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페츄니아를 짓밟은 거인」, 자아실현의 소중함

: 작 테네시 윌리엄스

by 포도상점

희곡 「페츄니아를 짓밟은 거인」 - 테네시 윌리엄스 작

러닝타임 40분

배우 총 6명 (여자 2명, 남자 2명, 성별없음 2명)






이 작품은 서울대학교의 동아리 공연에서 처음 알게된 극이다. 극을 보고 흥미를 느껴서 희곡도 보게되었고, 짧으면서도 내용이 알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에서의 이름은 <The case of crushed Petunia>로, 거인이라는 말은 안 들어가 있었다. 이런 부분에서, 한국에서는 거인을 상징하는 남성의 역을, 원작에서는 상황 그 자체와 주인공 여성에게 포커스를 맞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필자는 극을 보기 전에는 페츄니아가 뭔지 몰랐고, 후에 찾아보니 '당신과 있으면 마음이 편해집니다'라는 꽃말을 가진 꽃이었다. 나름 꽃도 극과 결부된 의미가 있었다.


성격이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는 여성 주인공인 도로시가 순경에게 누군가 본인의 화단의 페츄니아를 짓밟았다며, 어서 범인을 잡아달라고 말한다. 순경은 귀찮은 듯 대하고는 밖으로 나간다. 이때 손님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작은 구멍 외의 큰 뚫린 벽에서 청년이 들어온다. 무작정 걸어 들어오고 털썩 앉아버리는 청년의 태도에 비해서 도로시 심플의 태도는 그렇게 쌀쌀맞아 보이지는 않는다. 청년도 그런 도로시의 모습을 아는지 도로시에게 '나갈까요?'라고 말하는 등의 짖궂은 장난을 친다.


이때 덜 부인이 찾아와서 청년이 먼저 달라고 했던 빨간 양말 한 켤레를 달라고 하는데, 남은 빨간 양말은 하나 뿐이었으므로 빈 손으로 돌아가게 된다. 도로시가 청년이 같이 있는 탓인지 빨리 돌려보내려고 재촉한 것도 있어서, 덜 부인은 돌아가면서 죄없는 본인에게 히스테리를 부린다며 비난한다. 도로시 또한 돌아간 덜 부인에게 '콩알만한 키의 펑퍼짐한 몸매, 얼굴엔 늘 불만이 가득한 여자'라고 하며 비난한다.


청년은 이런 도로시에게 덜 부인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더불어 청년은 두고랑의 페츄니아로 장막 혹은 벽을 치고 있었다고 말한다. 도로시는 청년의 발 사이즈가 화단에 새겨진 발자국과 똑같음을 알아챘을 때, 청년이 페츄니아를 짓밟은 범인이라고 확신한다. 이에 도로시는 매우 분노하며, 순경을 불러서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말하고 집 밖을 나서려고 한다. 하지만 이내 그만둔다. 그 모습을 보고는 청년은 그녀는 자신에게 매혹되어서 그만둔 것이고, 페츄니아를 짓밟은 것은 본인 혼자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직후에 의미 심장한 말을 한다.


할 수 있으면 해 주세요. 아마 대답할 수 없으실테지만요. 질문은 이렇습니다. 모든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고는 세상의 대부분은 죽은 것이고, 생명은 매우 소중한 것이며, 그것을 알아야한다고 도로시에게 말한다. 그러고는 알게 해줄테니 하이웨이 77번가로 오라고 한다. 도로시는 믿을 수 없다며 거부하다가 청년은 알아서 하라며 나가려하고, 도로시는 계속 망설이다가 간다고 말한다. 이에 청년은 그곳에서 할 일정에 대해서 말해주는데, 사이프레스 힐이라는 공동묘지로 갈 것이라고 말하고, 거기서는 죽은 사람이 최고의 충고를 해준다고 말한다.


살라, 살라. 그들이 아는 건 오직 그 말 뿐이예요. 그것이 그들의 사전속에 남은 유일한 단어거든요.


아무나 듣지는 못하지만, 본인은 확실하게 들을 수 있다는 말과 페츄니아 없이 살수 있도록 될것이라는 청년의 말에, 끝내 설득당하며 청년과 만남을 약속한다. 이후에 카나리아의 응원과 함께 하이웨이 77번가로 힘차게 나간다.


어? 정말 키가 크고 날씬하시네요?
뭐라구?
정말 미인이시라구요.


희곡의 큰 특징점은 두 가지 정도로 보인다. 첫번째로는 다양한 추상성이고, 둘째로는 카나리아이다.


페츄니아는 그녀에게 소중한 존재였지만, 동시에 그녀를 속박하는 존재였다. 그녀의 가게 앞을 둘러싸서 매우 향기롭고 아름다운 느낌을 주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를 차단하고 그녀를 가게 안에 가두는 존재였던 것이다. 가게는 작은 구멍으로만 손님과 소통할 수 있으며 필요한 물건도 곧잘 없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작은 구멍은 도로시가 그나마 소통하는 창구로써 최소한으로만 열어진 그녀의 마음이다.


이때 청년이 등장하면서 모든게 뒤바뀐다. 가게에는 이상하리만큼 큰 구멍이 있었다. 왜 있는지 모를 이 구멍에서 청년이 등장한다. 말도 안되는 등장임에도 도로시는 내심 싫어하지 않는다. 추후에 청년에게 희망을 얻고서 밖을 나갈때야 비로소 이 큰 구멍이 도로시의 숨겨진, 세상과의 소통에 대한 갈망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남자가 들어와서 정말 무작정 들어와서 앉고, 그녀에게 말을 건다. 이런 상황이 충분히 말도 안되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도로시는 나가라고 하지 않는다. 되려 청년이 나간다고 말하면 아무말 못하는, 굉장히 수줍어하고 또 청년이 없어지기를 싫어하는 눈치이다. 이 부분이 매우 흥미로운데, 필자는 청년이 자유와 자신감의 형상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과 벽을 쌓아놓고 지내면서도 갈망하는 도로시의 집에 들어오니 너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일 것이다.


페츄니아를 밟아 없앤 범인이 청년임이 밝혀져도 도로시는 내쫒지 못한다. 그리고는 되려 질문받는다. 모든 것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말이다. 여기서 모든 것은 세상이다.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말에 도로시는 어이가 없지만 듣고 싶어한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그녀는 왜 계속 듣고싶어 하는 것인가? 그것은 그녀가 세상에 대해서 몰라서가 아님을 반증한다. 완전히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알 필요도 없다. 특히나 이런 철학적인 이야기들에서는 더 그렇다. 그녀는 세상에 대해서 알고 싶었지만, 집을 둘러싼 페츄니아를 보고서는 마음이 생겨도 만족이 된 것이다. 그것이 없어져야 비로소 자아실현의 욕구가 생긴 것이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하고, 살자 라는 말을 들은 도로시는 코앞에 자유와 미지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주저한다. 이는 그녀 스스로 그래도 되는가? 라는 내적 질문이다. 여기서 청년은 계속해서 되묻는다. 그녀가 망설일때마다 말을 끊고 묻고, 강력하게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게 한다. 과격해보일 수 있지만, 필자가 보았을 때는 상냥한 길잡이로 보인다. 그녀는 내면의 자신감에 불을 지피고 싶어하는데, 불이 잘붙지 않는 것이고, 청년은 단지 불을 지펴줬을 뿐인 것이다.


청년이 나가고 하이웨이 77번가로 나서려고 하니 길을 모른다. 경찰도 비아냥대듯 그곳에 가면 절대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다. 하이웨이 77번가는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집 문 밖일 것이다.


이러한 많은 상징성을 관객들에게 표현할 수 있고, 다양한 방법이 보인다. 무대 자체가 그녀의 마음으로 표현되게 해서, 최초에는 어둡다가 나중에 밝아지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고, 관객과 소통하는 창구를 마지막에는 완전히 열어놓고 덜부인을 만나게 된다는 등의 표현도 생각이 난다.


뿐만 아니라 독백에서는 다양한 극적인 표현을 통해서 아름답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독백은 매우 추상적인 말들이 이어지나, 그 내용이 하나의 얘기만을 하고있다. 그래서 매우 시적임에 비해서 전달성은 크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되려 시적인 부분과 함께 많은 추상적인 행동과 포인트를 집어 넣는다면 더 다채로워질 것이다.


마지막 부에는 음악소리가 나오면서 도로시가 여러가지 감정에 휩싸인다는 지시문이 보인다. 이 곳에서는 정말 연출가의 역량이 중요할 것이다. 정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고, 완전히 반대로 춤을 출수도 있을 것이다. 앞 내용과 인과성이 돋보이게 될수록 더 멋진 부분이 될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 희곡의 포인트인 카나리아다. 카나리아는 1과 2가 있는데, 정말 표현하기 나름이고 어려운 도전일 것 같은 부분이다. 카나리아의 대사는 극 중간중간에 첨언의 형식으로 짧게 나온다. 극의 흐름이 깨지지 않도록 어떻게 넣을지가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카나리아의 말은 도로시가 듣지 못한다는 설정이 있어보이지만, 맨 마지막에 밖을 나서기 직전에는 카나리아의 말을 듣고 용기를 얻어서 나간다. 카나리아는 그녀에게 무엇이었을까? 그녀의 마음 속, 숨은 꿈이 아니었을까?


기승전결이 확실하고 열린 결말인 듯 열리지 않은 결말이다. 내용 자체의 해석이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 같지만, 표현 방법과 참신한 상징성의 표현 방법으로 많은 가짓수가 나올 것 같은 작품이다. 다만 내용의 길이가 그렇게 길지는 않으니 깊은 여운을 남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무대로 올라간다면 그만큼 짧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듯한 작품이 될 것 같다.


상징성이 매우 많이 느껴지는 만큼 이것은 필자가 생각난 비유인데, 희곡 마지막 페이지에서는 자신만의 꿈을 가진 도로시가 페츄니아라는 사랑하는 부모님에게서 벗어나 카나리아라는 꿈의 목표를 가지고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 처럼 보였다. 극을 읽어보면 어떤 게 느껴질 지는 사람마다 제각각일 것이다.



W. 에디터 아마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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