공포감을 안겨주었답니다. 자신이 시간의 지배 아래 매 순간 빠르게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 이제는 아이에겐 시원한 바람도, 따듯한 햇빛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들 역시 지나갈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허무함만이 아이의 마음을 가득 채웠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매 순간 죽어갔습니다. 아이는 스무 살이 되었습니다. 즉, 아이는 이십 년 동안 시간의 지배 아래 죽어갔습니다. 하루하루가 죽음인 삶은 도대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이겠습니까? 저는 그 깊은 고통을 감히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하며 아이는 웃었답니다.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시간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지려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좌절의 쓴맛을 견뎌야 했으며, 얼마나 깊은 고통을 침묵으로 이겨내야만 했을까요? 아이는 왼손에 권총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답니다. 청년이 된 아이가 마지막으로 백지에 남긴 문장은 이랬답니다. ‘나는 패배를 맛보며 승리했고, 승리를 맛보며 패배했다.’ 

 장관님께선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만약 이 아이가 우리별에서 태어났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시종일관 해 보았습니다. 정확한 결론을 내리기란 쉽지 않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만약 이 아이가 우리별에서 태어났었더라면 적어도 그토록 슬픈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지구인들의 시간관념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이들은 시간을 극복해야 할 지배자로 생각합니다. 지구인들은 대단히 전투적입니다. 이들은 항상 싸워야하며 이겨서 쟁취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독특한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지구인들은 ‘더 빠르게!’라고 매일, 하루종일을 부르짖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 이들이 더 빠르게 하길 원치 않는 것이 몇가지 있긴 합니다. 이들은 더 빠르게 일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들은 더 늦게까지 잠자리에 머무르려 합니다. 더 흥미로운 일은 지구별 남자들은 여자들과 사랑을 나눌 때에 있어서 만큼은 이들의 시간의 법칙을 깨려고 노력한다는 점입니다. 이 시간만큼은 ‘더 빠르게’는 더 비참한 패배를 의미합니다. ‘시간’에서 시작된 저의 의문은 길을 잃고 있습니다. 분명 이들은 전투의 승리와 쟁취에서 만좀감과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빨라질수록 더 슬퍼집니다. 하지만 이들은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슬픔과 공허함을 채우려 이상한 짓들을 해버립니다. 지구인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술을 마십니다. 이들은 시간을 쟁취하려 미친듯이 몸부림을 치다가 일정 한계점이 도달하면 술을 마셔버립니다. 그때부터 이들에게 시간은 무의미해집니다. 장관님께서 아침에 일터로 나가는 지구인들의 얼굴을 보신다면 숨이 막혀버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빨리 R600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매일 밤 저는 하늘을 올려다 봅니다. 하지만 이곳 하늘은 별들을 삼켜버렸나 봅니다. ensoph 올림.


1-3. 

“아픔이란 가슴 전체가 모두 아린, 그런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죽어야 하는 그런 것이었다. 팔과 머리의 기운을 앗아 가고, 배게 위에서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지게 하는 그런 것이었다.”

                                                                                                              -José Mauro de Vasconcelos-


“당장 옷 다 벗어!” 여자는 아이를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자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엄마, 잘못했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아이의 두 눈에선 눈물이 흘렀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그래도, 이 새끼가” 여자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를 마구 두들겨 패기 시작했습니다. 여자의 두 눈은 뭐에 홀린 듯했습니다. 아이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여자의 주먹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엄마! 어…. 엄마. 잘못. 자. 잘 못.했어요. 한.번만 봐. 봐 주세요.” 아이는 자신을 때리는 여자를 향해 울부짖으며 애원했습니다.

한바탕의 주먹세례가 끝나자 여자는 조금 지쳤습니다. 아이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저 현관문 모서리에 몰려 울고 있었습니다. 

“너, 내가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옷 벗어. 안 그러면 너 오늘 내 손에 죽는 줄 알아. 알겠어?” 여자는 무언가를 토해내듯 아이를 향해 소리 질렀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옷을 벗지 않고 울고만 있었습니다. 여자는 다시 아이에게 돌진하여 주먹을 날렸고 아이는 겁에 질려 울부짖으며 필사적으로 작은 두 손을 비비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아이의 울음소리도 공포에 질린 간절한 애원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이는 작은 몸을 부르르 떨며 제 손으로 옷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다 벗어!” 여자는 또다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이는 결국 속옷까지 다 벗었습니다. 

“나가!” 여자의 날이 선 목소리에 아이는 다시 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엄마! 한 번만 봐주세요.” 아이는 현관문을 열다 말고 뒤돌아 여자를 보며 다시 한 번 애원했습니다.

“빨리 안 나가? 나가! 내가 너 뭐라고 그랬어? 응? 이 새끼야. 나는 무슨 돈이 썩어나서 너 학원 보내는 줄 알아? 그 정도로 돈을 처발랐으면 성적이 올라야 될 거 아냐? 넌 이 새끼야, 글러 먹었어. 가서 일등하는 애들 똥이나 닦아주면서 살아. 알겠어? 당장 나가. 빨리!” 여자의 분은 극에 달해 아이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사정없이 흔들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의 가녀린 몸은 분노의 리듬에 맞춰 이리저리로 흔들렸습니다. 집 밖으로 쫓겨난 아이는 훌쩍대며 울었습니다. 어둡고 차가운 바람이 아파트 복도를 연신 휘저어 댔습니다. 아이는 자신의 알몸을 어떻게든 감춰보려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두 팔로 작은 알몸을 감싸 안았습니다. 그리고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습니다. 아파트 복도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이는 콧물과 눈물을 동시에 흘리며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삼십 분 가량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이는 더는 추위를 참지 못하고 쪼그렸던 몸을 일으켜 초인종을 누르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엄마!” 아이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는 분명 겁에 잔뜩 질려 있었습니다. 대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바람을 피해 보려 복도 구석을 방패 삼아 몸을 웅크려 앉았습니다. 그때 복도 끝 맞은 편에서 누군가가 보였습니다. 아이는 놀란 표정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아이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있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수치심이었습니다. 아이는 고개를 무릎 사이로 파묻고 몸을 더 웅크렸습니다. 이웃사람은 어둠에 가린 아이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웃집 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아이는 고개를 들고 안도의 표정을 지었습니다. 몇 분의 시간이 더 흘렀습니다. 아이는 다시 초인종을 누르기 시작했습니다. 차가운 바람에 아이의 온몸은 조금씩 굳어가고 있었습니다. 역시 대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아무 말 없이 계속해서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대문은 굳게 닫혀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이는 한참 동안 대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날 밤 아이는 굳게 닫힌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울고 또 울었습니다. 아이는 혼자였습니다. 


 장관님께.

‘자네는 지구별에서 거대한 슬픔을 마주하게 될 걸세. 하지만 잘 새겨듣게. 자네는 그곳에 동정과 연민을 느끼러 가는 것이 아니네. 단지 그것들을 지켜보고 보고서를 써 보내면 되는 거야. 그것이 자네의 의무라네.’ 그렇습니다. 고향을 떠나기 전 마지막 면담에서 장관님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임무수행을 마치고 돌아온 선배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셔야 했던 장관님의 그 말씀은 저를 보호하기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장관님, 정말 저의 의무가 단지 보고서를 써보내는 것뿐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면 저는 이 슬픔을 마주하고 어찌해야 합니까? 왜 그건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지구별의 슬픔 앞에 서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방법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장관님,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이곳은 너무나도 위험한 곳입니다. 제 안의 무언가가 자꾸만 저를 움직이게 합니다. 장관님, 저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저도 선배들처럼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까? 만약 선배들이 ‘행동’을 허락받았다면 상황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들도 저와 같은 것을 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들도 저와 마찬가지로 ‘행동’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혼자 알몸으로 대문 밖에서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 아이를 단지 지켜본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건 고문입니다. 저는 보았습니다. 지구별의 가장 큰 슬픔은 아이들의 눈물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을. 그 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대한 슬픔의 씨앗이 숨겨져 있습니다. 저는 보았습니다. 그 씨앗이 자라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겠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저에겐 지구별에 대해 어떠한 의무도 책임감도 없다는 것을. 장관님. 저에게 ‘행동’을 허락해 주십시오. 만약 저의 청이 거부된다면 저는 더는 보고서를 올릴 수 없습니다.  ensoph 올림


1-4.

“아름다움이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거야! 내가 아름다움을 무섭다고 한 것은, 아름다움에는 일정한 개념을 확립시킬 수 없고 또 개념의 한계가 불충분하기 때문이야. 하느님은 우리에게 수수께끼만을 던져주고 있어. 아름다움 속에는 양 극단이 동시에 존재하고 온갖 모순이 함께 내포되어 있거든.”  -F. Dostoevskii-


친애하는 ensoph에게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그대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하네. 그대는 이렇게 말했다네. ‘아저씨, 저 아래 지구별 어딘가엔 푸르기도 하고 붉기도 한 초록의 빛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대요. 그 빛은 아름다움 그 자체래요. B612의 그 친구는 혹시 그곳으로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닐까요? 저도 언젠가 그 빛을 마주하고 싶어요. 언젠간 말이에요.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대가 지금 지구별에서 마주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그대가 온몸으로 느끼는 그 ‘시간’이란 무엇이며, 온몸을 휘감는 바람, 태양빛, 살갗에 잔잔히 퍼지는 안개, 땅에 떨어져 끊임없이 어딘가로 흘러가 버리는 빗물……. 이 모든 것은 그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한 가지를 말해두겠네. 지금 그대가 바라보고 느끼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네. 내가 그것을 어찌 알 수 있겠냐고 그대는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보았다네.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슬픔에 잠긴 나의 동료들을. 그리고 나는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네. 그대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나 역시 지구별로 파견된 적이 있었다네. 물론 그때와 지금의 지구별의 모습은 조금 다를 게야. 내게 ‘행동’을 청한 동료가 그대뿐이라고 생각하는가? 나 역시 파견되었을 당시 ‘행동’을 청했지. 그리고 많은 동료들이 ‘행동’을 청했다네. 하지만 청이 받아들여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네. 물론, 몇몇 동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였다네. 그 정도도 예상하지 않고 자네를 지구별로 파견했다고 생각하나? 이보게, 나는 많은 것을 겪었다네. 지구별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제 나는 늙을 대로 늙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했다고 말해도 무리는 아닐걸세. 다시 한 번 말해두겠네. 그대의 임무는 지구별을 관찰하는 것일세. 지금은 관찰의 목적을 찾을 때가 아니라네. 지금은 그저 관찰하기만 하게. 지금 그대에게 어떤 설명을 해준다 해도 그대는 이해할 수 없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내 말을 이해할지도 모르겠네. 그곳에 동요되어서는 안 되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살아 나갈걸세.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말일세. 그대의 작은 ‘행동’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말을 하는 것이 아닐세. ‘행동’은 그들의 몫일세. 그대의 몫이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나? 그대가 속한 곳은 이곳이라네. 그들이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들의 잘못이네. 물론 슬픔과 고통 앞에서 무관심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네. 그래. 나 역시 지구별의 슬픔과 고통 앞에서 좌절하고 신음하고 괴로워했지. 우리에게도 그들과 같은 ‘마음’이란 게 존재하니 당연한 일 아니겠나? 편지를 시작하며 물은 나의 질문을 잘 생각해보게. ‘그대가 지금 지구별에서 마주하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대는 지구의 시간을 아직 온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어. 그대가 바라본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 임무를 마치고 혹은 마치지 못하고 돌아온 많은 동료의 잘못은 바로 거기에 있다네. 그들은 전체를 볼 수 있는 용기가 없었던 거야. 혹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걸 수도 있지. 그건 매우 중요한 일이라네. 잘 들어두게. 그대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다시 지구별로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는가? 내 생각으로는 그럴 수 있는 확률은 매우 낮아. 거의 없다고 봐도 되네. 우리 행성의 그 누구도 두 번 지구별로 파견된 적은 없다네. 그렇다면 그대는 지금 어떻게 하겠나? 

                                                                                                                  R600으로부터.



친애하는 장관님께

 장관님의 편지에 거친 바람이 일던 제 마음에도 약간의 평화가 깃들었습니다. 하지만 연약한 평화가 얼마나 더 지속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전히 저의 어딘가에선 혼란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만약 ‘행동’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귀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장관님의 말씀에 따라 지구별에서의 ‘시간’을 조금 더 견뎌보려고 합니다. 고요한 마음은 제게 너무나 요원하기만 합니다. 지금도 저는 지구별의 슬픔과 고통만을 마주하고 있을 뿐입니다. 솟구치며 모든 걸 집어삼키는 화염 속에서 고요한 마음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장관님도 잘 아실 겁니다. 장관님께 마지막 보고서를 올리고 나서, 아니 그전부터 저는 방황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제 마음이 쉴 곳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제게 방황이란 새로운 것입니다. 고통을 마주하는 것 역시 새로운 것입니다. 슬픔의 박자에 맞춰 한숨을 쉬는 것 역시 새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엇을 어찌 해야 할 지 잘 몰랐습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습니다. 지구인들이 방황의 여정에서 걷는 걸음걸이를 저도 따라 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모방하는 것이었습니다. 장관님께선 지금 제가 저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으로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제 마음이 쉴 곳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외로웠습니다. 비로소 저는 B612의 ‘어린 왕자’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술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이 곤욕스러운 ‘시간’의 무게를 잊으려 들이켜는 술을 마시기로 했습니다. 지구별의 시간의 중력을 견딜 자신이 없었습니다. 어둠이 내리깔리면 지구인들이 잔뜩 모이는 번화가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을 군중 속에 녹이려고 했습니다. 어차피 그 누구도 저란 존재를 관심 어린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았지만 말이죠. 그리고 한 술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지구인들은 늘 그렇듯 음주에 열중하며 자신들의 일상과 고통을 피력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술을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조그마한 잔에 따라 한 모금 들이켜 보았습니다. 장관님께서도 지구인들의 술을 경험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입안 가득히 퍼지는 쌉싸름함이 곧 목구멍을 따라 뜨거운 불길로 변화했습니다. 저는 비어버린 잔을 놀란 눈으로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몇 잔을 연거푸 털어 넣었습니다.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롭고 신비로운 세계가 펼쳐졌습니다. 우선, ‘시간’의 중력이 모호해졌습니다. 정말이지 시간은 저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속도로 자신만의 궤도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다음으로 감각은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을 듯 요동치다가 곧 빠른 속도로 무뎌졌습니다. 제가 마주했던 슬픔으로 가득했던 이곳은 한순간 텅 비어버렸고, 저는 아무런 슬픔도 느끼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저는 마비되어 갔습니다. 그때, 제 옆자리에 세 명의 사내가 막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습니다. 나뭇잎이 수북한 나무에 날아든 참새와 같이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제 옆자리에 앉아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투명망토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앉아 지구인들과 같이 술을 마시며 취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뭔가에 흥분해 있었습니다. 저는 외로웠고 누군가의 이야기가 필요했다는 것을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뭐? 병신 삼룡이같은 새끼야. 그래서 그냥 그렇게 보냈다고? 미친……. 진짜 할 말이 없다. 몇 번을 얘기해야 알겠냐? 이 병신아.” 안경을 쓴 짧은 머리의 사내가 고개를 젖혀 술을 들이켜며 한숨 섞인 어투로 말했습니다.

“그럼, 뭐……. 어쩌라고. 걔가 날 좋아하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말했잖아. 걔가 저번에 과 선배 얘기 계속 했었다고…….” 줄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가 어수룩하게 대꾸했습니다. 

“야! 이 병신아. 그래도 그렇지. 아……. 나 이런 병신같은 새끼를 봤나! 그래도 그건 예의가 아니지.” 안경 낀 사내가 말을 낚아챘습니다. “야! 안 되겠다. 이 병신 새끼, 오늘 호강 좀 시켜줘야겠다.” 안경 낀 남자는 득의양양했습니다.

“뭐가……. 됐어. 그리고 걘 니가 생각하는 그런 애 아니야.” 줄무늬 셔츠의 남자는 멍하니 술잔을 응시하며 힘없이 대답했습니다.

“야! 현일아, 넌 어떻게 생각하냐? 이 병신이 아직도 이러고 있는 게.” 안경 낀 사내는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는 남자를 향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뭐……. 지가 알아서 하겠지.” 현일이란 남자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니네 둘 다 병신소릴 듣는거야. 이런 천하의 병신들. 야! 안 되겠다. 그냥 오늘은 내가 하자는대로 하자. 일단 빨리빨리들 마셔. 여기서 이러고 있는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고. 빨리 마셔! 진짜 아름다운게 뭔지 보여주겠어!” 안경 낀 남자는 나머지 두 남자를 향해 명령하듯 말했습니다. 

“탐해야 할 건 탐하는 게 맞아. ‘날 잡아 잡수세요.’하는데 왜 병신 머저리 같이 그냥 보내냐고! 이 병신 삼룡이 같은 새끼야!” 안경 낀 사내는 줄무늬 셔츠의 남자를 바라보며 빈정거렸습니다.

“야! 민수야, 이제 그만해라. 현호 쟤가 애도 아니고 지가 알아서 하겠지.” 현일이란 남자는 안경 낀 사내의 말이 거슬리는 듯 정색을 했습니다.

“뭐가 지가 알아서 해. 맨날 지가 알아서 한다는 게 이거야? 맨날 차이기만 하고. 아니, 차이기라도 하면 괜찮지. 병신같이 애들 얘기만 들어주다가 지가 할 말은 하나도 못하고. 야 그게 말이나 되냐고? 여자애가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했다며? 근데 그런 애를 그냥 달래서 보낸다는 게. 넌 그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된다고 생각하냐? 야! 너 고자냐? 이 병신아.” 안경 낀 사내는 현일이란 사내의 말에 더욱 흥분하였습니다. 그의 말은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알겠어. 내가 알아서 한다고. 야!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술이나 마시자.” 현호라 불린 줄무늬 셔츠의 남자는 힘 없이 눈을 내리깔고 술을 들이켰습니다.

“아니, 니가 뭘 알아서 하냐고. 자 현호야, 이 븅신아, 잘 들어 봐. 내가 몇 번을 말했지? 그냥 술을 먹여. 그리고 데리고 가. 그리고 그냥 눈 딱 감고 자면 되는 거여. 알겠어? 그럼 게임 끝이라니까.” 안경 낀 사내는 담배를 꼬나물며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야! 그건 강간이야. 그리고 얘가 무슨 발정 난 개도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너무하지.” 현일이란 남자는 여전히 정색하며 현호란 사내를 두둔해주었습니다.

“그럼, 뭐? 어쩌라고? 야! 너 이 새끼가 스물다섯이나 처먹고 아직도 여자랑 못해봤다는 게 말이 되냐?” 안경 낀 사내는 다시 흥분하며 소리쳤습니다.

“민수야. 난 그냥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줄무늬 셔츠의 현호란 사내는 안경 낀 사내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뭐? 지랄하네. 야! 그럼, 너 그 여자애 안 사랑해? 사랑하잖아. 근데 왜? 뭐가 그렇게 어려운데? 그냥 손잡고 부둥켜안고 입  맞추다 보면 다 끝나는 거라고. 너, 뭐 혹시 양심의 가책 같은 거, 그런 거 때문이냐? 아니 사랑하는 사람이랑 자는데 양심의 가책이고 나발이고. 엿이나 드세요.” 안경 낀 사내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며 말했습니다.

“야! 그 여자애가 아직 현호를 좋아하는지 어쩐지 모른다잖아.” 줄무늬 셔츠의 현일이란 남자는 안경 낀 사내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습니다.

“아니, 야! 걔가 오늘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며? 그게 무슨 말인데? 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너넨 대학까지 다니는 새끼들이 아직 그런 것도 모르냐? 대단히 논리적인 말이라고. ‘나 오늘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는 곧 ‘나 오늘 너랑 열라 자고 싶어요.’ 란 말이야 이 병신아. 알아? 야! 됐다. 내 입만 아프다. 병신 삼룡이 같은 새끼들하고는. 됐어 술이나 쳐 마셔!” 안경 낀 사내는 다시 고개를 젖혀 술을 들이켰습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셋은 아무 말 없이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채우며 비우며 음주를 하였습니다.

“야! 나가자. 이건 내가 낼 테니까. 됐지?” 짧을 듯 긴 침묵을 깬 건 역시나 안경 낀 남자였습니다.

“어, 어……, 딜 가려고?” 뚱뚱해진 혀를 바로 잡으려 노력하며 풀어진 눈으로 안경 낀 남자를 응시하려 노력하며 줄무늬 셔츠의 남자가 웅얼댔습니다.

“그건, 지금 니가 알 필요가 없지이……. 그냥 오늘은 나만 따라오면 돼! 알겠어? 이 병신 삼룡이같은 새끼들아.” 안경 낀 남자는 비꼬며 무시하듯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두 사내는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동의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얼마간 더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저는 취해있었습니다. 지구인들의 방식으로 저는 취해있었습니다. 

“야! 나가자!” 안경 낀 남자의 흐물거리는 목소리가 정적을 끊었습니다.

셋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비틀비틀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비틀거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날 밤 저는 그들을 쫓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바람 같은 마음으로 저는 그들을 쫓아갔습니다. 그들은 저란 존재를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취해있었고, 저 역시 취해 있었습니다. 셋은 가벼운 듯, 무거운 듯 발걸음을 옮기며 지하철역으로 향했습니다. 승강장에 서 비틀거리던 그들의 모습을 장관님께 그대로 보여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마치 그들은 박자를 무시하는 춤을 추고 있는 듯했습니다. 아니면 모든 박자가 뒤섞여 버린 그런 음악에 맞춰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아무도 그들을 보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비틀거렸습니다. 저도 그들처럼 비틀거렸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저는 그들을 계속해서 쫓았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없었습니다. 그저 조용히 자리에 앉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대담하게 그들 맞은 편에 앉아 가만히 그들 하나하나의 표정을 살폈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멍청한 양.’ 양은 상당히 멍청하다고 합니다. 눈도 나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치기가 없으면 금방 길을 잃는. 그들은 정말 아무런 말도 없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앉아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저는 맞은 편에 앉아 있는 한 남자와 눈을 마주했습니다. 그의 눈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모든 걸 포기한 걸까요. 알 길이 없습니다. 저도 취해 있었습니다. 보고서를 쓰고 있는 지금도 취해있는 것 같습니다. ‘방황의 길’, 그곳을 벗어날 방법은 없어 보였습니다. 어떤 역에 도착하자 그들은 일제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며 무거운 발을 이끌었습니다. 그들과 저는 좁고 긴 골목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엔 빨간 불이 잔뜩 켜져 있었습니다. 빨간 불 아래로는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오빠! 잠깐 놀다가!” 향수 내냄새를 지독하게 풍기며 요사스런 눈빛으로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여자는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저는 그 여인을 잠시 뚫어지라 바라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세 남자를 찾으려 했지만 이미 그들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없었습니다. 저는 알 수 없는 허탈감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저의 볼을 어루만졌습니다.

“오빠, 왜 그래? 무슨 힘든 일 있었어? 잠깐 들어왔다 가. 응?” 여인의 음성은 지구별 그 어떤 것보다 부드러웠습니다. 하지만 여인의 지독한 향수 냄새를 견디기는 어려웠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어 여인을 바라보았습니다. 믿을 수 없는 모습이 제 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그러니까 그 여인은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그 여인의 하나하나를 전부 묘사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제가 느낀 아름다움은 그러했습니다.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이, 저는 아름다움에 도취되었습니다. 지독한 향기의 여인의 보드라운 손이 저를 이끌었습니다. 장관님, 저는 정말 취해있었습니다. 술에 취했고, 향기에 취했고, 여인의 아름다움에 취했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외로움에 취해있었습니다. 이끌려 들어간 곳은 어두웠습니다. 저는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여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여인의 아름다움은 온데 간대 사라져버리고 없었습니다. 여인은 제게 돈을 내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지러움을 느꼈습니다. 저는 구토증을 느꼈고 그 어두운 집에서 뛰쳐나와 제 안의 모든 걸 게워냈습니다. 그리고 빠르게 도망쳤습니다. ‘아름다움’은 절 속였습니다. 그 날밤 저는 지구별 구석 어딘가에 쪼그려 앉아 한참을 울었습니다. 장관님, 언제쯤이면 저는 고요한 마음으로 지구별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ensoph 드림.


1-5

“순진함은 무지이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그것을 상실하는가?” -S. Kierkegaard-


친애하는 장관님께.

 지구별에는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 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잔잔하게 불어도, 세차게 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물을 통해 바람의 존재를 느낄 따름입니다. 혹은 살결에 부딪히는 그 순간을 느끼며 바람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바람은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윙- 웅-.’ 성난 괴수의 울부짖음과 같은 소리를 들을 때면 저도 모르게 겁에 질려버립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는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지구별에선 살아있는 모든 것이 움직입니다. 물론 움직이는 모든 것이 살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장관님께 바람에 대해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번 보고서가 바람에 의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처 없이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바람이 부는 것 같았습니다. 먼지를 잔뜩 품은 바람이 저를 한번 핥고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검은 비닐봉지는 제 앞에서 춤추듯 이리저리로 날고 있었습니다. 그 모양새가 하도 신기해 넋을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비닐봉지는 바람을 타고 길을 따라 비행했고, 저는 비닐봉지를 따라갔습니다. 저도 비닐봉지 마냥 바람에 실려 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봉지가 저를 인도한 곳은 동네의 작은 공원이었습니다. 정신없이 비닐봉지를 쫓느라 지친 저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습니다. 바람은 조금 잔잔해졌습니다. 며칠의 방황으로 피곤해 있던 저는 곧 벤치에 기대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담배 연기가 제 코를 자극했습니다. 저는 속이 울렁거려 그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눈을 떠 맞은 편을 바라보니, 한 사내가 멍청한 얼굴로 담배를 뻐금거리고 있었습니다. 지구별에 도착한 이후로 그렇게 멍청해 보이는 얼굴을 본 적은 없었습니다. 저는 사내의 모습을 천천히 살폈습니다. 앳되 보이는 얼굴 사이로 주름이 살짝 보였습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 멍청한 얼굴에는 아이 같은 순수함도 배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안한 얘기지만 순수함보단 멍청함이 더 두드러져 보였습니다.  

“아니, 젊은이! 공원에서 담배를 피우면 어떡해?” 중절모를 할아버지는 공원으로 들어오며 근엄한 목소리로 사내를 향해 말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사내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기가 눌려 허둥지둥 담배를 발로 비벼 껐습니다.

“그거, 그 꽁초 거기다 그냥 버리려고? 이 사람아, 자네가 버리고 가면 누구보고 치우라고 거기다 그냥 버리는 거야?” 할아버지는 사내가 발로 비벼 끈 담배꽁초를 가리켰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사내의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곧이어 사내는 담배꽁초를 손으로 집었습니다. 

“앗 뜨거!” 사내는 아직 채 꺼지지 않은 담배꽁초를 맨손으로 집었던 겁니다.

“원……. 그러게 왜 공원에서 담배를 피우고 그래…….” 미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조금 누그러졌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사내는 벤치에서 일어나 어중간한 자세로 할아버지를 향해 몇 번 고개를 숙였습니다.

할아버지는 공원 구석의 벤치에 가 앉았고, 사내는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벤치에 앉았습니다.

“야!” 공원 입구에서 머리를 짧게 자른 사내가 멍청한 얼굴의 사내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어? 어. 왔냐? 더럽게 늦게도 오네. 이발하는데 뭔 시간이 그렇게 걸려?”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짧은 머리의 사내를 나무라듯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내가 오늘 완전 죽이는 미용실 하나 발견했거든. 흐흐흐. 거기 여자애가 하나 있는데, 죽여. 아주 죽여. 어때, 내 머리? 죽이지 않냐? 그 여자애가 잘라줬는데. 흐흐흐.” 짧은 머리의 남자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뭐가 어떻긴 어때. 똑같구만. 얼마나 주고 잘랐는데?” 멍청한 얼굴의 남자가 물었습니다.

“응? 이만 오천 원.” 짧은 머리의 남자는 살짝 당황하며 대답했습니다.

“뭐? 이만 오천 원? 이게 아주 이제 완전 돌았구만. 그럴 돈 있으면 내 오만 원 이나 갚아.” 멍청한 얼굴의 남자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짧은 머리의 남자를 째려보았습니다.

“알겠어. 갚는다고. 다음 주에 아르바이트비 받는다니까. 그때 주면 되잖아. 내가 언제 안 갚는 거 봤어?” 짧은 머리의 남자는 멍청한 얼굴의 남자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습니다.

“그나저나, 왜? 왜 부르건대?” 짧은 머리의 남자가 물었습니다.

“그냥. 뭐 일이 있어야 부르냐?” 멍청한 얼굴의 남자는 건조한 말투로 대답했습니다.

“야! 근데 너 손에 그거 뭐냐? 담배꽁초를 왜 손에 꼭 쥐고 자빠졌냐?” 짧은 머리의 남자가 비아냥거리며 물었습니다.

“조용히 해! 그럴 일이 좀 있어.” 멍청한 얼굴의 남자는 할아버지가 앉아있는 벤치 쪽을 힐끗 보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습니다. 

“왜? 뭔일 있어?” 짧은 머리의 남자도 목소리를 낮춰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나저나 뭐 재밌는 일 없냐? 왜 이렇게 사는 게 재미없냐?”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재밌는 거? 재밌는 거야 많지. 왜? 쏠리냐? 갑자기 재밌는 거는 찾고 지랄이래?” 짧은 머리의 사내는 멍청한 얼굴의 사내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음흉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습니다.

“쏠리긴……. 병신. 니 대가리 속엔 그거 밖에 안 들어있지. 아주. 변태 같은 새끼. 그런 거 말고 뭐 진짜 화끈한 거, 그런 거 없을까? 이제 담배도 물린다.”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짧은 머리의 사내의 머리를 손으로 밀며 말했습니다.

“그치. 담배도 물리긴 한다. 끊고 싶어도 못 끊겠고…….” 짧은 머리의 사내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며 대답했습니다.

“야! 좀 이따 피워.”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습니다.

“왜? 병신아.” 짧은 머리의 사내가 반문했습니다.

“아, 글쎄 좀 이따가 피워.”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정면을 응시하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습니다.

“원……. 야! 그나저나 들어봤어?” 짧은 머리의 사내는 담뱃갑을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으며 물었습니다.

“아……. 어. 들어는 봤지.”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뭐? 들어는 봤다고? 야! 디지 길레스피의 그 명곡을 듣고, 그냥 들어는 봤다고? 허! 이 새끼 봐라.” 짧은 머리의 사내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멍청한 얼굴의 사내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래. 들어는 봤지. 근데, 난 뭐 그냥 그렇던데? 재즈가 뭐 거기서 거기지. 재즈는 다 사기야. 내가 그랬잖아. 즉흥적인 것처럼 포장해놓고는, 실제로 즉흥성은 하나도 없다니까. 재즈는 해석의 매너리즘이라고. 그 누가 그랬더라? 아 그러니까, 그게……. 그래! 아도르노. 내가 너 그 책 한 번 읽어보라고 했잖아. 안 읽었지?”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눈을 흘기며 짧은 머리의 사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넌 그 작자의 책이나 읽고 네 의견 따위는 없다는 얘기잖아. 너 재즈공연 실제로 본 적도 없지? 그런데 뭘, 재즈가 이러니저러니. 야! 됐어. 너 같은 새끼하고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다. 디지 길레스피, 오스카 피터슨, 찰스 밍거스, 찰리 파커……. 넌 이 새끼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인간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나 그러냐? 됐어! 입만 아프다. 야! 나도 그 브루크너 교향곡 듣다가 꺼버렸어. 됐냐? 열라 지루해.” 짧은 머리의 사내는 조금 화가 난 듯했습니다.

“……. 그럼 말아라. 니 손해지 뭐.”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조용히 대꾸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야. 나 갈란다.” 갑자기 짧은 머리의 사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왜? 삐쳤어? 아, 왜 그래? 미안하다고.”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짧은 머리의 사내를 올려다보며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습니다.

“내가 그랬지? 난 너 같은 새끼들이 제일 싫다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유명한 사람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듣고 지가 생각하는 건 하나도 없고……. 너 같은 새끼들이 제일 싫어.” 짧은 머리의 사내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미안하다니까. 알았으니까 앉아봐.”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달래듯 말했습니다. 

“병신 새끼…….” 짧은 머리의 사내는 욕을 내뱉으며 못 이긴 척 다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야, 내가 아까 담배도 물린다고 했잖아. 그래서 말인데, 어디서 떨 같은 거 구할 수 없을까?”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다시 목소리를 낮췄습니다.

“뭐? 떨? 그게 뭔데?” 짧은 머리의 사내가 물었습니다.

“떨? 떨 몰라? 아……. 이 새끼, 넌 뭐냐? 야! 너 떨 몰라? 하긴 모를 수도 있지. 대마초 말야. 하긴 니가 알 리가 있겠냐? 촌놈의 새끼 같으니라고. 한국에서 벗어난 적도 없는……. 에휴. 떨도 모르냐?”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짧은 머리의 사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럼, 넌? 지도 외국 가본 적 없으면서, 지랄은……. 근데 여기가 네덜란드야? 대마초는 뭔 대마초 타령이야. 이 새끼가 감방  가고 싶어서 아주 환장을 했구만.” 짧은 머리의 사내는 지지 않고 응수했습니다.

“그러니까, 왜 이 빌어먹을 나라는 대마초 같은 걸 합법화하지 않는 거냐고. 그게 누굴 해치는 것도 아닌데. 지들이 뭔데 법으로 금지를 하고 지랄이래?”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약간 화가 나 보였습니다.

“야 야. 담뱃값이나 안 올리면 다행이야. 이 새끼들 또 담뱃값 올린다고 지랄이잖아. 아 그나저나 빨리 담뱃값 오르기 전에 사놔야 하는데. 이런 쌍! 왜 담뱃값은 올린다고 지랄들이야. 또 짜증 나네.” 짧은 머리의 사내도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야, 너 근데 대마초 한번 해보고 싶지 않냐?” 멍청한 얼굴의 사내의 눈빛이 처음으로 반짝였습니다.

“뭐래? 이 새끼, 니가 아주 정신이 나갔구나?” 짧은 머리의 사내는 살짝 놀란 것 같았습니다.

“아니, 내가 갖고 있다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좀 들어봐. 나도 아직 한 번도 해본 적은 없는데, 담배도 물리고, 사는 것도 지루하고 해서. 그러니까 나 군대에 있을 때, 왜 내가 몇 번 얘기했잖아. 미국에서 유학하고 온 후임병 새끼 하나 있었다고. 그 새끼한테 전역하기 전에 물어봤거든. 떨 해본 적 있냐고. 근데, 그 새끼가 나한테 해보고 싶냐고 그러더라고. 나야 뭐, 해보고 싶다고 했지. 그랬더니 그 새끼가 하는 말이 어차피 한국에선 하기 힘드니까 지가 죽이는 거 알려주겠다고 하더라고.” 멍청한 얼굴의 사내의 입가엔 야릇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습니다.

“뭔데?” 짧은 머리의 사내도 조금씩 관심을 보이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새끼 말이 설탕을 졸라게 곱게 빻아서 코로, 아! 왜 영화에서 보면 미국 새끼들 코로 마시는 그 흰 거 있잖아.  아무튼, 그렇게 해서 코로 마시면 대마초 한 거랑 거의 비슷한 기분이 든대. 지도 돈 없을 때 친구들이랑 해 봤다고 하더라고.”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어느새 진지해져 있었습니다.

“그걸 믿냐? 병신. 그거 너 엿먹이려고 그런 거 아냐? 야! 너 같은 새대가리한테 생각하라고 하는 내가 한심하긴 한데, 생각을 해봐, 이 병신아. 만약에 그게 진짜였으면, 벌써 인터넷에 떠서 개나 소나 다 설탕 빨고 있었겠지. 이 답답한 새끼야. 그러니까 너 지금 그것 때문에 나 부른 거냐? 하아, 내가 진짜 할 말이 없다. 이 새끼 완전히 똘아이 아니야?” 짧은 머리의 사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야!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잖아. 아니면 그만 아니야? 죄짓는 것도 아니고, 감방 갈 일도 없잖아. 설탕이라고. 그냥 설탕을 곱게 빻기만 하면 된다잖아. 졸라 간단하잖아. 그치, 그치?”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짧은 머리의 사내의 어깨에 손을 얹고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그냥, 그냥 차라리 클럽에 가서 여자애들이나 꼬시세요. 그게 졸라 더 건설적이야. 찌질하게 설탕이나 빨고 있는 것보단 훨씬 낫다.” 짧은 머리의 사내는 완고하게 말했습니다.

“야! 그러지 말고 한 번 해보자. 응? 너네 집에 지금 부모님도 안 계시잖아. 응? 가자!” 확고한 건 멍청한 얼굴의 사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싫어.” 짧은 머리의 사내는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야! 너 진짜! 그럼, 씨발! 알았어. 오만 원 안 갚아도 돼. 됐지?”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작은 두 눈을 치켜세우며 회심의 미소를 띠었습니다.

“뭐? 아……. 쌍 노무 새끼. 진짜지? 오만 원 안 갚아도 되는 거다? 그럼 엄창 찍어.” 짧은 머리의 사내는 누그러진 듯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엄창은 무슨……. 니가 무슨 초딩이냐? 초딩들도 요샌 그런 거 안 해. 알겠다고. 안 갚아도 된다잖아. 빨리 가기나 하자!” 멍청한 얼굴의 청년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며 손에 쥐고 있던 담배꽁초를 바닥에 내던졌습니다.

“이봐! 젊은이. 그걸 또 바닥에 버리면 어떡해?” 구석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는 두 사내를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꽁초를 주우며 얼굴을 붉혔습니다.

“뭐야. 이 새끼 그래서 그랬구만. 병신. 흐흐흐” 짧은 머리의 사내는 고개를 돌려 키득댔습니다.

저는 그들을 따라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우둔하기도 했지만, 저도 곱게 빻은 설탕이 그들을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앞서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은 조금 우스웠지만, 한편으론 그들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들처럼 멍청한 대화를 나눌 친구도 없습니다.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자꾸 짧은 머리의 사내에게 어깨동무하려 했고, 그럴 때마다 짧은 머리의 사내는 멍청한 얼굴의 사내의 팔을 뿌리쳤습니다. 그들은 옥신각신하며 길을 걸었고, 저는 투명망토를 걸치고 그들을 따라 짧은 머리의 사내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너네 집에 깨 빻는 그거 뭐야, 그거 없어?” 멍청한 사내는 짜증을 살짝 짜증을 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 너네 집에는 있냐?” 짧은 머리의 사내도 지지 않고 응수했습니다.

“됐어. 그냥 설탕이랑 숟가락이나 가져와 봐!”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자! 근데 그냥 너만 해라. 나는 안 하련다.” 짧은 머리의 사내는 설탕 봉지와 숟가락을 내주며 말했습니다.

“그래? 그럼 오만 원 갚으면 되겠네.”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얄궂은 미소를 띠며 말했습니다.

“알겠어. 이 개새끼. 알겠어. 빨리 빻기나 해.” 짧은 머리의 사내는 멍청한 얼굴의 사내 옆에 다가와 말했습니다.

“ 자! 갑니다. 가자고. 레츠 고라고! 오늘 아주 뿅 가는거야. 흐흐흐”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잔뜩 흥분해 숟가락으로 설탕을 빻기 시작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열라 곱잖아. 그치? 안 그래?”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짧은 머리의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몰라, 그냥 대충해.” 짧은 머리의 사내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다 된 거 같아. 그치? 야, 잠깐! 너 버스카드 있지? 줘봐.”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버스카드는 또 왜? 아 이 새끼 그냥 대충하면 되지…….” 짧은 머리의 사내는 짜증을 냈습니다.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너 영화 봤지? 영화 보면 다 카드로 쓱- 긁어서 하잖아. 줘봐!”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의미심장하게 말했습니다.

“자! 이렇게, 여기는 내 거. 자! 이렇게, 여기는 니 거.” 멍청한 얼굴의 사내의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습니다.

“자! 하나둘 셋 하면 동시에 빠는 거야. 야, 나 뿅 가서 이상한 짓 해도 쫄지마. 처음엔 원래 다 그런 거래. 쭉 빨아. 알겠지?” 멍청한 얼굴의 사내는 흥분했습니다.

“알겠다고. 빨리하기나 해.” 짧은 머리의 사내도 벌써 탁자에 코를 들이박았습니다.

“자! 간다. 하나! 둘! 셋! 빨아!!!” 둘이 탁자에 코를 박은 모습은 가관이 아니었습니다.

“…….”

“아!!! 아!!! 아!!! 아 이 개새끼! 아!!!”  둘은 코를 부여잡고 뒹굴었습니다.

“물! 물! 물 좀 줘봐. 빨리. 이 새끼야.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 아!!!” 이 멍청한 두 명의 사내는 빨개진 코를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장관님. 호기심은 모든 멍청한 짓의 시작이 아닐까요? 아무튼, 저는 그날 투명망토를 걸치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장관님께서도 실컷 웃으셨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ensoph 드림.



1-6 

“잠잠해라, 마음이여,

 참아라, 진정해라, 침묵해라!”       -F. Dostoevskii-



“아빠! 이건 뭐야?” 아이가 물었습니다.

“음. 이건 라이터라는 거야.” 남자는 아이를 바라보며 대답했습니다.

“왜?” 아이는 다시 물었습니다.

“응? 왜? 음……. 이건 그러니까, 이건 라이터니까 라이터지.” 남자는 침착하게 대답했습니다.

“응. 근데 왜 라이터니까 라이터야?” 아이는 다시 물었습니다.

“글쎄. 사람들이 다 그렇게 부르니까 아빠도 그렇게 부르는 거야. 그러니까 이 라이터란 건 말이야. 불을 붙이기 위해서 있는 거야.” 남자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며 말했습니다.

“아. 근데 왜 불을 붙이는데?” 아이는 다시 물었습니다.

“아빠가 어떻게 설명을 해주면 좋을까? 음……. 그러니까 아빠가 라이터를 가지고 다니는 건 말이야.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야. 자! 봐. 이렇게……. 담배에 불을 붙이면 담배를 피울 수 있잖아. 라이터는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있는 거야. 알겠지?”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아이에게 대답했습니다.

“아빠! 근데 왜 아빠는 담배를 피워?” 아이는 다시 물었습니다.

“응. 아빠는 담배가 좋거든.” 남자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대답했습니다.

“근데 엄마는 아빠가 담배 피우는 거 싫어하잖아.” 아이는 말했습니다.

“응……. 그건 사람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달라서 그런 거야.” 남자는 담배를 비벼끄며 말했습니다.

“아빠! 근데 왜 엄마는 담배를 싫어해?” 아이는 물었습니다.

“응. 그건 아마도……. 엄마는 아빠가 담배를 피우면 건강이 나빠진다고 생각해서일 거야.” 남자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건강이 나빠진다고? 아빠! 그럼 담배 피우지 마. 나도 아빠가 아픈 거 싫어.” 아이의 얼굴은 어두웠습니다.

“그래. 그래. 아빠가 담배 안 피울게. 걱정 마.” 남자는 대답했습니다.

“근데, 아빠. 왜 엄마는 아빠한테 소리를 질러?” 아이가 물었습니다.

“음……. 글쎄. 어른들은 가끔 소리를 지를 때도 있는 거야. 그래서 그럴 거야.” 남자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엄마가 소리 지르면 무서워.” 아이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글썽거렸습니다.

“응. 엄마한테 그러지 말라고 얘기할게.” 남자는 말했습니다.

“아빠! 근데 왜 아빠는 맨날 술 마셔?” 아이는 물었습니다.

“글쎄……. 아빠는 술이 좋아.” 남자의 귀가 불게 물들었습니다.

“근데, 왜 아빠랑 엄마는 좋아하는 게 달라?” 아이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글쎄. 예전엔 안 그랬는데,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어.” 남자는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대답했습니다.

“난 아빠랑 엄마랑 좋아하는 게 같았으면 좋겠는데……. 그럼 엄마가 아빠한테 소리도 안 지를 텐데. 그치?” 아이는 힘 없이 중얼거렸습니다.

“응. 아빠가 좋아하는 걸 엄마도 좋아하면 참 좋을 텐데. 그치? 아빠가 엄마한테 한번 말해볼게.” 남자도 힘없이 말했습니다.

“아빠, 근데 왜 술이 좋아? 맛있어?” 아이는 물었습니다.

“글쎄……. 우리 지원이도 크면 알 거야.” 남자는 말했습니다.

“아빠. 난 술 안 마실 거야.” 아이가 남자를 올려다보며 말했습니다.

“응? 왜? 아빠가 술 마시는 게 우리 지원이도 싫어?” 남자가 물었습니다.

“응. 아빠한테 술 냄새나잖아.” 아이는 작은 손으로 코를 막으며 말했습니다.

“그래. 그럼 아빠가 술 안 마실게.” 남자는 말했습니다.

“진짜? 그럼 나랑 약속해.” 아이는 활짝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래. 약속!” 남자는 웃었습니다.

“근데, 우리 지원이는 나중에 커서 뭐 할 거야?” 남자는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몰라…….” 아이는 남자를 바라보며 대답했습니다.

“왜? 우리 지원이는 하고 싶은 게 없어?” 남자는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아니. 하고 싶은 거 있는데……. 말 안 할래.”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왜? 아빠는 듣고 싶은데……. 아빠한테 말해주면 안 돼?” 남자는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그럼……. 아빠……. 웃으면 안 돼. 애들은 막 웃었단 말야. 애들이 막 놀렸단 말야.”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약속! 아빠는 절대 안 웃을게. 정말!” 남자는 말했습니다.

“진짜지?” 아이는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응 절대 안 웃을게.” 남자는 말했습니다.

“난……. 아빠. 난 나중에 어른이 되면 날거야.” 아이는 두려움과 기쁨의 표정을 동시에 지으며 말했습니다.

“응? 날고 싶다고?” 남자는 당황한 듯 물었습니다.

“응. 아빠. 난 커서 이따-시 만큼 큰 날개로 날거야. 진짜야. 나중에 크면 여기 뒤에 이만한 날개가 생길 거야.” 아이의 얼굴에 환희의 빛이 비쳤습니다.

“그렇구나. 근데, 우리 지원이는 왜 날고 싶은데?” 남자는 조용히 물었습니다.

“아니, 아빠. 날고 싶은 게 아니라. 날 거라고. 아이 참. 아빠는 내 얘길 잘 들어야지.” 아이는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빠는 잘 모르겠는데?” 남자는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아빠. 여기 뒤에서 날개가 자라고 있다니까. 아직은 잘 안 보이는데……. 아빠도 못 믿는구나?” 아이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습니다.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래? 우리 지원이 등에서 날개가 자라고 있구나. 아빠는 몰랐네. 근데 그 날개, 아빠한테 보여줄 수 있어?” 남자는 침착하게 물었습니다.

“안돼! 아직은 안돼! 나중에 좀 더 자라면 보여줄 거야. 아직은 안 보여. 아빠도 애들처럼 웃을 거지?” 아이는 살짝 몸을 뒤로 뺐습니다.

“지원아. 아빠가 왜 웃어. 아빠는 지원이 얘긴 다 믿는데……. 정말이야. 아빠도 좀 보여주면 안 돼? 그럼 아빠도 보여줄게. 혹시 아빠도 날개가 자라고 있을지 모르잖아.” 남자는 달래 듯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응? 아빠도 날개가 자란다고? 아니야. 아빠는 이미 어른이잖아. 말도 안 돼. 거짓말!” 아이는 남자를 쏘아 보았습니다.

“아니, 왜? 혹시 아빠 등에서도 날개가 자라고 있을지 모르잖아. 지원이만 날개가 있으란 법은 없잖아. 아빠도 지원이랑 같이 날고 싶은데……. 아빠 등에도 날개가 자랐으면 좋겠다.” 남자는 빙그레 웃었습니다.

“아빠는 날개가 없어. 아빠는 맨날 술만 마시니까. 날개가 안 자랄걸?” 아이는 슬픈 눈으로 말했습니다.

“그럼, 이제 아빠도 술 안 마실 거니까 자랄 수도 있겠네.” 남자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글쎄……. 나도 모르겠어.” 아이는 새침하게 말했습니다.

“아빠도 어렸을 때 말이야. 날고 싶었는데……. 막 하늘을 훨훨 나고 싶었는데. 그러네. 아빠 뒤에서는 날개가 안 자랐네. 아빠도 지원이처럼 뒤에서 날개가 자랐으면 지금쯤 하늘을 훨훨 날아 다녔을 텐데……. 아빠 등에서는 왜 날개가 안 자랐을까?” 남자의 얼굴에 슬픔의 빛이 살짝 엿보였습니다.

“정말? 아빠도 나처럼 하늘을 날 거라고 생각했어? 정말이야? 와!” 아이는 남자의 말에 신기해했습니다.

“응. 그랬었던 거 같아. 아빠도 저기 높이 올라가서 막 날고 싶었거든. 우리 지원이, 아빠 딸이라고 아빠랑 통하는 게 있네?” 남자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빠. 근데 내가 진짜 비밀 하나 말해줄까?” 아이는 목소리를 낮췄습니다.

“뭔데?” 남자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었습니다.

“음……. 아니야. 아직 안 돼. 아직 아빠는 몰라도 돼.” 아이는 몸을 뒤로 젖히며 말했습니다.

“응? 우리 지원이 이러기야? 아빠 섭섭하네.” 남자는 실망한 듯 말했습니다.

“섭섭한 게 뭔데?” 아이는 물었습니다.

“음……. 그러니까 아빠는 지원이가 아빠한테 다 얘기해 줬으면 좋겠는데, 지원이가 얘길 안 해주니까 조금 슬프네.” 남자는 차근차근 아이에게 설명했습니다.

“나는 맨날 아빠한테 섭섭한데……. 피-.” 아이는 다시 입을 쭉 내밀었습니다.

“지원이는 뭐가 섭섭했는데?” 남자는 몸을 곧추세우며 물었습니다.

“몰라. 아빠는 맨날 술만 마시고……. 나랑은 놀아 주지도 않고. 얘기도 안 하고. 엄마랑 맨날 싸우기만 하고.” 아이는 투덜거렸습니다.

“……. 지원아, ……. 아빠랑 엄마랑 싸우면 우리 지원이가 많이 슬프구나?” 남자는 힘겹게 입을 뗐습니다.

“응…….” 아이는 힘없이 눈을 내리깔았습니다.

“근데, 어른이 되면 가끔씩은 좋아하는 게 달라서 싸우기도 하고, 원하는 게 달라서 싸우기도 하는 거야. 싸우는 게 꼭 나쁜 건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 지원이.” 남자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그래도 난 아빠랑 엄마랑 좋아하는 게 같았으면 좋겠는데……. 난 커서 어른은 안 될 거야. 절대로.” 아이는 말했습니다.

“지원아. 아빠랑 이번 주 토요일에 동물원 갈까? 우리 지원이 동물원 한 번도 안 가봤지? 거기 사자도 있고, 곰도 있고, 기린도 있고……. 왜? 싫어? 우리 지원이 저번에 아빠한테 동물원 가자고 했잖아.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응?” 남자는 신이 난 듯 말했습니다.

“엄마는?” 아이는 시무룩했습니다.

“엄마? 엄마는……. 엄마도 같이 가면 좋은데, 엄마는 토요일에도 일하잖아.” 남자는 약간 기운이 빠진 듯 조용히 말했습니다.

“엄마도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엄마도 동물원에 가고 싶다고 했단 말이야.” 아이는 남자를 바라보며 애원하듯 말했습니다.

“그럼 아빠가 한 번 엄마한테 말해볼게.” 남자는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켰습니다.

“근데, 아빠. 불행하다는 게 무슨 뜻이야?” 아이는 물었습니다.

“응? 불행? 우리 지원이 그 말 어디서 들었어?” 남자는 놀라 물었습니다.

“어제 엄마가 전화하면서 아빠랑 살아서 불행하다고 그랬어.” 아이는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엄마가?” 남자의 얼굴은 일그러졌습니다. 그리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아빠. 근데 외로운 건 뭐야?” 아이는 다시 물었습니다.

“왜? 엄마가 외롭다고 그랬어?” 남자의 낯빛은 더욱 어두워졌습니다.

“아니, 그건 아빠가 그랬잖아. 저번에 엄마랑 싸울 때…….” 아이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아빠가 그랬어? 아빠가 그랬구나. 몰랐네. 아니야. 아빠는 외롭지 않아. 우리 지원이가 있는데 아빠가 왜 외로워…….” 남자는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근데, 외로운 게 뭔데?” 아이는 다시 물었습니다.

“외로운 건……. 지원아. 아빠도 잘 모르겠네. 아빠도 잘 모르면서 하는 말이 많거든. 앞으로는 아빠도 잘 모르는 말은 안 할게.” 남자는 아이를 바라보며 다짐하듯 말했습니다.

“아빠……. 우리 그냥 다음에 엄마랑 같이 동물원 가! 엄마 이번 주에 못 갈 거야. 엄마 출장 간다고 그랬잖아. 엄마 출장 가면 맨날 자고 오는데……. 아빠 우리 다음에 엄마랑 같이 가.” 아이는 슬픈 눈으로 말했습니다.

“그래. 지원아. 다음에 엄마랑 꼭 같이 가. 자! 약속하자. 오늘 아빠가 엄마한테도 꼭 약속받아놓을게.” 남자는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아빠, 근데 나 어쩌면 커서 고래가 될지도 몰라.” 아이는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습니다.

“고래? 우리 지원이 날개가 생기면 고래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 남자는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었습니다.

“아, 아빠는 모르는구나. 아빠는 한 번도 날개 달린 고래를 본 적이 없구나. 아빠, 난 날개 달린 고래가 될지도 몰라. 얼마 전에 꿈에서 고래가 나를 등에 업고 막 이렇게 헤엄치다가 갑자기 날개를 펼쳐서 하늘을 날았는데. 헤에-. 고래가 나한테 막 뭐라고 말도 했는데……. 기억은 안 나.” 아이는 해맑게 웃었습니다.

“이지원 보호자분! 인제 그만 들어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날씨가 쌀쌀해져서 지원이가 감기에 걸릴 수도 있어요. 그리고 제가 몇 번 말씀드렸잖아요. 병원 내에서는 금주 금연이라고요. 특히 지원이한테 담배 연기는 안 좋은데……. 지원아! 아빠랑 재밌었어?” 간호복을 입은 나이가 지긋한 여자가 남자를 나무랐습니다.

“아, 예……. 죄송합니다. 지원아, 이제 들어갈까? 우리 지원이 춥지? 들어가자…….” 남자는 아이를 번쩍 안았습니다.

“아빠……. 이제 가려구? 나 할머니랑 있는 거보다 아빠랑 있는 게 더 좋은데……. 아빠, 가지마…….” 아이는 이내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원아…….” 남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었습니다.


친애하는 장관님께.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아이들의 아픔은 제 가슴을 후벼 팝니다. 누군가 제 가슴을 날카로운 칼로 수십 번, 수백 번 난도질하는 것만 같습니다. 어리석게도 저는 왜 병원이라는 곳을 찾아간 걸까요. 왜 그 아이와 남자 옆에 앉아 버린 걸까요. 더는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것을 왜 멍청하게 찾아버린 걸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이곳을 찾아오게 된 건지, 왜 장관님께 이 보고서를 올리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먹먹합니다. 아이의 슬픈 얼굴과 웃는 얼굴이 교차되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단지 아이의 날개가 충분히 자랄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장관님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켜볼 뿐입니다.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것뿐이겠지요.

                                                                                                              ensoph 드림.





1-7

“누가 되었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습니다.” -Goethe-


친애하는 장관님께.

‘시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고향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지다가도, 금세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를 배회하며 군중 속에 섞여 들어가 지구인들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안식을 얻기도 합니다. ‘시간’에 대한 생각을하며 지내는 시간도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어느새 지구별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저는 알 수 없는 기분에 빠져 괴로워하기도, 멍해지기도 합니다. 제가 있는 이곳은 과연 어딜까요. 그리고 제가 있었던 그곳은 어디였던가요. 제가 속해있는 곳은 어디이며, 저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있는 걸까요? 어떠한 의심도 저를 건드리지 못했던 순간을 명확하게 기억하는 만큼 지금의 이 불확실과 의심은 저를 쿡쿡 찔러댑니다. 언제쯤이면 모든 것이 명확해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지구별에 머무는 시간 동안은 단 한 순간도 마음의 확신을 갖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장관님, 요즘 저는 의도적으로 재미있고 유쾌한 일을 좇고 있습니다. 고개만 돌리면 슬픔과 괴로움을 볼 수 있는 곳인 지구별에서 즐거움과 재미를 찾는 일은 실로 고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구별에 도착하여 배가 찢어지라 웃어본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던 두 어리석은 사내의 일을 제외하고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어리석은 지구인을 좇는 것이 제 마음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어리석음에도 여러 종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내의 그것은 유쾌함을 동반하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들의 무지는 귀엽고 발랄한 것입니다. 반면 한숨과 슬픔을 동반하는 어리석음도 존재합니다. 대부분의 어리석음은 후자에 속합니다. 이들의 무지는 여름철 옥탑방에 놓인 생선과 같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이 썩어가는 생선에 비유되길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리석음 속에 빠져들어 허우적대며 도저히 탈출할 길을 찾지 못합니다. 제가 짧은 시간 관찰한 지구인의 어리석음은 이러했습니다. 장관님께선 제가 두 사내의 이야기를 보고서로 올린 것을 읽으시고 조금 의아해하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는 저의 의도를 충분히 읽으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럼 넋두리는 잠시 접어두고 보고서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지구인들이 ‘어린 왕자’에 대해 관심이 있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지나가는 아무 지구인이나 붙잡고 ‘어린 왕자’를 알고 있냐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싶었습니다. 우리 별의 누구라도 지구별에 파견된다면 저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아직 제게는 지구인과 대화를 나눌 용기가 없습니다. 물론 장관님께서 지구인과의 대화를 완전히 금지하신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당부 말씀 중에 지구인과의 대화를 신중히 하라고 하셨던 장관님의 말씀이 아직도 제게는 두려움으로 남아있는 건 사실입니다. 게다가 장관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그렇게 활발한 성격이 아니지 않습니까. 친구의 부재에 괴로워하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저의 성격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그냥 책방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아직도 지구인들이 문제 작가의 책을 사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처음으로 큰 책방에 가보았습니다. 수많은 ‘어린 왕자’가 있었습니다. 몇 시간을 그 앞에 서서 어슬렁거렸지만 아무도 ‘어린 왕자’에겐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구인이 좋아하는 건 그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지구인이 좋아하는 건 단지 ‘어린왕자’의 맬랑콜리한 겉모습일 뿐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큰 책방을 나와 다른 책방으로 향했습니다. 그 책방의 상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몇 군데의 책방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발견한 헌책들로 가득 찬 작은 책방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책방 안은 담배 연기로 자욱했습니다. 빼곡하게 쌓인 책들은 모두 오래된 것들이었습니다. 담배 연기 냄새와 오래된 책의 향기가 어우러진 그 작은 책방에서 저는 이상한 아늑함을 느끼며 제가 ‘어린왕자’의 흔적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한 번 혹은 몇 번씩 주인을 만났다가 헤어져 이곳까지 흘러들어 두서없이 꽂혀있는 색 바랜 책들은 그 작은 공간을 침묵과 ‘시간’의 향기로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마 지구별에서 처음으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느낀 공간이었을 겁니다. 안쪽 구석에서는 ‘시간’을 지그시 머금고 있는 몇 개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투명망토를 착용하고 ‘시간’의 음성이 들려오는 구석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자네 생각엔 레버퀸이 누구인 거 같은데?” 백발이 듬성듬성 난 남자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나? 내가 토마스 만의 의도를 어찌 알겠나?” 초라하지만 깔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는 손수건으로 다 벗겨져 버린 머리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말해주지. 사람들은 말이야. 레버퀸이 베토벤이라고들 하지. 근데 내가 보기엔 니체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 분명해.” 백발을 뒤로 넘기며 자신 있게 말하는 이 남자는 책방의 주인 같았습니다.

“그래? 그럼 뭐 그런 거 아니겠나?” 대머리 남자는 이야기가 지루한 듯 대충 대답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나저나, 이번에 우리 엘지가 가을 야구를 할 수 있겠지?” 책방주인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습니다.

“음. 이대로만 가주면 가능할 수도 있지.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조금 더 근성 있는 플레이를 한다면 충분히 가능해.” 대머리 남자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래. 그나저나 내가 준 책은 읽어 봤나?” 책방 주인은 다시 주제를 책 쪽으로 가져갔습니다.

“자네가 준 책이 한두 권이야 말이지. 사실 이제 독서란 게 의미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어. 인생의 뒤안길에 들어서니 젊을 때 가졌던 열정이 사그라지는구먼.” 대머리 사내는 연신 머리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말했습니다.

“이봐! 인간의 가슴은 언제나 결핍된 상태란 말이야. 그대가 그 결핍을 무시하는 순간 그대의 진정한 삶은 끝이 나는 거야. 나이가 들수록 우리에겐 책임이 있는 거야. 결핍된 가슴을 뜨거운 정열로 채워야 하는 책임. 무슨 말인지 알겠나? 열정이 사라진 삶은 이미 죽은 삶이나 마찬가진 게야. 젊었을 때의 피 끓는 열정은 다듬어지고 또 다듬어져야만 해. 그리고 우리 나이가 되면 젊을 때의 열정과는 다른 열정으로 가슴을 채워야 해. 내가 자네에게 책을 주는 이유가 뭐겠나? 이제 와서 지식을 채우라고 그런건줄 아나? 아니야. 그대의 가슴 속에 잠자고 있는 그 열정을 깨우라는 그러는 거야. 결핍된 가슴이라고. 알겠어? 그대의 가슴이 이미 채워졌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류지. 말했잖아. 자신의 마음에 이르는 길은 죽는 그 순간까지 한없이 요원한 거라고.” 책방주인의 두 눈에선 여전히 빛이 번쩍였다.

“그래. 그래 알겠어. 근데, 그 책 말이야. 나한테는 어렵더구만.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그쪽으로는 워낙 문외한이라서 말이지. 사실 믿음이란 게 없는 인간에게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니, 신앙의 본질이 어쩌니 하는 건 다 소용없는 일 아니겠나?” 대머리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책방주인의 두 눈을 피했습니다.

“그래. 알지. 알아. 하지만 생각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지 않나? 그대가 아무리 신앙이 없다고 해도, 종교가 없다고 해도,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문제이지 않냔 말이지, 내 말은.” 책방주인은 대머리 사내를 쉽게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 집요하게 말했습니다.

“그래. 자네 말도 일리는 있어. 나는 종교라는 걸 부정하는 사람이야. 더구나 그리스도교는 더욱 그렇다네. 아니, 이보게. 내가 몇 번을 반복해서 말해도 아직 못 알아듣겠나? 나는 예수의 죽음이 내 삶과 어떠한 연관도 없다고 생각하네.” 대머리 사내의 두 눈도 어느새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과 부활이지.” 책방 주인이 빠르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그래. 좋아. 죽음과 부활. 그 죽음과 부활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단 말인가? 세상을 좀 둘러보라고. 예수가 죽은 뒤, 그래. 죽고 부활하고 이미 이천 년도 넘는 시간이 흐르지 않았느냔 말이야. 근데 뭐가 바뀌었나? 바뀐 게 뭐가 있느냐는 말일세. 세상은 점점 살기 힘들어져 가고, 끊임없는 전쟁의 위협과 날로 급증하는 범죄와 자살, 굶주림. 그 어느 것 하나 나아진 게 없지 않은가. 예수가 이 땅에 내려와 죽고 부활했다면, 적어도 하나의 목적은 있었을 텐데, 그게 인류의 구원이 아니겠는가. 근데, 그 구원은 도대체 언제 이루어졌단 말인가. 아니, 언제쯤이면 이루어진다는 말인가?” 대머리 남자의 머리엔 다시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그대 말이 맞지. 근데, 나도 하나 물어보겠네. 그대가 마지막에 말한 그 ‘구원’이란 뭐라고 생각하나?” 책방 주인의 얼굴은 아주 진지했습니다.

“그걸 내가 알았으면 이러고 있지 않았겠지? 난 이렇게 생각하네. 구원 따위는 사는 데 그다지 필요한 게 아니야. 그렇지 않나? 구원이 무엇인지 안다고 해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네. 게다가 그게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더욱 미지수고.” 대머리 남자의 눈빛은 이상하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래? 자네는 그렇게 믿고 있군그래.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네. 진리라는 게 존재하네. 그렇지? 그게 무엇이건, 거추장스러운 것이건, 추상적이건, 숨겨져 있던 말일세. 예를 들어 말이야. 누군가 이 세상에는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고 합세. 그렇다면 그는 자기의 진리를 말한 것이 되겠지. 이 세상엔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렇다면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진리인 동시에 거짓이 되네. 하지만 진리와 거짓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지 않은가? 이것이 나무이거나 혹은 아니거나, 둘 중 하나는 참이어야만 하네. 세상은 그렇게 이루어진 거야. 내가 왜 이런 시답잖은 말을 하는지 알겠나? 그만큼 진리란 중요한 것이네. 우리는 진리를 벗어나 살 수 없는 게지. 불가항력이야. 알겠나? 자네가 알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하면 자네가 중요치 않다고 해서 그 사실이 중요해지지 않은 건 아니란 말이지. 적어도 진리의 영역에선 말이야.” 책방 주인은 대머리 사내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습니다. 

“그래.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군. 그럼 자네가 얘기해주게. 구원이란 무엇인가?” 대머리 사내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습니다.

“글쎄. 그건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네. 그럼 우선 하나하나씩 얘기를 풀어보는 게 가장 현명한 일이겠지. 자! 우선 인간이란 모두 죄인이란 말을 그대는 인정하나?” 책방 주인은 담배를 하나 꺼내물며 물었습니다.

“음……. 적어도 나는 죄인이지. 자네도 그럴 게고. 이렇게 합세. 우리가 온 인류를 걱정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그대와 내가 인류의 전부라는 가정하에 얘기를 해보세. 그래. 그대와 나는 죄인이지. 동의하네.” 대머리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는 편이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에 용이하겠지. 그럼 말일세. 우리는 죄의 용서가 필요한 존재라는 데는 동의하나?” 책방 주인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물었습니다.

“죄의 용서가 필요하냐고?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아니, 적어도 그 죄의 용서가 누구로부터 이루어지느냐가 문제겠지. 자네가 하려는 말이 그거 아닌가? 신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내려온 목적은 인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라는. 그런 것쯤은 나도 알고 있네. 문제는 그 사실을 믿느냐 그렇지 않으냐겠지. 나는 잘 모르겠네. 설사 예수가 죄를 용서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비참한 존재로 삶을 마감할 것이고, 그 이후엔 전적으로 신에게 달렸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과연 죄의 용서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결국, 모든 게 신에게 달려있다고 한다면 말이야.” 대머리 사내는 처음으로 책방 주인의 두 눈을 도전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아. 그래. 피안의 세계는 전적으로 신에게 달려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도 어떤 이유는 있지 않겠나? 그저 모든 것이 신의 의지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정말 실험실의 쥐와 다를 것이 없겠지. 하지만 자네도 인정하듯이 인간은 실험실의 쥐와는 달라. 그럴 순 없어. 그래서도 안 되고. 자네가 만약 우리가 실험실의 쥐와 우리가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건 자기기만이네. 인간의 조건을 깡그리 무시해버리는 셈이 되니까. 인간은 사랑할 수 있는 존재 아닌가? 미워할 수도 있고. 물론 자네가 동물에게도 인간과 비슷한 모정 따위를 볼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인간의 사랑과는 달라. 인간의 사랑은 뭔가 더 깊고 심오한 것이네. 자.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행위는 특정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네. 그렇지 않은가? 다시 말하면, 지금 자네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죄를 짓던 선행을 하건 결국 모든 건 신에게 달려 있으니. 하지만 그렇지 않네. 우리에겐 자유의지가 있네. 그 자유의지에 따라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선행을 할 수도 있지. 만약 신이 모든 걸 마음대로 하려고 작정했다면 우리에게 자유의지 따위를 왜 부여했겠냔 말이지. 아. 그래. 그럼 이것부터 물어야겠군. 자네는 신이 창조자라는 것에는 동의하는가?” 책방 주인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끄며 말했습니다.

“글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지금 자네의 질문에 의하면 상당히 중요한 안건이 되겠구만.” 대머리 사내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1-8

“종교의 일차적이고도 주요한 기반은 두려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B. Russell-


“그래. 중요한 문제라네. 언제나 시작은 끝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지금 자네와 나는 골치 아픈 추상적인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닐세. 우리의 얘기가 돈을 만들어 내진 않지만 진부한 것은 아니네. 그래. 내가 경제적인 것을 쫓는 인간이었다면, 이 작은 헌책방에서 이러고 있겠나. 하하하. 그래. 웃어버리자고. 자! 그럼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가봅세. 인간이 진화의 산물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네. 그럴 수도 있겠지. 모든 가설은 존중해야 하지 않겠나. 아무리 터무니없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말이야. 하지만 자네도 나도 학자는 아니니, 그저 우리의 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 그곳까지만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합세. 재밌지 않은가? 이런 이야기들을 어디에 가서 할 수 있겠나. 자네도 최선을 다해 답변해 주게나. 아무튼, 그렇다면 왜 원숭이가 아직도 이 세상에 존재하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진화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는 없네. 진화했다면 진화를 한 것만이 이 세상의 승리자로 남아있을 뿐이지. 물론 이 문제에 대해서도 어떤 학자들은 현존하는 원숭이와 인간의 진화가 시작되었던 원숭이는 다른 것이라고 말하지. 더는 나도 알 수 없네. 내가 공부를 더 했다면 자네에게 진화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을 테지만. 이해하게. 내 지식의 깊이는 여기까지라네. 그럼 이렇게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인간이 진화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해봅세. 그렇다 하더라도 언제나 시작은 있어야 하네. 그렇지 않은가. 시작이 있었으니, 현재가 있는 게 아니겠나. 시작이 없었다면 우리가 여기서 한가롭게 이런 얘기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지 않을까. 아무튼, 시작이 존재했다네. 그 시작이 누구에 의해서였을까. 그저 모든 게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한순간의 폭발로 생겨난 것일까. 이 모든 게 다 우연의 산물이란 말인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단언할 수는 없을 게야. 과학자들이 연구를 더 해 갈 때마다 그곳에서 더 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발견하고 조심스러워진다는 사실을 그대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 나는 이 모든 만물에는 이유가 존재한다고 믿네. 그렇지 않고선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으니까. 그렇지 않다면 나란 놈은 이 세상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던져진 우연의 산물이겠지. 그것보다 슬픈 일은 없을 거야. 그렇지 않은가?” 책방 주인은 종이컵에 물을 따라 대머리 사내에게 건넸습니다.

“글쎄. 난 잘 모르겠네. 사실 난 한평생을 그 이유를 찾으며 살아왔다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어. 아무것도 없네. 난 그 어떤 목적도 발견하지 못했네. 게다가 그 목적을 종교에서 찾으려 해본 적도 없다네. 물론 인제 와서 젊은 시절과 같이 날카롭게 말할 순 없지만. 이게 다 세월의 탓 아니겠나. 나도 헷갈리기 시작하니. 하지만 적어도 나는 신이란 우리들의 투영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네. 그 누구도 신을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예수를 본 적도 없지 않은가. 세상이 창조된 목적 따위는 내게 아무런 소용도 없는 고대의 종이쪼가리 같은 거야. 오해는 말게. 내가 그대의 말을 무시하는 건 아니니까. 그래. 그대의 말대로라면 난 참 슬픈 삶을 살아온 꼴이 되겠지. 난 삶에서 아무런 이유도 찾지 못했으니까. 내가 바라본 곳은 죽음이라네. 죽음. 그 무시무시한 허무함. 그것만이 자명한 사실이었네. 그것보다 더 확실한 건 없지.” 대머리 사내는 물을 쭉 들이켰습니다.

“그래. 그래. 나도 뭔가를 다 알고 얘기하는 건 아니야. 내가 자네는 의미 없고 슬픈 삶을 살고 있는 게야 라고 말하려 한 건 아니야. 자네도 알지? 미안하네. 내가 조금 경솔했어.” 책방 주인은 대머리 사내를 지그시 바라보았습니다.

“아니야. 나도 알고 있네. 자네의 의도가 그런 건 아니었다는 걸. 걱정 말게. 한두 해 만난 사이도 아니고. 걱정 말게나.” 대머리 사내는 작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음……. 우리 엘지가 가을 야구를 좀 오래 했으면 좋겠는데. 자네 오랜만에 광석이 노래나 듣지 않겠나?” 책방 주인은 레코드판을 가리켰습니다.

“아니. 그 하던 얘기나 마저 해봅세. 그래서 그대에게 구원이란 무엇인가?” 대머리 사내는 팔짱을 끼며 자세를 고쳤습니다.

“음……. 그래. 아무튼, 그럼 다시 얘기하겠네. 내가 생각하기엔 말이지. 구원을 단지 죄의 용서에 국한하는 건 뭔가 부족한 것 같네. 죄의 용서야 예수가 이 땅에 오지 않아도 가능한 거 아니었겠나. 물론 궁극적인 죄의 용서가 필요했기에 예수의 강생도 필요한 것이었겠지. 그래도 아직 뭔가가 부족하다네. 문제는 예수가 이 땅에 인간으로서 왔다는 거야. 바로 거기에 모든 비밀이 숨어있다고 생각하네. 왜 굳이 인간으로 이 땅에서 삼십 년이 조금 넘는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삶을 살았던 걸까. 신에게도 뭔가가 부족했던 걸까. 창조자가 피조물보다 우위에 있다는 건 당연한 일이야. 창조자가 피조물보다 못하다면 그건 어불성설이겠지. 물론 청출어람이란 말도 있지만, 그건 인간의 세상에만 국한되는 얘기라고 생각하네. 적어도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청출어람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보네. 아무튼,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네. 예수가 이 땅에 온 이유는 우리에게 궁극적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인간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몸소 인간의 삶을 살았던 건 아니었겠느냐는 말이지.” 책방 주인은 두 손으로 백발을 쓸어 넘기며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의 그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네. 게다가 난 예수의 삶이 아름답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네. 고통 속에서 자신의 친구들에게 배반을 당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삶이 뭐가 그렇게 아름답단 말인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겟세마니 동산에서 지독한 외로움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예수의 모습은 비참할 뿐이야. 그 어디에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는 없어. 이봐! 자네는 많은 걸 간과하고 있어. 전체를 보는 것도 좋지만,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눈여겨보는 것 역시 중요하네. 게다가 예수는 인간이었지만 동시에 신이라고 하지 않나. 벌써 시작점부터 우리와는 다르지 않은가. 그는 등 비빌 곳이 있었어. 하지만 우리에겐 등 비빌 언덕조차 존재하지 않아. 이런 거야. 들어보게. 백만장자가 일용직 노동자의 삶을 체험해보겠다고 일터에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야. 물론 의도는 좋아. 뭔가를 이해하고 싶었던 게지. 하지만 그 백만장자가 일용직 노동자의 깊은 슬픔과 고통을 정말 알 수 있다고 보는가? 그들은 처절하네. 긴박하네. 그리고 간절하지. 백만장자는 그저 한 번 흘긋 보는 것 뿐이야. 잠깐 맛보고 돌아서는 거지.” 대머리 사내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습니다.

“음……. 그래 그 말도 일리는 있어. 하지만 예수의 삶이 그 백만장자의 경험과 같은 것일까. 그렇지 않네. 그는 끝까지 갔어. 백만장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예수는 끝까지 간 거야. 거기에 바로 엄청난 차이가 있네. 그것보다 더 큰 차이를 보여주는 근거가 존재하네. 엄청난 비밀이지. 바로 그건 사랑이야. 백만장자는 무엇을 위해 체험을 할까. 그래. 자네의 말대로 일용직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이해하고 싶어서였겠지. 물론 그 행위도 사랑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전부를 내건 사랑은 아니야. 자네는 파렴치한을 위해서 자네의 목숨을 걸 수 있겠나? 난 그럴 수 없네. 내게는 그 누구를 위해 목숨을 내걸 만큼의 큰 사랑이 없네. 그래서 예수를 더욱 동경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숭고하지 않나? 자신이 사랑한 이를 위해서만이 아닌 파렴치한 존재를 위해서도 목숨을 바치는 삶이. 아름답지 않냔 말이야.” 책방 주인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말했습니다.

“글쎄. 난 그 모습이 도대체 왜 아름다운지 모르겠는데. 뭐가 숭고하단 말인가. 나 하나만 챙기기에도 버거운 세상이야. 이봐. 현실을 바라보는 것도 중요한 거라고. 자네는 부양할 가족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나 같은 보통의 가장은 하루하루가 전쟁터에 총을 들고 벌벌 떠는 이등병 같은 신세와 다를 게 없어. 우리는 간절하지. 처절하다고. 이 세상에서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자네는 모르나? 게다가 내 뒤에는 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이 존재하네. 내가 총에 맞아 무너지면 그들은 적의 전리품이 되어버리지. 그렇다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은 총에 맞기 전에 먼저 총을 쏘는 거야. 알겠나? 그들이 죽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되네. 나의 죽음은 나만의 죽음이 아니야. 내 뒤에 있는 모든 이들의 죽음과 직결돼 있어. 이게 삶이야. 이게 인간의 현실적 삶이야. 그래. 예수를 믿건, 신을 믿건 난 반대하지 않네. 하지만 그런다고 삶이 달라지진 않아. 피안의 세계? 그래 죽으면 아무것도 없거나, 혹은 다른 세계가 존재하거나. 난 그 믿음을 반대하진 않아. 하지만 그걸 믿는다고 지금의 삶이 달라질 건 없네. 당장 내 새끼들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수술할 돈이 없다면 그 믿음이 다 무슨 소용이겠나. 내 앞에서 죽어가는 새끼를 아무런 희망없이 바라봐야 하는 부모의 마음을 예수가 어찌 알 수 있겠느냔 말야. 난 내 모든 삶을 용감하게 살아왔어. 알겠나? 난 종교에 기대 위안을 얻으려 하지 않았어. 왜냐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해야 해. 신에게 기도를 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내 두 손이 할 수 없는 일은 그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어. 알겠나? 신이 존재하냐고? 그래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네. 하지만 그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야. 신의 분노가 두렵지도 않냐고? 아니. 난 두렵지 않네. 난 떳떳하네. 난 가장으로서 해야 할 모든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어. 남편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다했어. 그런 내가 왜 죄인이란 말인가. 미워했다고? 시기했다고? 욕심을 부렸다고? 남을 험담했다고? 신을 믿지 않았다고? 인간이란 원래 다 그런 거 아닌가? 특별해질 필요는 없네.” 대머리 사내는 흥분을 가라앉히려 숨을 길게 내 쉬었었습니다.

“…….” 책방 주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미안하네……. 내가 괜한 말을 했네. 미안하네……. 이해하게.” 대머리 사내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자네 말이 맞아. 내가 자네에게 미안하지.” 책방 주인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말했습니다.


장관님.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은 존재하는 걸까요?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걸까요? 신은 무엇인가요? 아니면 신은 누구인가요? 지구별을 포함한 이 모든 세계는 어떻게 생겨난 걸까요? 정말 누군가 이 세계를 만든 걸까요? 어떤 목적이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정말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는 우연의 산물인가요? 저는 누군가요? 저는 어떻게 태어났나요? 저도 언젠가는 죽게 되나요? 죽음은 무엇일까요? 죽음 이후에도 다른 세계가 존재하나요?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없나요? 저에게도 구원이란 게 필요한가요?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인가요? 책방 주인이 말한 아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요? 예수는 누구인가요? 정말 그가 모든 이를 위해 죽었나요? 정말 그가 부활했나요? 그는 왜 모두를 사랑했나요? 그 사랑이란 건 무엇인가요? 

장관님. 우연히 들어간 헌책방에서 엿듣게 된 두 사내의 대화는 제게 새로운 질문들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장관님은 이 모든 것들을 잘 알고 계신가요? 제겐 새롭고 혼란스러운 질문들입니다. 

                                                                                                       ensoph 드림.


1-9

“당면한 문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Susan Sontag-


“뭐 먹을까?” 하얀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여자의 목소리엔 기대감이 잔뜩 서려 있었습니다.

“응. 그냥 뭐……. 아무거나.” 코가 약간 들린 안경 낀 여자는 시무룩하게 대답했습니다.

“또 그런다. 뭐가 아무거 나야. 뭐 먹고 싶은지 얘기해봐. 오늘은 그냥 안 넘어 갈 거야.” 주근깨 여자는 톡 쏘아붙였습니다.

“그냥 너 먹고 싶은 거 먹으러 가면 되지. 난 아무거나 다 괜찮다니까. 그냥 너 먹고 싶은 거 먹으러 가자.” 안경 낀 여자는 시무룩하게 대답했습니다.

“지영아! 너 진짜. 내가 왜 일부러 이러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주근깨 여자는 약간 화가 난 것 같았습니다.

“아! 진짜 왜 그래? 그냥 너 먹고 싶은 거 먹으라고. 왜 그러는데? 민주야, 나 오늘 좀 힘들어. 그냥 넘어가자.” 안경 낀 여자도 짜증을 내며 대답했습니다.

“왜? 오빠랑 무슨 일 있었어?” 주근깨 여자는 조금 누그러진 음성으로 물었습니다.

“아니야. 그냥 오늘 힘이 없고, 다 짜증이 나네. 나도 뭔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오빠랑 무슨 일 있는 건 아냐. 미안. 괜히 짜증 냈네.” 안경 낀 여자도 누그러진 음성으로 답했습니다.

“지영아. 그럼 그냥 내가 가자는 대로 가. 오늘 우리 맛있는 거 먹자. 음……. 뭘 먹을까? 저번엔 스파게티를 먹었으니까 오늘도 스파게티를 먹는 건 좀 그렇고……. 그럼 오늘은 중식을 먹을까? 아니면 일식? 아니면 삼겹살 먹으러 갈까? 뭐가 좋지? 뭐 좀 새롭고 맛있는 거 없을까? 흠…….” 주근깨 여자는 허공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습니다.

“그런 거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우주 비행사들이 먹는 것 같은 알약 있잖아. 알약 하나로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그런 거. 얼마나 좋아 간편하고. 시간도 안 뺏기고.” 안경 낀 여자는 푸념 섞인 말투를 길게 늘어뜨렸습니다.

“야. 야. 얘 봐라. 먹는 즐거움이 얼마나 소중한 건데. 얘가 큰일 날 소리를 하네. 그리고 보니까 우주 비행사들도 알약 같은 거 안 먹고 그냥 보통 음식으로 먹는 거 같던데? 이 기집애. 그러니까 니가 그렇게 빼싹 곯아서 짜증만 내는 거야.” 주근깨 여자는 안경 낀 여자를 째려 보았습니다.

“분명히 미래에는 요리 같은 건 사라질걸? 뭘 그렇게 아까운 시간을 들여서 요리하고……. 게다가 설거지가 더 많잖아. 아, 귀찮아. 귀찮아.” 안경 낀 여자는 머리를 가로저었습니다.

“뭐? 얘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네. 요리가 사라진다고? 더 발달하면 발달했지 절대 사라지진 않을걸? 너가 잘 몰라서 그래. 너 찬밥 먹을 때랑 따듯한 밥 먹을 때랑 완전히 다른 거 몰라? 난 찬밥 먹으면 신경질 나. 뭔가 내가 존중받지 못한 느낌이 들어. 한 끼를 먹어도 제대로 먹어야지.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니까. 나도 예전엔 너랑 비슷한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완전 반대야. 아무거나 되는대로 먹다 보니까 자꾸 피폐해지더라고. 나 유학 갔을 때, 돈 없어서 정말 냉동식품 같은 거 사 먹고 그랬거든. 근데 그게 한 달, 두 달 이어지다 보니까 자꾸 사람이 이상해지더라고. 건강이 문제가 아니라니까.” 주근깨 여자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너 뭐 육체랑 정신이랑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그런 소리 하려고 그러는 거지? 얘 또 시작이다. 알겠어. 알겠어. 니 말이 맞아. 기집애. 하여튼.” 안경 낀 여자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너 따듯한 밥에, 따듯한 국에, 반찬 몇 가지 없어도 좋은 사람들이랑 둘러앉아서 오손도손 나눠 먹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 건 줄 모르지?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혼자 먹으면 맛이 없잖아. 음식이 그냥 음식이 아니라니까. 그냥 영양분 보충하려고 먹는 게 아니라고. 정성이 들어간 밥이랑 그냥 아무렇게나 밥이랑 얼마나 다른데. 맛있고 맛없고의 문제가 아니야. 아무튼, 뭐 먹으러 갈까? 아! 오늘은 뭔가 정성스런 음식을 먹어줘야겠는데. 얼마 전에 회사 선배가 추천해준 곳이 있는데, 버스 타고 시내로 나가야 하긴 하는데……. 갈까?” 주근깨 여자는 안경 낀 여자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습니다.

“시내까지 나가야 한다고? 아, 귀찮아. 그냥 가까운 데서 먹자. 언제 버스 타고 시내까지 나가. 게다가 지금 시간이면 차 엄청 막힐텐데. 민주야. 그냥 중국집에가서 자장면 먹자. 응?” 안경 낀 여자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또? 자장면은 무슨 자장면이야. 오늘같이 축 처진 날은 맛있는 걸 먹어줘야 한다니까. 가자, 가자!” 주근깨 여자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큰 결심이라도 한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민주야. 나 진짜 시내까지 나갈 힘도 없고, 귀찮기도 하고, 그냥 가까운 데서 먹자. 응? 오늘은 그냥 그렇게 하자.” 안경 낀 여자의 얼굴은 자꾸만 어두워졌습니다.

“지영아. 너 무슨 일 있구나? 무슨 일이야? 응?” 주근깨 여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기분이 좀 그렇다니까.” 안경 낀 여자는 힘없이 대답했습니다.

“너 오빠랑 무슨 일 있구나? 야! 그냥 말해. 뭔데?” 주근깨 여자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습니다.

“……. 나 있잖아. 아……. 임신한 거 같아…….” 안경 낀 여자는 고개를 푹 숙여버렸습니다.

“뭐? 정말? 확실한 거야?” 주근깨 여자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습니다.

“응. 그런 거 같아. 생리 안 한 지 두 달이 넘어서 오늘 약국 가서 임신테스트기 사서 해봤는데……. 임신한 거 같아. 아……. 나 어떡해…….” 안경 낀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을 이어 나갔습니다.

“오빠는? 오빠는 뭐래?” 주근깨 여자는 허리를 곧추세우며 물었습니다.

“아직 말 안 했어. 말 안 할 거야.” 안경 낀 여자는 계속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습니다.

“야! 김지영! 고개 좀 들어봐. 네가 무슨 죄지었어? 고개 좀 들어보라고. 왜 오빠한테 얘기 안 하겠다는 건데? 너 혼자 만든 것도 아니고. 너 다른 남자랑 잔 것도 아니잖아. 어?” 주근깨 여자는 다그치듯 물었습니다.

“…….” 안경 낀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뭐야. 너 다른 남자랑도 잤어? 응?” 주근깨 여자는 놀란 눈으로 물었습니다.

“…….” 안경 낀 여자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 주근깨 여자도 정지된 화면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크게 뜨고 있었습니다.

“지영아…….” 주근깨 여자는 무슨 말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습니다.

“지영아. 근데. 그게……. 그게 한 번 그런 거야?” 주근깨 여자는 다시 힘들게 입을 열었습니다.

“…….” 안경 낀 여자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뭐야. 너 그럼 그 동안……. 야! 김지영. 무슨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얘기 좀 해봐. 그냥 그렇게 입 다물고 있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지금 내가 너한테 뭐라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고……. 우선 자초지종을 들어봐야 뭐가 뭔지 알 수가 있지.” 주근깨 여자는 감정을 다스리려 노력했습니다.

“나도 힘들었다고……. 오빠는 아직도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고 저러고 있는데, 나도 지쳤어. 언제까지 내가 다 해줘야 하냐고. 남들은 다 좋은 남자 만나서 잘 사는데. 이 나이에 아직도 공무원 준비한다고 돈 한 푼 못 버는 남자 뒷바라지 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잖아. 지겨워.” 안경 낀 여자의 두 눈이 붉어졌습니다.

“그래. 당연히 힘들지. 내가 왜 모르겠니……. 그거야 새로운 일도 아니었잖아.” 주근깨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팀장이야.” 안경 낀 여자가 뭔가를 토하듯 말했습니다.

“뭐?” 주근깨 여자는 놀란 눈으로 안경 낀 여자를 바라보았습니다.

“팀장이라고. 몇 달 전에 부산으로 같이 출장 갔었어.” 안경 낀 여자는 주근깨 여자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습니다.

“그 이혼남? 아…….” 주근깨 여자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래. 그 이혼남.” 안경 낀 여자가 다시 확인하듯 말했습니다.

“…….” 둘은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겠다. 근데 아무튼, 오빠한테 얘기하던, 그 사람한테 얘기하던, 누구한테는 얘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너 혼자 다 떠안고 갈 수는 없잖아.” 주근깨 여자의 얼굴은 어두웠습니다.

“나 오빠랑 헤어질 거야.” 안경 낀 여자는 차분한 말투로 대답했습니다.

“뭐? 그럼 그 사람이랑 결혼이라도 하려고?” 주근깨 여자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아니.” 안경 낀 여자가 짧게 대답했습니다.

“뭐? 그럼 어쩌려고. 지영아. 너 지금 힘든 거 아는데, 극단적으로 생각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어. 내 말 들어봐…….” 주근깨 여자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니가 뭘 알아? 너가 뭘 안다고 그래? 너 나처럼 살아봤어? 응? 나 정말 미칠 거 같다고. 우리 엄마 아빠 이혼하고, 대학교 때부터 나 혼자 살았어. 너가 그게 뭔 줄 알아? 너 진짜 외로운 게 뭔지 알아? 난 결혼 같은 거 안 할 거야. 왜? 내가 왜 애를 낳아서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하는데? 싫어. 다 싫어. 진짜 구역질이 나.” 안경 낀 여자의 흥분은 조금씩 고조되었습니다.

“지영아……. 잠깐만 내 얘기 좀 들어봐. 나도 무슨 방법이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흥분 좀 가라앉혀봐. 흥분해서 감정적으로 처리해서 될 문제가 아니잖아. 너도 행복해야지. 우선 네 행복이 제일 중요하잖아. 너 지금 이러는 거 충분히 이해하는데. 우선 잠깐 기다려봐. 응?” 주근깨 여자는 당황한 나머지 횡설수설했습니다.

“…….” 안경 낀 여자는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긴 숨을 내쉬었습니다.

“너 우선, 오늘은 나랑 같이 우리 집에서 있자. 응? 나랑 당분간 같이 지내. 그러는게 좋을 거 같아. 응?” 주근깨 여자는 상대방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물었습니다.

“싫어.” 안경 낀 여자는 한마디로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아니, 너 그냥 나랑 당분간 있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렇게 해.” 이번엔 주근깨 여자도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괜히 너한테 얘기했나 봐.” 안경 낀 여자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습니다.

“아니야. 잘했어. 잘한 거야. 야, 김지영. 세상 안 끝났어. 분명히 잘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야. 미안. 내가 너 심정도 모르고 속 편하게 얘기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지영아. 우선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응? 오빠 생각도 하지 말고, 그 사람 생각도 하지 말고, 우선 네 생각만 하자. 네가 가장 중요하잖아. 우리 김지영이가 가장 중요해.” 주근깨 여자는 안경 낀 여자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 안경 낀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지영아. 우리 나가자. 오늘 우리 그냥 진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응? 그리고 우리 재밌는 영화 보자. 우리 대학교 때 시험 끝나고 했던 것처럼. 응?” 주근깨 여자는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말을 이었습니다.

“…….” 안경 낀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친애하는 장관님께. 

이제 지구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처럼 저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장관님의 말씀대로 어느새 저는 정말 관찰자의 입장이 되어 지구별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요?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고 싶은 걸까요? 제가 처음 지구별에 도착했을 때, 저는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이곳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이곳의 고통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이곳의 엉뚱함과 무지함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이곳을 이해하기엔 저는 어렸습니다. 일 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저는 이들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이곳의 고통과 혼란스러움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기까진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제가 이곳을 이해할 것 같다고 말하는 건 이곳의 생각과 행동에 동의한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곳의 무지와 엉뚱함, 비참함과 고통, 슬픔과 기쁨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따듯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이곳의 공기를 함께 들이마시고 뱉어내는 행위만으로도 유대감은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단지 제 삼자의 입장으로 온전히 분리되어 지구별을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제야 조금 장관님의 속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의 ‘어른’인지 설명할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왔을 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다릅니다. 이들이 말하는 성숙함에 한 발짝 다가간 것인지, 단지 저의 마음이 굳어졌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들은 이들 나름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모든 것을 계획해서 그것에 맞추어 살아가려고 하고, 어떤 이는 매일이 주는 새로움과 놀라움을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쨌든, 지구별의 지구인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참함과 고통 속에서도 이들을 지탱해주는 무언가가 분명 존재한다고 저는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곳은 벌써 폭발해버렸을 겁니다. 장관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장관님, 이상합니다. 제가 본 것은 대부분 슬픈 일들이었는데, 그래서 저는 이곳을 무척 떠나고 싶었는데, 지금 이곳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정말 지구별에선 진흙 속에서도 연꽃이 피어오르는 모양입니다.


                                                                                                                     ensoph 드림.


1-10

“술은 입으로 오고

사랑은 눈으로 오나니

그것이 우리가 늙어 죽기 전에

진리로 알 전부이다.

나는 입에다 잔을 들고

그대 바라보고 한숨짓노라”      -W.B. Yeats-



“민영아, 태어날 때부터 장님인 사람은 꿈에서 뭐가 보일까?” 곱슬머리의 남자가 물었습니다.

“글쎄……. 당연히 아무것도 안 보이겠지. 근데 왜?” 단발머리의 여자는 되물었습니다.

“아니, 그냥……. 꿈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안 보이면 진짜 답답할 거 같아서. 그렇잖아. 아무리 태어날 때부터 볼 수 없다고 하지만 꿈에서는 뭘 좀 봐야 하는 거 아니냐?” 곱슬머리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난 좀 달라.” 단발머리 여자는 새침한 표정으로 답했습니다.

“뭐가?” 곱슬머리 남자는 되물었습니다.

“네가 모르는 세계가 있을 거야. 어쩌면 네가 보고 있는 세상이 태어날 때부터 장님의 세계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빈약한 걸지도 몰라.” 단발머리 여자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꼬며 말했습니다.

“뭐가 터무니없이 빈약해? 자, 봐!” 곱슬머리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에 자신만만한 웃음을 얼굴에 담아 보였습니다.

“응?” 단발머리 여자는 쉬지 않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물었습니다.

“노을. 너, 태어날 때부터 장님한테 노을을 묘사해보라고 해봐. 불가능할걸? 그렇잖아. 그 사람은 하늘을 본 적도 없고, 심지어는 색이 뭔지도 모른다고. 아마 그 사람한테는 암흑이 보라색이고, 붉은색이며……. 그치? 아무것도 설명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뭐가 나보다 풍요롭다는 거야?” 곱슬머리 남자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하긴……. 또 듣고 보니까 네 말도 맞네. 근데……. 음…….” 단발머리 여자는 자신의 왼손으로 턱을 괴며 곰곰이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야! 이번엔 내 말이 맞다고 하자. 우길 걸 좀 우겨. 넌 어째 맨날 이기려고 안달이 났냐? 그냥 좀 인정해!” 곱슬머리 남자는 언짢은 표정으로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아니, 이기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생각 좀 해보는 거야. 정말 태어날 때부터 장님인 사람은 노을에 대해서 한마디도 할 수 없는 건지…….” 단발머리 여자는 여전히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당연하지. 뭘 어떻게 설명하라고. 야! 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걸 설명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봐봐. 네가 나한테, 음…….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천국에 관해서 설명을 해달라고 치자. 불가능한 거야. 천국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냐?” 곱슬머리 남자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옆으로 살짝 꺾으며 말했습니다.

“아니지. 그건 다른 거지.” 단발머리 여자의 눈빛이 살짝 빛났습니다.

“야! 얘 또 시작했네. 다르긴 뭐가 달라? 너 천국에 가 본 적 있어? 없잖아.” 곱슬머리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습니다.

“다르지. 달라도 한참 다르지. 봐봐! 그래, 너나 나나 천국에 가본 적이 없는 건 사실이야. 그건 맞는 얘긴데, 그렇다고 천국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건 아니거든. 왜냐면……. 그러니까……. 그래! 이거야. 야! 나 지금 알았어. 하하!” 단발머리 여자는 괴고 있던 왼손으로 탁자를 탁! 하고 쳤습니다.

“또 뭔데? 말해봐.” 곱슬머리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습니다.

“그러니까 봐봐! 천국에 가본 적은 없지만, 천국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어. 그치?” 단발머리 여자는 검지를 치켜세우며 말했습니다.

“아니. 설명 못 하지. 가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설명해?” 곱슬머리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습니다.

“아, 그러니까 이 맹추야. 당연히 가본 적이 없으니까 설명할 순 없지. 누가 뭐래? 근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단발머리 여자는 꼬았던 다리를 풀며 자세를 고쳤습니다.

“그럼 또 뭐가 중요한데?” 곱슬머리 남자가 물었습니다.

“자! 너 천국 하면 뭐가 떠올라?” 단발머리 여자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습니다.

“그게 중요한 거야?” 곱슬머리 남자는 피식 웃었습니다.

“잔말 말고 대답이나 해봐.” 단발머리 여자는 양미간을 찌푸렸습니다.

“음……. 천국이라……. 근심걱정 없이 마냥 행복한? 뭐 그런 이미지? 천국까지 갔는데 슬프면 안 되지. 슬프면 천국이 아니지.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래.” 곱슬머리 남자는 비아냥 거렸습니다.

“그래. 그거야! 천국을 본 적이 없으니까 완벽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천국이 대충 어떨 거란 건 상상할 수 있잖아. 그러니까 설명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지.” 단발머리 여자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뭔 소리냐, 그건? 또 방언 터졌냐?” 곱슬머리 남자는 계속해서 비아냥거렸습니다.

“상상! 완벽하진 않아도, 어쨌든, 설명은 가능하잖아. 그게 바로 천국에 대한 묘사가 가능하단 이유지. 네 머리론 이해하기가 힘들 테니까 이 누나가 잘 설명해줄게요.” 단발머리 여자는 입술을 쭉 내밀며 남자를 놀렸습니다.

“꺼져!” 곱슬머리 남자는 손을 들어 여자의 입술을 때리려 했습니다.

“영식아! 우리 최영식이. 잘 들어봐. 이 누나가 찬찬히 설명해줄 테니까. 태어날 때부터 장님도 노을에 관해서 설명할 수 있어. 자! 장님은,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장님은 색이 뭔지 알 수 없는 건 당연하지. 그치? 근데, 누군가는 장님한테 분명히 장미가 붉다는 얘기를 했을 거야. 물론, 그래도 장님이 붉은색이 뭔지는 알 수가 없지.” 단발머리 여자는 침까지 튀기며 설명에 열중했습니다. 

“하지만 붉은 장미의 향기를 맡거나, 만져볼 순 있겠지. 물론 흰 장미나, 노란 장미나 향기의 차이는 없겠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붉은 건 장미 말고도 많을 테니까. 아무튼, 장님도 장님 나름대로 색이라 거에 대한 정보를 우리와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 알게 되겠지. 정확히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떻게 다른지는 말야.” 단발머리 여자는 열정적으로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아무튼, 시각을 뺀 모든 다른 감각을 이용해서 우리와는 다른 시각적 정보로 만들어 낼 거야. 그래야 상상이 가능하거든. 그러니까 내 말은 분명히 우리가 보는 거랑은 다른 방법으로 노을을 보겠지만, 아예 못 본건 아니란 말이지.” 단발머리 여자는 다시 왼손으로 자신의 턱을 괬습니다.

“뭔 소리냐? 한 마디도 못 알아듣겠는데?” 곱슬머리 남자가 못마땅한 듯 말했습니다.

“너 자꾸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올래?” 단발머리 여자는 남자를 째려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해서 설명할 수 없는 건 아니란 거야. 분명히 다른 방식으로 보는 게 가능하단 얘기지. 바꿔서 생각해보면 난 이미 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미 봐 버렸으니까 지금 눈이 먼다고 해도,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 보는 방식으론 절대 볼 수 없을 거지. 그러니까 내가 가질 수 없는 걸 그 사람은 가진 거야. 알겠어? 네가 그 사람보다 낫다고 할 순 없는 거야, 그래서.” 단발머리 여자는 남자를 타이르듯 말했습니다.

“아니, 언제 내가 낫다고 했냐? 그냥 설명할 수 없다고 한 거지. 그리고! 먼저 물어본 건 나야. 난 예전부터 궁금했거든. 넌 꼴랑 지금 생각한 거지만, 난 예전부터 태어날 때부터 장님인 사람의 꿈엔 뭐가 보일지 궁금했었다고. 그래서 물어본 거잖아.” 곱슬머리 남자는 입을 삐쭉거렸습니다.

“뭐, 알겠다. 미안하다. 괜히 우리 영식이를 또 혼내버리고 말았네.” 단발머리 여자는 얄궂게 웃었습니다.

“근데, 우리 영식이 그게 왜 궁금했는데?” 단발머리 여자가 물었습니다.

“그냥.” 곱슬머리 남자의 대답은 퉁명스러웠습니다.

“뭐가 그냥이야. 뭐야? 뭔데? 왜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우리 영식 군이.” 단발머리 여자의 얼굴엔 여전히 얄궂은 미소가 걷히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 생각이 자꾸 나서…….” 곱슬머리 남자가 중얼거렸습니다.

“…….” 단발머리 여자의 얼굴은 갑자기 굳어졌습니다.

“영식아……. “ 단발머리 여자는 무슨 말을 하려다 이내 입을 굳게 다물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서. 난 나를 낳은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데……. 그래서 꿈속에서 조차 그릴 수가 없는데……. 날 버린 그 사람들을 본 적이 없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쭉 해왔는데, 언젠가부터 꿈에서 자꾸 나 혼자 울고 있더라. 소리도 지르고. 엄마! 아빠! 하면서. 근데 아무런 대답도 없어. 그냥 암흑이야.” 곱슬머리 남자는 초점 없는 눈동자로 천장을 바라보았습니다.

“영식아. 그런 얘기였으면……. 진작…….” 단발머리 여자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어찌할 줄 몰았습니다.

“아니다. 내가 괜히 또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곱슬머리 남자는 슬픈게 웃으며 여자를 바라보았습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라기보다는……. 아…….” 단발머리 여자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그냥 그런 꿈을 꿀 때마다 꿈에서도 가슴이 먹먹하다. 슬픈 게 아니라. 먹먹해. 답답하고. 암흑 속에는 나 혼자밖에 없고. 아니. 슬프다. 비참해. 그냥……. 까맣다.” 곱슬머리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천국에 가면, 만약에 천국이 존재한다면 말야. 그 두 사람 다 천국에 있었으면 좋겠어. 옛날엔 둘 다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저주했었는데, 요즘엔 제발 천국에 있어달라고 기도한다. 진심으로 말야.” 곱슬머리 남자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습니다.

“그래. 영식아. 잘했어. 잘한 거야.” 단발머리 여자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근데, 나 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거 아냐.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냐? 내가 아까 그랬잖아. 천국에서조차 슬프면 안 된다고. 내가 천국에 갔는데, 그 두 사람이 없으면 난 천국에서마저 암흑을 볼 거 아니냐. 물어 따질 수조차 없잖아. 얼마나 울화통이 터지겠냐고. 그게 무슨 천국이야. 그래서 난 나를 위해서 그 두 사람이 꼭 천국에 가길 기도한다.” 곱슬머리 남자는 양 어금니를 꽉 깨물었습니다.

“그래. 이해해. 충분히 이해해.” 단발머리 여자가 시선을 아래로 옮겼습니다.

“권민영이! 넌 이해 못 해. 아까 네가 그랬잖아. 이미 노을을 본 사람이 갑자기 시력을 잃는다고 해서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 노을을 보는 방식을 이해할 순 없다고. 네 말이 맞는 거야. 그래서 넌 절대 이해할 수 없어. 그냥 이해 못한다고 해도 괜찮으니까 제발 이해한다느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마.” 곱슬머리 남자의 눈엔 노기가 서려 있었습니다.

“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얘 봐라. 사람 되게 우습게 만드네? 네 아픔만 아픔이냐? 나는 뭐, 평생 낄낄대면서 살았냐? 부모가 있다고 아픔이 없는 줄 알아? 난 뭐 비참한 적 없는지 아냐고? 보자 보자 하니까.” 단발머리 여자는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됐다. 그만하자. 야! 그리고 너 앞으로 나한테 전화하지 마. 짜증 나니까. 네 웃는 얼굴 보는 것도 짜증 나고, 다 짜증 나니까 앞으로 연락하지 마!” 곱슬머리 남자도 소리를 질렀습니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니? 이것도 고아 근성이냐? 내가 너 갖고 놀다가 버릴까 봐 겁나냐? 그래서 나 좋아한다는 말도 못하는 거냐? 거지 같은 새끼.” 단발머리 여자는 씩씩거렸습니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 고아 근성이라고?” 곱슬머리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여자를 쏘아보았습니다.

“됐어. 꺼져! 너 같은 새끼랑은 말도 하기 싫으니까.” 단발머리 여자는 싸늘한 시선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습니다.

“…….” 남자는 벌떡 일어나 가방을 둘러매고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단발머리 여자는 의자에 홀로 남겨졌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작은 까페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기들끼리 쑥덕댔습니다. 곱슬머리 남자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커피잔에선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인 단발머리 여자의 어깨가 들썩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여자를 힐끔힐끔 쳐다보았습니다.

“어떡해. 저 여자 울잖아.” 뒤쪽에서 한 여자의 안타까운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여자는 무슨 결심을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저는 뒤쫓았습니다. 

단발머리 여자는 몇 발자국 가지 않아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한 번 훑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숨을 길게 한 번 내쉬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자의 발걸음이 이상했습니다. 여자는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발을 떼며 두 팔을 앞으로 뻗고 뭔가를 더듬으려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보았습니다.

장관님. 

단발머리 여자는 두 눈을 감고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몇몇 사람은 두 팔을 뻗고 조심스럽게 발을 떼는 여자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 길 끝에는 차들이 오가는 도로가 있었지만, 여자는 눈을 뜨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비틀거리며 걸었고 차가 다니는 도로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몇 발자국만 더 가면, 그리고 여자가 눈을 뜨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불 보듯 뻔했습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야! 권민영!” 뒤에서 누군가 단발머리 여자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자는 그대로 굳어버렸습니다. 두 팔을 뻗은 채로.

저는 뒤돌아보지 않고 모른 척 여자를 지나 걸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길을 통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보았습니다.

멀리서 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투명망토를 걸치고 다가가려다 그냥 멀리서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둘은 어색한 거리를 유지하며 어렵게 말을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둘 다 서로를 바라보지는 않았습니다. 얼마 동안 지켜보다 저는 그들을 남겨두고 뒤돌았습니다. 


장관님께.

 저는 이 두 지구인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알지 못하지만, 주위에 이상한 색을 흩뿌립니다. 그들이 싸우거나 서로에게 화를 낼 때도 그 빛깔은 사라지지 않고 주위를 감싸고 있습니다. 첫 번째 보고서에서 말씀드렸던 그 두 지구인 주위에도 이상한 색이 보였습니다. 그때 저는 그것이 이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그 빛깔이 그들을 감싸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곧 첫 보고서에서 말씀드린 두 지구인을 찾아가 볼 생각입니다. 장관님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이야기를 엿듣고, 몰래 지켜보았던 지구인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대문 밖에서 벌거벗겨져 혼자 울고 있던 아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홍등가로 향했던 세 청년은 지금도 술을 마시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낄낄대고 있겠죠? 설탕 가루를 코로 집어넣었던 멍청한 두 사내는 여전히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을까요? 

 처음 저는 지구인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온전히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전 보고서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지금은 그들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름의 발전은 아닐까요?


장관님.

 그들과 헤어지고 난 후, 눈을 감아 보았습니다. 살결을 스치는 바람과 내리쬐는 햇볕이 느껴졌지만, 앞은 캄캄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모든 것이 어쩌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바라보았던 것들. 떼 지어 날아다니던 새의 무리, 밤하늘을 빛내던 별,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석양, 나뭇잎, 회색의 건물, 길게 뻗은 나무, 하늘, 신호등, 제가 만났고 스쳐 지나간 모든 지구인 그리고 저 자신. 이 모든 것이 다 거짓은 아닐까요? 심지어는 이런 생각마저 해보았습니다. ‘R600이 정말 존재하는 걸까?’

 눈을 감아도 들려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직 의심의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면 의심의 여지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해도 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력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질 수도 없다면 모든 것은 거짓일 수도 있을까요? 

 하지만 여전히 사랑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만약 그것마저 없었다면 정말 모든 것에 속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R600은 너무나 요원하지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거짓이 아닙니다. 


                                                                                                                      ensoph 드림



1-11


“응. 알겠어. 금방 들어가. 아직 일이 좀 밀려서……. 금방 들어갈게.” 검은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전화를 끊고 코트 안주머니에 휴대전화를 푹 찔러 넣었습니다.

“뭐라고 하셔?” 초록색 짧은 머리의 여자가 물었습니다.

“응? 별말 없었어.” 검은색 코트의 여자가 말했습니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습니다.

“우리 그냥 어디 해외라도 나갈까?” 초록 머리 여자가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해외? 갑자기 해외는 왜?” 검은 코트의 여자가 물었습니다.

“그냥……. 답답해서. 잠깐 바람이라도 쐬고 올까?” 초록 머리 여자는 힘없이 대답했습니다.

“회사는?” 검은 코트의 여자가 물었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떠나서 일요일에 돌아오면 되지.” 초록 머리 여자는 끓고 있는 찌개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럼 집에는 뭐라고 하고?” 검은 코트의 여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 일일이 내가 다 해줘야 돼?” 초록 머리 여자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넌 뭐가 맨날 그렇게 충동적이야?” 검은 코트의 여자도 언성을 높였습니다.

“충동적이라고? 내가 언제? 난 이제 말도 못하니?” 초록 머리 여자도 언성을 높였습니다.

“그만하자. 이런다고 뭐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검은 코트의 여자는 숨을 골랐습니다.

“밥이나 먹고 가라고. 그 코트도 좀 벗고, 쫌! 사람 불안하게 왜 그래?” 초록 머리 여자는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나 진짜 집에 들어가 봐야 해. 며칠째 야근 때문에 새벽에 들어갔단 말이야. 자기야. 오늘은 먼저 들어갈게.” 검은 코트 여자가 차분히 대답했습니다.

“이것만 먹고 들어가. 집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먹고 가.” 초록 머리 여자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 검은 코트의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서서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자기야, 진짜 이렇게 사람 힘들게 할래?” 검은 코트의 여자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습니다.

“내가 힘들게 한다고? 힘들게 하는 게 누군데? 지금까지 이렇게 질질 끈 게 누군데 그래?” 초록 머리 여자는 상대의 눈을 노려보았습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회사까지 그만두고 이 지랄을 떨고 있는데? 응? 입이 있으면 말해봐.” 초록 머리 여자의 음성이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응? 말해보라고. 너 처음에 나한테 뭐라고 했어? 다 정리하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어? 근데 벌써 그게 1년째야.” 초록 머리 여자는 흥분에 휩싸였습니다.

“…….” 검은 코트의 여자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알겠어. 네가 안 하면 그냥 내가 할게.” 초록 머리 여자는 씩씩거리며 말했습니다.

“…….” 검은 코트의 여자는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내가 한다고!” 초록 머리 여자가 소리치며 말했습니다.

“자기야.” 검은 코트의 여자는 나지막이 상대를 불렀습니다. “자기 자꾸 이럴 거야? 감정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닌 거 자기도 잘 알잖아.”

“감정적? 그럼 너는?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할 건데?” 초록 머리 여자가 눈을 부릅뜨며 물었습니다.

“일단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두자. 응? 내일 차분하게 다시 얘기해.” 검은 코트의 여자는 상대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니! 싫어. 나 이제 더는 못 기다려.” 초록 머리 여자는 빨간색 체크무늬 외투를 손에 들었습니다.

“자기야. 잠깐만 기다려봐!” 검은 코트의 여자가 상대의 손을 잡았습니다.

“놔!” 초록 머리 여자는 상대의 손을 뿌리치며 외투를 입었습니다.

“잠깐만 앉아봐. 응? 일단 얘기 좀 하자.” 검은 코트의 여자는 문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얘기? 얘기는 지금까지 충분히 했어. 이젠 더 못 기다려.” 초록 머리 여자는 상대를 밀치고 나가려 했습니다.

“알겠어. 그래. 그럼 우리 여행 가자. 이번 주말에 일본이든, 홍콩이든, 어디든 가자!” 검은 코트의 여자가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여행?” 초록 머리 여자가 피식 웃었습니다. “그럼 그다음엔? 내가 모를 줄 알아? 넌 항상 이런 식이야.” 

“자기는 너무 자기 생각만 한다.” 검은 코트의 여자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내 생각만 한다고?” 초록 머리 여자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야. 나도 쉽지 않아. 난 가정이 있어. 자기처럼 그렇게 자유로운 몸이 아니야.” 검은 코트의 여자는 시종일관 차분한 음성을 유지했습니다. “나는 남편도 있고, 애도 있어. 자기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그럼 난 뭔데? 내가 네 장난감이야? 너 나 가지고 노는 거니?” 초록 머리 여자는 정색했습니다.

“자기가 더 잘 알잖아. 아니라는 거…….” 검은 코트의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아니, 난 잘 모르겠어. 이젠……. 나도 어쩔 수 없어.” 초록 머리 여자가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자기야. 자기가 이런 식으로 하면 나도 어쩔 수 없어.” 검은 코트의 여자가 두 눈을 살짝 감으며 대답했습니다.

“뭐가 어떨 수 없다는 건데? 응? 너 지금 뭐라는 거야?” 초록 머리 여자는 다시 언성을 높였습니다. 

“자기가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이제 못 봐. 더 이상…….” 검은 코트의 여자는 어렵게 말을 이었습니다.

“하하하!” 초록 머리 여자는 비틀거렸습니다. “결국, 이런 거였구나.”

“자기야, 그러니까 내 말 듣자. 응?” 검은 코트의 여자는 다시 한 번 상대를 달래려 했습니다.

“…….” 초록 머리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주방으로 향했습니다.

“자기야…….” 검은 코트의 여자가 상대를 불렀습니다.

“나가!” 초록 머리 여자가 짧게 상대의 말을 끊었습니다.

“…….” 검은 코트의 여자는 잠시 상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힘없이 뒤돌아 문을 열려고 했습니다.

“아!” 짧은 외마디 비명이 터졌습니다.

“내가 가질 수 없으면, 없는 게 나아…….” 초록 머리 여자는 중얼거렸습니다. 

검은 코트의 여자는 문 앞에 푹 쓰러졌습니다. 

초록 머리 여자의 떨리는 손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습니다. 여자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대며 한참을 비틀대더니 쓰러진 상대의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제 다 끝났어. 괜찮아.”


조명이 꺼지고 지구인들은 박수갈채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무대 위에 조명이 들어오자 두 여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관객들을 바라보고 인사를 했습니다.


장관님.

극장은 어두웠습니다. 그렇게 크지도, 그렇다고 숨이 막힐 정도로 작지도 않습니다. 지구인은 돈을 내고 이 공간으로 뭔가를 관찰하려 들어갑니다. 객석이 어두워지면 무대 위가 빛납니다. 그리고 지구인이 나타나 행동을, 말을, 웃음을, 울음을 보여줍니다. 객석은 숨죽여 그들을 주시하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이 종료되면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그들이 찾으려 하는 건 무얼까요? 또 그들이 보여주려 하는 건 무얼까요?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걸까요? 

지구별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엔 이유가 존재하고 목적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행동과 말과 희로애락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이제야 비로소 해보게 되었습니다.

장관님의 말씀대로 저는 이곳을 지켜보는 관찰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보고서를 쓸 뿐입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말이지요.

                                                                                                                                 ensoph 드림



1-12

“봐봐! 자!” 짧은 머리의 사내는 입을 크게 벌렸습니다.

“여, 여기 왼쪽 아, 아래. 보여? 진짜 아팠어. 치과는 무서버.” 사내의 말투엔 애교가 잔뜩 섞여 있었습니다. “우리 그런 의미에서  치맥이나 먹으러 갈까?” 

“뭐? 오빠, 의사가 뭐라고 안 했어? 술 마시면 안 된다고?” 유난히 하얀 얼굴에 눈이 커다란 여자는 두 눈을 크게 치켜뜨며 말했습니다.

“당연히 마시지 말라고 하지. 의사들이 하는 말이 다 그런 거니까 뭐. 괜찮아. 가자! 응?” 짧은 머리 사내는 여자의 눈을 피했습니다.

“오빠…….” 여자는 무슨 말을 하려 했습니다.

“야, 진주야. 그나저나 내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까?” 남자는 여자의 말을 가로챘습니다.

“얼마 전에 경수랑 진짜 대박 사건을 하나 터뜨렸거든. 그 새끼가 갑자기 대마초를 피우고 싶다나 뭐래나. 담배도 물리고, 술도 지겹다고……. 네덜란드인 같은 소리나 하고……. 흐흐흐!” 남자가 웃었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그 새끼가 하는 말이 설탕을 곱게 빻아서 코로 들이마시면, 아 왜 영화에서 보면 그렇게들 하잖아. 본 적 있지? 그렇게 하면 뿅- 간다더라고. 근데 그게 말이나 되냐고. 그런데도 이 새끼가 자꾸 우기는 거야. 그래서 뭐……. 우리 집에 가서 한 번……. 해봤거든.” 남자는 은근한 목소리를 만들었습니다.

“경수 이 새끼 집에 들어가자마자 숟가락으로 설탕을 열라게 빻는데, 그걸 니가 봤어야 하는데. 그래서 아무튼 밑져야 본전이니까 한 번 해봤지 뭐. 근데, 이게 진짜 효과가 있는 거야. 뭔가 순간적으로 뿅- 가는 기분이 아주 그냥 죽이더라고. 아니, 근데 난 마약 같은 건 싫어서 다신 안 할 거야. 마약 같은 건 루져들이나 하는 거지. 하여간 그 새끼 대가리엔 뭐가 들었는지.” 남자는 말을 마치고 살짝 여자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오빠…….” 여자는 남자를 나지막이 불렀습니다.

“응?” 남자의 얼굴엔 웃음과 긴장감이 교차했습니다.

“오빠가 지금 그럴 때야?” 여자가 내뱉었습니다.

“내가 지금 이럴 때라니? 그게 뭔 말이야?” 남자가 물었습니다. 

“오빠 지금 대학원 졸업하고 한 게 뭐가 있어? 벌써 이 년째야. 맨날 말로만 ‘구한다, 자리 잡는다, 다 됐다, 조금만 기다려라.’ 하는데 그래, 지금까지 오빠 응원하면서 기다리는 거 힘들다고 생각 안 했거든? 근데, 이제 좀 지친다. 오빠. 경수 오빠나 오빠나 똑같아.” 여자의 목소리는 아주 약간 높아졌습니다.

“야! 오진주. 내 친구는 건드리지 마라.” 남자는 목소리를 낮게 깔았습니다.

“뭐? 하아…….” 여자가 한숨을 쉬었습니다. “오빠야. 나 힘들어. 지친다고…….”

“아니 그러니까 치킨 먹으러 가자고. 치킨에 맥주 딱 때리면 힘 팍! 난다니까.” 남자가 입을 벌려 말을 내뱉을 때마다 여자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습니다.

“한숨 쉬지 마. 내가 한숨 쉬는 거 제일 싫어하는 거 알아, 몰라?” 남자는 정색하며 다시 입을 벌려 말을 내뱉었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눈을 들어 한참 동안 가만히 남자를 바라보았습니다. 미동도 없이 말입니다. 

“왜?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남자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남자를 바라보았습니다.

“야. 우진주! 너 갑자기 왜 그래?” 남자가 다시 입을 벌렸습니다. “너 오늘따라 왜 자꾸 트집을 잡고 난리야? 그날이야?”

“오빠……. 나 나쁜 년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여자가 드디어 침묵을 깼습니다.

“뭐? 너 지금 그게 뭔 소리냐? 너 지금 나 무시하는 거냐? 하아……. 얘 진짜……. 너, 오늘 왜 그래?” 남자의 얼굴은 상기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빠가……. 아니다. 오빠가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그런 걸 바란 내가 미친 년이지.” 여자는 다시 한숨을 쉬었습니다.

“너, 너 딴 새끼 생긴 거냐?” 남자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습니다.

“김동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한 번 말해봐!” 여자의 두 눈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너가 오늘따라 자꾸 이상하게 트집을 잡고 그러니까……. 미안…….” 남자의 동공이 다시 흔들렸습니다. 

“진주야. 조금만 더 기다려봐. 내가 지금 취직을 못 해서 일을 안 하는 게 아니잖아. 오라는 곳은 많은데 조건이 맞아야 가지. 내가 왜 조건 따지겠냐? 다 너 손에 물 안 묻히게 하려고 그러는 거 아냐. 왜 그걸 모르냐?” 남자는 팔을 뻗어 여자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여자는 남자의 손을 뿌리쳤습니다.

“조건? 오빠가 지금 조건 같은 거 따질 때야? 아니, 나 지금까지는 오빠 믿으려고, 이해하려고 노력 정말 많이 했는데, 오빠한테 좀 질려. 진짜 진절머리가 나. 맨날 음악이네, 영화네 하면서 경수 오빠랑 모여서 술이나 마시고. 오빠가 나 정말 고생시키지 않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그러고 있는 게……. 이해가 안 돼.” 여자는 흐르려는 눈물을 손등으로 얼른 훔쳤습니다.

“야, 내가 언제 너 고생시킨 적 있어? 내가 너한테 언제 돈을 빌려달라고 하디, 아니면 차를 사달라고 하디? 뭐 내가 언제 너 뭐 못 사준 거 있었어? 말해봐!” 남자는 여자를 쏘아보았습니다.

“그거 다 용돈 받아서 쓰는 거잖아. 오빠는 오빠 부모님께 미안하지도 않니?” 여자도 남자를 노려보았습니다.

“야! 거기서 왜 부모님 얘기가 나와? 내가 용돈을 받던, 돈을 훔치던 그게 너랑 뭔 상관이냐고.” 남자가 다시 입을 벌려 말을 뱉었습니다. “그리고 네가 뭘 안다고 내가 듣는 음악 얘길 하고 난리야, 난리는. 기껏 해봐야 싸구려 대중음악이나 들으면서 눈물이나 찔끔거리는 주제에…….뭘 안다고…….” 

“오빠. 나 이제 좀 오빠한테서 자유롭고 싶다.” 여자는 남자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뭐? 내가 언제 너 구속했니? 자유는 무슨……. 너 요즘 무슨 책 읽어? 너 맨날 연애소설만 보잖아. 네가 자유가 뭔지 알고서 하는 소리니? 야! 그리고 나처럼 쿨한 사람이 어딨어? 너 회사에서 사람들이랑 술 마신다고 내가 언제 뭐라고 한 적이 있냐, 아니면 친구들이랑 놀러 간다고 해서 가지 말라고 한 적이 있냐? 너 다른 놈들이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그래? 내가 다른 놈들처럼 바짝 쪼여줘야지 정신을 차리겠냐?” 남자는 다리를 꼬아 삐딱한 자세로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오빠……. 나 오빠 만나기 전이 더 행복했던 거 같아.” 여자가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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