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보의 이야기
화요일 아침, 승강장으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온 사람들은 각자가 원하는 출입문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2분 뒤면 열차 한 대가 비대해진 몸을 이끌고 어두컴컴한 동굴을 빠져나올 것이다.
‘07시 58분 출발, 08시 42분 도착’
승강장 안전문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선 강보는 운이 좋으면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 출근을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해보았다. 휴대폰으로 열차의 도착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 뒤로 길게 늘어선 줄을 힐끔 보았다.
긴 승강장을 따라 안내방송이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하나 둘 고개들 들었다.
열차가 들어오고 안전문이 열리고 무표정한 얼굴들이 들어 찬 열차의 문이 열렸다. 무겁고 후끈한 공기가 귀 끝에 와 닿았다.
출입문을 막고 선 사람들을 보자 자신도 모를 한숨이 삐져나왔다. 몸을 치대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일은 곤욕스럽고 불쾌했다. 아무도 않지 않은 노약자 좌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지만 그는 열차의 양 끝이 맞닿은 공간에 자리를 잡았고 지하철 내벽에 등을 기댈 수 있다는 사실에 평정심을 되찾았다.
강보는 등에 맨 가방을 앞으로 돌려맸다. 무거운 열차가 힘겹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강보는 늘 그렇듯 망망대해를 가로지르는 고래의 뱃속에서 점점 소화되어 녹아내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결국 이렇게 시작돼버린 하루를 맥없이 받아들였다.
열차를 가득 메운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기분일까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축 늘어진 얼굴이 이미 많은 걸 얘기해주고 있었다.
지잉, 지잉
바지 주머니 속에 넣어둔 휴대폰의 진동이 상념에 빠진 강보의 허벅지를 자극했다. 출근 전부터 구매 관련 서류를 재촉하는 최 과장의 카톡 메시지에 그의 엄지손가락이 잠시 화면 위를 배회했다.
‘과장님! 지금 출근 중이라 도착하는 대로 바로 드리겠습니다.’
눈꺼풀과 관자놀이 사이를 쿡쿡 찔러대기 시작한 두통이 하루 종일 그를 괴롭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기분은 엉망이 됐다. 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양쪽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관자놀이 주변을 세게 눌러보았다.
최동현 과장이 대리였던 3년 전, 갓 입사한 강보는 업무처리가 능숙하지 못했고 실수가 잦은 신입사원이었다. 처음 3개월 간 최대리는 별 말없이 무관심한 마음으로 강보를 대했다. 하지만 강보의 무능력은 계속해서 최동현 대리의 무관심을 자극했고 지금의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최대리도 처음엔 주변 동료들과 강보의 무능력과 멍청함을 조용히 소곤대며 비웃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상황이 달라졌다. 최대리의 분노와 멸시의 표현은 거칠고 직접적이었다.
‘강보 씨, 너 같은 사람들을 보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이런 일 하나 제대로 처리 못하는데 씨발… 도대체가 이 좆같은 회사는 사람을 어떻게 뽑는 거야?’
강보는 자신의 무능함을 자책하기도 했고, 최대리의 대가리를 야구방망이로 뭉게 버리는 꿈을 꾸기도 했다.
소화불량과 두통 그리고 불면증의 시간을 묵묵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강보는 최동현 과장의 싸늘한 시선을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게 됐다.
끼기 끼—익
열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리고 들어오고, 무겁고 답답한 공기가 채 빠져나갈 새도 없이 무정한 문이 닫혀버렸다.
강보는 다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한 손에 휴대폰을 움켜쥔 채로 지하철의 군중에 섞여 한참 동안 인스타그램이 쏟아내는 사진들에 집중하던 강보의 눈에 알 수 없는 생기가 돌았다.
위잉. 쿠 쿠-국 쿠국, 쿠국쿠 국. 열차가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그녀는 단 한 장의 사진으로 그를 사로잡았다.
검은색 터틀넥 위로 살짝 올라간 입꼬리와 작지만 오뚝한 콧날, 깊고 투명한 눈동자는 잘 그려진 그림처럼 조화로웠다. 강보의 심장은 마치 누군가 열어주길 간절히 애원하며 세차게 두드리는 문짝처럼 심하게 요동쳤다.
강보는 그녀의 사진을 바라보며 절대적으로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그는 이미 자신이 작고 징그러운 벌레로 변해버렸다는 걸 알아챘다. 아름다움과 조우할 때면 언제나 그는 양 팔과 두 다리를 쭉 뻗어 납작 엎드려 온순한 벌레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면 아름다움은 다정한 손길을 내밀어 그의 부서진 영혼을 보드랍게 어루만져주었다. 그는 절정 속에서 기쁨과 해방감을 느꼈고 변모하려 꿈틀거렸다. 작은 벌레는 언제까지나 작은 벌레로 남아있지 않았다. 생명의 숨결과 같은 손길로 벌레는 순식간에 나비가 되어 가벼운 날갯짓을 하였다. 그는 수천 번 벌레가 되었고 나비가 되어 허공에 날아올랐다.
한쪽 구석에서 은은한 꽃 향기가 퍼졌다.
강보는 정신을 차렸다.
곧장 그녀의 계정을 팔로우했다. 원하면 언제든 타인의 삶을 구경하는 것은 멋진 일이라 생각하며 그의 팔로잉 리스트에는 또 하나의 새로운 아름다움이 추가됐다.
게시물 91, 팔로워 1128, 팔로잉 125.
그는 숫자들을 가만히 보았고 동시에 안도와 실망을 했다. 그녀가 수십만 명의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된 유명인-강보는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아름다움에는 어떠한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 이 아닌 것은 다행이었지만 1128명은 그녀가 갖은 매력에 당위성을 부여하기에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라고 생각했다.
강보는 아름다움이 본질적으로 어둠을 밝히는 빛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정한 대상에 뿌리를 두고 기생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 대상의 변화에 따라 성질을 달리한다. 하지만 빛과 아름다움은 따로 떨어져 스스로 존재하기에 비록 그것이 시간 속에 있을지라도 언제나 새로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움과 빛은 뻗어나가며 주변의 기운을 끌어당기고 집중시킨다는 것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강보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의 사진을 한 번 더 주의 깊게 보았다. 분명 그녀는 더 많은 숫자의 팔로워를 갖기에 충분히 아름다웠다. 아직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에게 어떤 숨겨진 비밀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강보의 이러한 집착은 회를 거듭할수록 심해졌는데, 그는 몇 번이나 아름다움에 홀려 되도 않는 수작을 부려 보기도 했다. 한 번은 징그럽고 조잡한 시 같은 메시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당연히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빛을 향해 달려든 나비의 날개는 불타올라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고 가련한 몸뚱이는 땅에 떨어져 버둥거렸다. 하지만 또 다른 아름다움은 꿈틀대는 벌레에게 부드런 숨결을 새롭게 날아오를 생명력을 불어넣어주었다.
강보는 우선 그녀의 최근 사진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업데이트된 날짜와 그들의 간격, 촬영된 장소, 동행인의 유무 등을 확인하며 머릿속으로 천천히 그녀를 더듬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에 게시된 사진은 무광의 검고 넓적한 바닥재 위에 쭉 뻗은 그녀의 다리였다. 반대편 커다란 창문으로 떨어진 길게 누운 자연광에 아이보리색 단화와 물 빠진 청바지가 도드라져 보였다. 그는 오른쪽 검지로 휴대폰 화면을 톡 하고 쳤다. 한남동의 어느 카페, 동행인은 없었다. 사진은 이틀 전 수요일에 올려졌다. 그는 곧바로 포털사이트를 열어 지난 화요일과 수요일의 날씨를 찾아보았다. 그 이틀간 서울엔 비가 내렸다. 이어 지난 주말 날씨를 검색했다. 화창했다.
주말에 혼자 카페에 앉아 사진을 찍고 그것을 게시하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그녀도 그와 같은 외로운 존재이기에 누군가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다고 결론 내린 강보는 카페에 앉아 사진을 찍는 그녀에게 다가서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강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최 과장의 얼굴과 컴퓨터 앞에 앉아 의미 없이 보낼 무기력한 하루의 무게가 조금은 가볍게 느껴졌다. 그는 당장 사진 밑의 하트를 눌러 자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진 밑의 132명이 좋아합니다-는 개수작이었다. 지금부터 그의 주적은 좋아요를 누르고 답글을 다는 놈팡이들이었는데 때때로 이런 개수작이 어떤 고리를 만들어 인연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연은 알 수 없는 일이었기에. 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강보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훑어보았다. 비슷한 표정의 크고 작은 검은 머리의 남자와 여자. 그는 주위의 휴대폰을 힐끔거렸다. 짙은 회색 양복의 남자는 드라마 시청하고 있었고 옅은 회색 양복의 남자는 메시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는 열차 가득한 검은 머리들의 인스타그램을 상상해보았다. 무표정한 얼굴 뒤에 어떤 걸 숨겨두었을까. 멍청한 표정으로 휴대폰에 열중한 이들이 다른 공간에선 또렷한 눈빛과 행복한 얼굴로 또 다른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어 그는 앞서 지나간 만원 열차와 뒤따라 올 육중한 열차를 떠올렸다. 강보의 머릿속에서 검은 머리들은 계속해서 늘어나 수많은 얼굴로 가득한 거대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 덩어리가 매일같이 어딘가에서 지겹도록 일을 하는데도 불경기가 지속된다는 건 좀처럼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결국 그 덩어리는 손이 닿지 않는 등짝에 들러붙어 피를 빨며 몸집을 키우는 거머리를 도저히 떼어낼 수 없었던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생각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종류의 생각이 도착하는 곳을 알고 있었다.
머리카락에 붙은 거미줄을 떼어내듯 고개를 심하게 흔들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맞은 편의 여자가 눈을 치켜세웠다. 출근길 지하철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항상 조심해야 한다.
열차가 정거장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한 무더기가 빠졌고 빠진 만큼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강보는 휴대전화를 꺼내 또다시 그녀의 계정 안으로 들어가 화면에 엄지 손가락을 대고 위로 올리며 사진들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들, 은은한 조명 아래 반짝이는 것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생경한 곳과 가진 적 없는 건강하고 행복한 육체들에 그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찍은 사진 하나에 시선이 고정됐다.
테이블 위에 놓인 갓 착즙 한 것 같은 오렌지주스가 담긴 유리컵 두 잔 뒤로 파란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오렌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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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함께 마시는 오렌지주스는 올해도 굿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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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캘리포니아. 굿굿.
커걱. 커걱- 커-걱 커어 걱.
열차가 속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정거장을 확인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자석같이 달라붙은 육체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 겨우 출입문 앞에 섰다.
정면 유리창에 비친 고개 숙인 검은 머리들 위로 몇 마리의 나비가 날아다녔다.
오전 8시 42분
열차가 멈추고 출입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