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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혜경 Mar 07. 2024

균열의 순간

박엘리야의 수필 <길 잃은 자>를 읽고  

좋은 수필은 잔잔하던 마음의 수면에 균열을 낸다. 

안온함에 빠져 있던 정신을 벼락 치듯 내려치기도 하고, 소리 없이 가만가만 다가와 살며시 흔들어 놓기도 한다. 


박엘리야의 <길 잃은 자>(<<계간수필>> 2024 봄호)는 이 균열의 순간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외국의 절에서 겪은 일을 바탕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서 촉발된 사유의 세계로 초대한다. 


절의 노승이 작가에게 영어로 건넨 말 “너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구나.”라는 ‘예상 밖의 문장’은 “내가 길을 잃었나?”라는 질문을 끌어내 곰곰 음미하게 한다. 


그 결과 길을 잃은 게 아니라, “그저 가야 할 길이 없는 것”이란 결론에 이른다. 

“염원할 것도, 염원할 곳도 없다.” 

목적지가 없으므로 “소원도 의무도 없”으며, 따라서 “자유롭다.” 


바라는 것도 없으며 의무에서도 자유롭다는 것은 진정한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롭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사유의 과정은 차분하면서도 생생하게 묘사된 장면을 따라 흐르며 깊어진다. 

길 잃은 것처럼 보여 작가에게 말을 건네고 밥을 먹었는지 챙기는 노승, 금박에 오색진주로 치장한 불상들, 식사 시간이 지나 깨끗이 치워진 식당에서 다시 차려준 음식을 먹는 작가, 빼곡하게 소원이 적힌 노란 천이 달린 빨간 풍등들. 


이 장면들은 작가의 사유를 입어 사유와 한 몸이 되어 다가온다. 


제 몸에 “번쩍거리는 것들이 둘려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는 듯” 입매가 “평온”해 보이는 불상들은 물질과 치장의 무의미함을 일깨우고, 풍등에 달린 천을 채우고 있는 ‘개개인의 바람이 적힌 글자들’이 무거워 보였다는 서술은 소원이 없는 작가의 자유로움을 떠올리게 하므로.   


그런 까닭에 무심히 읽고 넘어갔던 첫 문장 “육중한 나무 문을 열었다.”는 다시 읽을 때 둔중한 울림을 준다. 




이 문은 절의 문을 의미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 안에 굳게 닫혀있던 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래서 문을 열고 나갔을 때,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어로 외쳐서 당혹스러웠지만 사실은 작가가 길 잃은 것처럼 보여 마음 쓰는 노승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고, 그 끝에 잊었던 무언가가 떠오를 수 있고, 인식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데일리한국> 2024.3.4 게재 

https://daily.hankooki.com/news/articleView.html?idxno=1058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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