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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인철 Feb 09. 2021

봄날은 간다


비탈진 언덕, 마구잡이로 엉켜있는 것 같은 빌라촌에 새벽이 찾아왔다. 아직은 어둡지만 곧 해가 뜰 것이다.

금자의 지하방은 어둡고 축축했고 추웠다. 이틀 전 혹독한 추위가 기어코 그녀의 보일러를 부숴버렸다. 금자는 몇 번이고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두꺼운 이불에 덮인 금자의 부은 두 다리와 굳어가는 어깨 그리고 구부러진 손가락 관절은 오늘 아침 금자를 더욱 힘들게 할 것이다.

여섯 시. 알람이 울렸다. 

‘얼마나 추울까’ 금자는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기가 망설여졌다. 

이불을 젖히자 방 안 가득했던 냉기가 그녀의 몸으로 달려들었다. 금자는 체념한 듯 눈을 감고 바르르 떨었다.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녀를 한 번 더 좌절시켰다. 차갑게 굳은 손으로 차가운 물을 받아 퉁퉁 부은 얼굴을 씻어내고 주름진 얼굴에 싸구려 로션을 찍어 바르고 하나밖에 없는 외투를 걸치고 낡은 운동화를 신고 식당으로 향했다. 



“아줌마. 여기 반찬 좀 더 주세요!”


점심시간 금자의 일터는 분주하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되는 점심 장사 준비가 끝나면 의자에 잠시 앉아 숨 돌릴 틈도 없이 손님들이 몰아닥친다. 하지만 금자는 이곳이 좋았다. 일이 시작되면 아팠던 관절은 부드러워졌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바쁘게 움직이기만 하면 시간은 어떻게든 지나갔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었다. 비슷한 또래의 친구 같은 미숙, 화장기 없는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소연, 마지막으로 아르바이트생 진우가 그녀와 함께했다.

정신없이 지나간 점심 장사 시간은 마지막 설거지와 함께 끝이 났다. 구석의 테이블에 둘러앉은 넋 나간 네 명의 직원들을 위해 식당 주인 내외는 늦은 점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뭐 드실래요?” 백발의 사장이 직원들을 번갈아 바라본다.

“오늘은 시원한 국수 같은 거 먹었으면 좋겠네요.” 자기주장이 확실한 미숙이 목에 걸린 앞치마를 빼면서 무심하게 대답했다.

“시원한 국수라… 다들 괜찮아요? 시원한 국수라… 여보! 우리 동치미 담근 거 아직 남아 있지? 동치미 국수 어때요? 제육 거리도 남아 있으니까 같이 먹으면 되겠네. 진우야. 가서 소면 좀 사와라.” 메뉴가 정해지자 백발의 사장은 신이 난 것 같았다.

“네… 몇 개 사 오면 돼요?” 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치마를 벗었다.

“여섯 명이니까 두 봉지만 사 오면 되지 않을까?” 사장은 진우에게 카드를 건넸다.

“네 알겠습니다.” 진우는 계산대에 앉은 여자 사장에게 카드를 받아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소연아.” 미숙이 개어 놓은 앞치마를 테이블에 올리며 말했다.

“주문받으면 먼저 물통부터 테이블에 갖다 주라고 몇 번을 말하니?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다 순서가 있는 거고, 동선이 있는 건데, 애가 정신머리가 없어.” 

“갖다 준 거 같은데.” 소연이 낯을 붉혔다.

“갖다 주긴 뭘 갖다 줘. 아까도 몇 번이나 손님들이 물 달라고 하는 거 못 들었어? 그거 다 네가 받은 테이블이야.” 미숙의 호흡이 빨라졌다.

“얘! 그만해. 소연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금자가 한 손으로 구부러진 손가락을 주무르며 말했다.

“언니!” 미숙이 억울한 표정으로 금자와 소연을 번갈아가며 쏘아보았다.

“금방 적응하겠지.” 금자는 계속해서 손가락을 주물렀다.

“금방이 벌써 몇 개월인데… 얘, 너 소연이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어?” 미숙이 소연에게 물었다.

“거의 3개월… 이요.” 소연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거봐, 언니. 3개월이면 유치원 애들도 벌써 외웠겠다. 그렇지?” 미숙이 금자를 보았다.

“그만해. 누가 완벽하다고. 너도 그렇잖아. 주문서에 ‘김치찌게’ 아니라고 몇 번을 얘기해도 계속 그렇게 쓰면서 뭘 그래.” 금자가 살며시 웃었다.

“언니! 그게 여기서 왜 나와. 그게 그거랑 같아?” 미숙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니까 그만하라고. 사장님이 너 먹고 싶은 국수 해주신다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금자가 타이르듯 조용히 말했다.

“소연이 너 아무튼 내가 지켜볼 거야. 알겠지?” 미숙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소연에게 말했다.

“네.” 화장을 한 소연의 작은 얼굴이 씰룩댔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라.” 계산대에 앉아 있던 여자 사장이 벌떡 일어났다.

“여보! 나 은행 간다는 걸 깜빡하고 앉았었네. 금방 다녀올게요. 다들 먼저 식사하고 계세요. 나 은행 간다는 걸 잊고 있었지 뭐야.” 여자 사장은 숱이 무성한 긴 생머리를 뒤로 묶고는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다녀오세요” 금자는 문을 열고 나가는 여자 사장의 뒷모습에 인사했다.

주방에서는 물 끓는 소리와 고기 볶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식탁을 앞에 두고 마주 앉은 세 명의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반나절 음식 냄새를 맡다 보면 식사시간이 한참 지나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금자의 몸은 다시 굳어갔고 지긋지긋한 통증이 시작됐다. 


“다녀왔습니다.”

진우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수고했네. 우리 진우” 진우를 보는 미숙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한편 금자는 진우를 살갑게 대하지 못했다. 진우를 보면 얼마 전 이혼한 아들의 젊은 시절 모습이 자꾸 떠올라 금자의 가슴을 들쑤셨다.

“그러게. 추운데.” 금자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닙니다.” 진우는 굽은 손을 주무르는 금자를 보며 웃었고 진우와 눈이 마주친 금자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 아줌마.” 진우가 금자 곁에 다가와 앉았다.

“응?” 금자의 몸이 경직됐다. 

“저기.. 저희 엄마 생신이 내일인데…” 진우는 어렵게 말문을 열고 바로 말끝을 흐렸다. “뭘 사드려야 할지…” 

“어이구. 우리 진우 기특하네. 아직도 엄마 생일을 챙기고. 우리 아들은 지 여자 친구 뒤꽁무니 따라다니느라 내 생일은 안중에도 없는데… 얼마나 좋을고. 진우 어머니는. 이렇게 훌륭한 아들을 둬서.” 미숙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장갑 사드리세요. 장갑” 소연도 끼어들었다.

“얘, 장갑은 무슨. 촌스럽게. 장갑 말고 스카프 같은 거 사다 드려. 봄 되면 스카프 두르고 어디라도 가시라고.” 미숙이 소연의 말을 잘라버렸다.

“장갑도 괜찮고… 스카프도 괜찮네요.” 진우가 웃으며 말했다.

“화장품도 괜찮을 거 같은데…” 주연은 진우의 웃는 모습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요즘 화장품이 얼마나 비싼데 그러니? 그리고 진우 너 엄마가 무슨 화장품 쓰시는지 알아?” 미숙이 다시 주연의 말 꼬투리를 잡았다.

“아니요.” 진우가 대답했다.

“거봐. 화장품은 좀 그렇고. 진우야 엄마한테 편지는 쓸 거야? 카드라도 말이야. 사실 엄마들은 선물보다 그런 게 더 좋은데. 그리고 현금. 오호호호” 미숙이 박수를 치며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었다.

“스카프도 비싼데... 근데 편지는 괜찮은데 현금은 좀 그런 거 같네요.” 주연이 미숙의 웃음소리에 입술을 쭉 내밀며 말했다.

“현금이 뭐 어때서? 괜히 쓰지도 않는 거 사 가지고 오는 것보다 현금이 훨씬 낫지 뭐.” 미숙은 정색했다.

“그나저나 진우야. 넌 엄마 생일을 외우고 있는 거야?” 미숙은 앉은자리에서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기지개를 크게 켜며 물었다.

“아니요. 엄마가 본인 생일이 가까워지면 계속 얘기하시거든요. 까먹을 수가 없어요.” 진우는 멋쩍게 웃었다.

“너희 엄마도 특이하시다. 얘, 난 우리 아들한테 내 생일 얘기 못하겠던데.. 이상하게 나이 먹을수록 그런 얘기 하는 게 힘들어지더라. 언니는 언니 아들이 생일 챙겨줘요?” 미숙은 아까부터 말이 없는 금자에게 물었다.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고 살면 다행이지.” 금자가 대답했다.

“그래. 지들 앞가림이나 잘하고 살면 그걸로 된 거야. 그게 정답이네.” 미숙이 금자의 말에 맞장구쳤다.



“자! 식사 나왔어요. 가져들 가세요” 사장이 주방에서 흰머리 쑤욱 내밀었다.

“어머나! 맛있겠다.” 주연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사장님. 잘 먹을게요” 미숙과 금자가 동시에 말했고 진우는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냈다.

“많이들 자셔요. 오늘도 수고 많았는데.” 사장은 젖은 손을 앞치마로 닦으며 말했다.


한때 엔지니어였던 사장의 요리 솜씨는 훌륭했다.

그는 요리를 했고 그의 아내는 나머지 식당의 관한 모든 일을 담당했다. 이곳엔 직원이 한 번 들어오면 좀처럼 바뀌는 일이 없었다. 금자도 이곳에서 일을 시작한 지 벌써 2년이 넘었고 미숙은 그보다 좀 더 됐다. 주연이 오기 전에 일하던 복자라는 아줌마는 목욕탕에서 넘어져 고관절이 부러지는 바람에 일을 그만두게 됐다. 일이 쉬운 건 아니었지만 함께 애쓰며 정이 들어갔다. 식당을 운영한 지 7년째 되는 백발의 사장도 작년 봄, 하지정맥류 수술을 받았던 터였다. 하루 종일 불 앞에 묵묵히 무거운 조리도구들을 다루는 사장의 얼굴에 해가 다르게 주름이 늘어갔다. 


동치미 국수는 정말 맛있었다. 젓가락질이 점점 빨라졌다. 

“근데 사장님. 사장님은 사모님 생일 언젠지 알아요?” 하얀 소면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미숙이 물었다.

“네?” 백발의 사장은 놀란 듯 미숙을 쳐다보았다.

“그럼요. 우리 집사람 생일이 5월… 10일이었던가? 근데 갑자기 그건 왜요?” 사장이 물었다.

“아까 우리 앉아서 생일 얘기하고 있었거든요. 진우 어머니가 내일 생일이라고 해서 얘기가 나왔거든요.” 미숙은 집어 든 국수를 입에 넣었다.

“그렇구나. 내일이 진우 어머니 생신이시구나.” 사장이 진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네.” 진우는 겸연쩍은 듯 테이블에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았다.

“언니는?” 미숙이 금자에게 물었다. “언니는 언니네 엄마 생일이 언제지 알아? 난 우리 엄마 생일이 크리스마스 이브라 외우기 쉽거든.”

“나?” 금자가 머뭇거렸다.

"응.. 우리 엄마..." 

“난 우리 엄마 생일이 언젠지 모르는데.” 

백발의 사장이 국수를 휘적거리며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엄마는 집을 나갔어요. 봄이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엄마가 없더라고요. 며칠을 학교도 안 가고 집에서 엄마를 기다렸는데 돌아오지 않으시더라고요… 그 날이 잊히지가 않아요. 꽃피는 봄이었는데… 내 봄날은 그렇게 가버렸네요.”

백발의 사장은 국수 그릇을 한 손으로 잡고 남은 동치미 국물을 한숨에 들이켰다. 

아무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늙었는데도 이상하게 그날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백발의 사장이 빈 국수 그릇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중얼거렸다.



금자의 부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굽어진 손가락이 다시는 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백발의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고, 우리 마누라 눈 다 맞겠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식당 창문 너머로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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