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린에세이> 2026 1,2월호 게재
새벽에 눈길을 같이 걸어와 아들을 떠나보내고
어머니는 어떤 심정으로 돌아갔을까.
이청준의 소설 <눈길>은 그 마음을 열어 보인다.
눈 쌓인 새벽길을 함께 걸어와 아들을 버스에 태워 보내는 모정은 <새벽길>과 동일하지만, 그 사연이 한층 복잡하고 애달프다.
이 사연은 아들로서는 잊고 싶었고, 어머니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으므로, 깊숙이 봉인된 채 17, 8년이 흘렀다.
소설은 이 곡절의 실체가 드러나기까지 여러 가지 의아한 상황을 제시하며 긴장을 쌓아간다.
아내와 함께 여름 여행을 겸해 고향에 내려왔으면서 하루를 지내고는 바로 다음 날 돌아가겠다고 마음을 먹는 일, 어머니를 ‘노인’이라 칭하며 공연히 퉁명스러운 것, 또 “내게 빚은 없었다.” “노인에 대해 빚이 없다는 사실만이 내게는 중요했다.” 등, ‘빚’에 대한 강박, 그리고 “빌어먹게 비좁고 음습한 단칸 오두막”을 더 비좁게 만드는 ‘옷궤’를 유독 거북스러워하는 까닭들이 그것이다.
이 의문들은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어머니가 이제껏 “맘속으로만 지녀온” “진짜 심경”을 토로하면서 해소된다.
그것은 아들을 떠나보낸 후 혼자 돌아갈 때의 이야기이다.
이의 발단은 주벽으로 형이 전답과 선산, 집까지 팔아넘긴 일이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으로 K시에서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던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집을 찾아온다.
집은 텅 비어 있고 식구들은 간 곳이 없었다.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어디선가 어머니가 달려와 그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간다. 저녁을 지어 먹이고 함께 밤을 지낸 뒤 다음 날 새벽에 길을 나선다.
알고 보니 아들에게 마지막 밤을 지내게 해주고 싶어 새 주인의 양해를 얻어, 아들이 올 때까지 매일 먼지를 털고 걸레질을 하며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 집을 지켜온 흔적으로 이불 한 채와 옷궤를 그대로 남겨 두었다.
이후 그가 옷궤를 볼 때마다 “액면가 없는 빚문서”처럼 여기는 것은 이날이 떠올라서이다.
자고 일어나니, 눈이 많이 내렸으나, 처지가 부끄러워 이들 모자는 새벽 눈길을 나선다.
시오리나 되는 장터 차부까지 눈 쌓인 산길을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간다.
날이 밝기 전 차부에 도착했고 그는 바로 버스를 타고 떠났다.
그러므로 어머니가 그 후 어떻게 길을 되돌아갔는지 아는 바가 없으며, “한사코 기억의 피안으로 사라져 가주기를 바라” 묻지도 않았다.
아내의 집요한 유도 질문에 의해 드디어 밝혀지는 어머니의 심경은 허망함과 아픔, 그리고 자식 사랑이다.
차가 아들을 태우고 가버린 후, “넋이 나간 사람마냥 어둠 속에 한참이나 찻길만 바라보고 서 있”었고, 돌아가는 눈길에 “둘이 걸어온 발자국만 나란히 이어져 있”는 것을 보고 눈물을 뿌리며 갔던 것이다.
아들의 발자국만 따라 밟으며
이 장면은 시종일관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 “아득하고 차분한 음성” 어떤 상황에도 “심기를 흩트리지 않”는 태도였던 어머니의 애끓는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17, 8년이 지나서야 털어놓은 어머니의 이야기는 아픔과 부끄러움, 간절함이 뒤섞여 봇물 터지듯 흘러나와, “눈꺼풀 밑으로 뜨겁게 차오르는 것”을 억누르기 어려운 그와 울먹이는 아내를 휘감고 독자의 마음까지 먹먹하게 적신다.
아울러 “매정스런 아들”로 보였던 그의 언행이 그날의 뒷일이 빚덩이로 남아 있기 때문이며 무력한 자신에 대한 모멸감 때문임을 짐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