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원 고질병,항공성 치매

EP.비행일기

by 꼬마승무원

승무원으로 일하고나서 생긴 고질병이 있다. 그건 바로 제목에서 알려줬듯이,'항공성 치매'이다. 이 항공성 치매는 왜 인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심해지는 느낌이다.

'항공성 치매'란,모든 크루들이라면 한 번쯤은 겪게 되는 고질적인 병 아닌 병(?)이다. 바로 비행기에 타서 일하는 동안 일어나는 사소한 일이든 무언가를 요청한 승객의 얼굴 등을 잊어버리는 것. 이것이 항공성 치매이다.


이 항공성 치매는 승무원을 난감하게 만들 때도 있지만,승객과 승무원을 빵 터지게 만들어서 참 웃픈 상황들을 만들어낸다. 마치 인간 대 인간으로서 겪는 사람 정나미가 물씬 느껴지는 순간이라 해야할까? 유니폼으로 무장한 승무원 역시 '아,쟤도 사람이지.' 라고 승객들이 느끼는 찰나의 모습이겠다. 나의 경우에도 승객과 서로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지어낸 일이 한 두번이 아니다.

항공성 치매가 화룡점정을 이루는 순간은 서비스가 다 끝나고 Lull Period (쉬는시간)일 때이다. 그나마 서비스 중간에 승객들의 요청이 들어오면 종이에 적어서 크루들끼리 공유를 해서 괜찮다.

쉬는 시간에 비행기 복도를 이리저리 다니면서 정리를 하고,승객들에게 불편한 점은 없는 지 확인하다가 갑자기 권투선수의 잽이 훅 들어오는 것 같은 요청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한 명 밖에 없으니까 괜찮지'하고 딱히 적지 않고 머릿 속으로 기억을 하고 갤리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마치 나한테 홍염살,도화살이 미친듯이 끼었나싶을 정도로 지나가는 나를 붙잡고 두 세명이 더 Ad hoc(애드혹,요청)을 말한다. 갑자기 한 번 들어와서 피한 잽이 연달아서 두 세번은 훅 들어오는 것과 같은 이 당황스러움을 재빨리 미소로 감추고서는 내 머릿 속은 요청사항들이 어떤 것이었는 지 재빨리 외워가면서,가득찬 채로 도망가듯이 갤리로 헐레벌떡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다.

다행히 머릿 속으로 주문을 외우듯이 잘 외운 탓에 모락모락 피어날 뻔한 1차 항공성 치매를 물리친 우리의 꼬마승무원. 완벽하게 여러가지 요청 사항들을 외워서 준비한 우리의 자랑스러운 꼬마승무원은 그렇게 복도를 나왔지만,안타깝게도 그녀가 넘겼던 항공성 치매가 여기서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그건 바로 애드혹 요청을 한 승객들의 좌석과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는 마법에 걸린 것. 순간 속으로 '아이씨...누구였더라. 여기 근처였던 것 같은데...' 라면서 열심히 승객들의 옷차림과 특징들을 기억해내면서 그 쪽을 서성서성인다. 제일 화룡점정으로 힘든 순간은 바로.... 깜깜하게 어둑해져서 불이 다 꺼진 기내에 그것도 인도인 승객들과 서양인 승객들처럼 동양인의 눈으로 봤을 때 얼굴 구분이 어려워서,그 사람이 그 사람같이 느껴지는 비행일 때이다. 그렇게 어슬렁 어슬렁 거리다가 드디어 찾아낸 승객. 그렇게 머쓱하게 서로 눈이 마주쳐서 허허...라면서 멋쩍은 웃음을 서로 지은 채로 나는 승객의 요청이 담긴 애증의 음료,간식 등을 건네주고서는 빨리 자리를 뜬다.

항공성 치매는 다양하게 찾아온다. 내가 앞서 말한 에피소드 이외에도 캐빈 내에서 승객이 요청사항 한 것을 분명 내 입으로 기억하겠다면서 알겠다고 해놓고서는 그렇게 멀지도 않은 갤리에 들어와서는 "에? 아까 승객이 뭐 해달라고 했는데 뭐였더라?" 라고 한 1분도 안되어서 까먹은 적도 많다. 순간 "내가 뭐하려고 여기 왔더라?" 라는 심각한 치매가 찾아오기도하고,심지어 비행이 끝나고나서 얼마 안되어서 랜딩 하자마자 "내가 지금 다녀온 비행이 어느 나라,어느 섹터의 비행이더라?"하는 기적의 치매가 찾아오기도 한다. 심지어 크루들끼리도 예의상으로 말하는 "너 다음 비행 어디로 가?" 라고 물어봐서 분명히 다음에 예를 들어서 '런던'에 간다고 들어놓고서는,얼마 안가서 다시 "너 다음 비행 어디로 가?" 라고 또 물어보는 기적의 도돌이표 항공성 치매도 부지기수다.

이 항공성 치매가 왜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지는 느낌인지는 정말 모르겠다. 그래서 전직 승무원들이랑 선배들이 승무원으로 일하면서 뭔가 바보가 되는 순간이 많아진다면서 하소연했던 것이 이런 이유때문이었을까싶다. 이런 웃픈 항공성 치매마저도 간혹 승객과 나 사이에 있는,사람 냄새가 풍기는 재밌는 에피소드이지만,참 씁쓸하다. 마치 바보가 되는 느낌이랄까. 혹시 이런 항공성 치매가 왜 발생하는 지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면 내게 알려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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