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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인철 Jan 26. 2021

탈출기


-Omnes Viae Romam Ducunt-




추위가 누그러진 주말 밤 산책을 나서본다. 한동안 걷지 않아서일까. 다리 뒤쪽 근육이 기분 나쁘게 저리고 발목이 아팠다. 마스크를 쓴 개천을 따라 사람들은 걷고 뛰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은 걷는 것이 최고다. 그리고 곧바로 잡념의 개천에 빠져버린다. 



로마의 더러운 길바닥이 익숙해져 갈 때 즈음 문을 열고 집 근처 이곳저곳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소유한 것은 밤새 말아 둔 담배와 두 다리뿐이었다. 은근한 두려움이 묻은 걸음으로 우선 집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길바닥에 흩뿌려진 담배꽁초와 개똥 가득한 집 앞 길을 따라 성당이 있었고 가정집들이 빼곡하였다. 조금 더 가본다. 간판의 의미를 알 수 없으면 유리창 너머 상점 안을 들여다본다. 세탁소, 키오스크, 담배가게, 중국음식점, 젤라또 가게, 피자가게 등등 새로운 세계가 나와 따로 존재했다. 

차츰 행동반경을 늘려간다. 우회 없이 직진으로 다다를 수 있는 한 곳까지 갔다가 맞은편 길로 뒤돌아오기도 하고, 골목골목을 휘젓고 돌아다니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사람 구경을 한다. 길을 걸으며 담배를 피우는 발걸음은 한결 가볍다. 그리고 아주 작은 카페에 들어가 보았다.

“본조르노. 운 카푸치노” 검지 손가락을 치켜들어 카푸치노 한 잔을 주문한다.

“카푸치노. 노. 포메리죠” 바싹 마른 주인아저씨가 뭐라고 한다.

“쏘리” 치켜든 검지 손가락을 귀에 가져가서 빙빙 돌리고 손을 내젓는다.

“오케이. 운 에우로” 석연찮은 표정으로 검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돈을 받아낸다.

가게를 나오며 큰소리로 가장 자신 있는 단어를 말한다.

“챠오. 그라찌에 밀레”

“챠오” 


행동반경이 넓어질 대로 넓어진 나는 지명도 역사적 의미도 모르는 로마의 골목골목을 걷고 또 걸었다. 로마의 봄은 담배꽁초와 개똥까지 의미 있게 만들어 버린다. MP3에 가득 채워진 음악들을 반복하여 듣고 또 듣고 풀밭에 앉아 밤새 말아 둔 담배를 피우며 나 자신 속으로 들어가 머리를 처박는다. 

이제는 길을 걸으며 (의식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두리번거리는 동양인은 관광객이야. 나는 아니란 말이야. 그러니 얕잡아 보지 말라고. 이탈리아 말도 좀 할 줄 아니까 뒤에서 낄낄거리면 면상을 후려갈겨버려 주마.’


카푸치노는 아침에 마시는 커피라는 걸 알게 되고, 집 근처의 중국식당과 피자집에 몇 번 가게 되었을 때 나는 로마를 탈출하려고 했다. 타국에서 턱도 없는 대가리를 싸매고 해독 불가능한 칠판의 필기체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내 노트에는 날짜만 쓰여 있었다. 전과목 낙제. 탈출을 도모하던 어느 날 축구 경기 마지막 1분을 남기고 혼자(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넘어져 발목이 부러졌다. 덜컹거리는 이탈리아 구급차에 실려 다리가 아파 죽겠는데 구급대원들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이름이 뭐야?”

“인철 강”

“뭐라고”

“인꿀 캉그”

“뭐?”

“줘, 내가 써줄게”

“너 어디 사람이야?”

“한국”

“여기 왜 왔어?”

“공부하러”

“무슨 공부”

“철학”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철학?”

“응, 개새끼들아, 그게 다리 부러진 거랑 무슨 상관이냐”라고 하고 싶었지만 할 줄 몰라 “응”만

“뭐하다 다쳤다고”

“축구, 이 새끼들아 니네가 축구 운동장까지 구급차 몰고 왔잖아”라고 하고 싶었지만 몰라서 “축구”만

“잘해?”

“아니”

흐흐흐

“2002년 너네가 우리 게임 훔친 거야. 알지?”

“알겠다. 이 거지 같은 새끼들아”라고 하고 싶었지만 몰라서 “알겠다.”만

낄낄거리던 두 명의 구급대원 새끼들을 뒤로하고 응급실에 들어온 시간이 오후 9시. 진료를 받고 엑스레이를 찍은 시간은 새벽 3시. 

새벽 다섯 시가 되자 앳된 얼굴의 의사 한 무더기가 늙은 의사와 함께 복도 의자에 누워 잠들어버린 나를 흔들어 깨웠다.

“갑시다”

“네?”

“석고 발라야죠”

젊은 무리 중 하나가 나를 휠체어에 앉혀 수술실로 데려갔다. 그와 내가 앞장섰고 모두가 줄줄 따라왔다.

‘얘네들이 왜 따라오는 거지?’

늙은 의사는 엑스레이를 보며 젊은 의사들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거 같았고 젊은 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퉁퉁 부운 발목을 돌려보기도 하고 쿡쿡 찔러댔다. 

지금까지 골절 환자가 없었단 말인가.

늙은 의사는 발목에 석고를 바르며 쉬지 않고 설명을 했다. 심지어 젊은애들 몇 명에게 석고 바르는 일을 권유했고 실제로 그들이 내 깁스를 마무리했다. 빌어먹을 젠장.


로마 대탈출은 수포로 돌아갔고 3개월 후에 깁스를 풀고 로마 거리를 다시 쏘다녔고 2학기에는 또 낙제를 받았다.



나는 이방인의 길 위에 서서 그곳을 탈출하려 걷고 또 걸었지만 그 길은 전부 로마로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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