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신애의 수필 <빨래 널기>에 대해
글의 제목은 글의 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소재나 주제를 함축한 제목이 있는가 하면,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제목도 있다.
이신애의 <빨래 널기>는 평이해 보였던 제목의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가 도사리고 있는 글이다.
“까마귀는 아무 때나 울지 않는다. 그런데 “악-” 하는 소리에 잠이 깼다.”
첫 문장부터 ‘빨래’라는 일상적 행위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비명소리에 깬 작가가 둘러본 방의 풍경은 위태롭다.
“산을 거의 수직으로 깎고” 들어선 아파트, “운하처럼 깊어”진 도로, “집과 산 사이에 갇혀서 우물 속의 징처럼” 울리는 소리 등.
이어지는 꿈속 장면도 ‘가파른 석회암 절벽’과 운하, 갑자기 뛰어내리는 사람이 등장해, 불안으로 채색된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이 불안의 정조는 유년의 기억에서도 발견된다.
심심해서 교회에 갔는데, 성서 내용을 알 수 없다는 사실에 “물 위에 떠 있는 부평초같이 불안했”고, 봄이 되면 들머리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마음은 “혼자 버스를 타고 읍내를 서너 바퀴 돌아 덕숭산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곤 했던 아이였다.
독자의 내면에도 불안이 번져갈 즈음, 드디어 ‘빨래 널기’가 등장한다.
친구와 나무에 올라가 “쭉 뻗은 가지에 다리를 걸고 팔을 늘어뜨린 후 해파리처럼 흐늘거렸는데 멀리에서 보면 나무에 빨래를 널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곧 친구와의 놀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빨래 널기’의 실체를 드러낸 후 바로 친구를 만날 수 없게 된 사실을 서술하고 있어, ‘빨래 널기’는 친구와의 행복했던 시간이면서 친구의 부재를 상기시키는 아픔임을 보여준다.
왜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마지막 장면’을 설명하지 않음으로써(아마도 못함으로써), 상상을 유도하는 한편으로 슬픔을 강하게 부각한다.
“‘빨래’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아려서 양말이나 손수건을 주물거리다 꼭 짜지 못해 흘러내리는 물만 보아도 어느덧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어도 작가는 여전히 슬픔 속에 있다.
“나무에 올라가고 싶”지만 “나무에 걸터앉거나 높은 곳을 쳐다보는 건” 할 수 없다.
‘빨래’와 나무는 친구를 향한 그리움이면서 회피하고 싶은 이율배반적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움과 회피가 뒤섞인 마음 아래에는 ‘마지막 장면’을 “초기화 format 할 수 없는” 사랑이 놓여 있다.
이는 선명한 비유와 이미지로 묘사된 장면들로 배열되어 ‘색색으로 이어 붙인 조각 이불처럼 각각이면서 하나’인 글로 완성된다.
이 이불의 이름은 불안이란 외양 아래 흐르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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