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수필>의 정신과 미학
근원의 글에서 짐작할 수 있는 성향은 이상을 추구하면서 스스로에게 엄격한 점이다. 이에 따라 자신의 작품이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기에 부족하다는 자각이 여러 글에서 나타난다.
젊은 날, 그는 “누구보다도 큰 뜻을 품었었고 누구보다도 로맨틱한 공상에 파묻힌 사람이었다.
미래파, 입체파, 표현파 등 형형색색의 그림들을 그려보기도 하고 그곳에서 기필코 새로운 표현양식을 발견해 보려고 노력도 했다.” 그러나 그의 “괜한 우울은 내 예술의 발전을 방해”해 원하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예술의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는 자괴감은 비하에 가까운 자기 희화화로 표현되곤 한다.
<검려지기>에서 “평생 남의 흉내나 겨우 내다가 죽어버릴 인간이라 근원(近猿)이라고도 했”다가 ‘園’으로 고친 일화와 ‘검려’라는 호에 대한 일화가 나타난다. ‘검주의 나귀’ 이야기에서 ‘나를 풍자하는 일면’을 느낀다고 하면서, “나도 이 나귀처럼 못생긴 인간인가! 나도 이 나귀처럼 못생긴 재주밖에 못 부리는가.” 자책하며 끝맺고 있는데, 희화적 묘사 이면에 깃든 슬픔을 느낄 수 있다.
<게>에서는 게를 즐겨 그린다는 이야기에 곁들여 화제(畫題)로 쓴 윤우당의 시구를 인용한다.
“창자 없는 게가 참으로 부럽도다/ 한평생 창자 끊는 시름을 모른다네”라는 시구에서 게와 자신의 동질성을 끌어내어 한탄하는데, 이는 우리 민족에 대한 비탄으로 확대된다.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원인이 “내 소갈머리가 좁고 답답한 탓인지, 공교롭게 타고난다고 난 것이 요런 시기에 걸려든 것인지” 모른 채, ‘멍청이처럼 멍하고 그날그날을 지내는 판’이라는 서술은 식민지 시대 부자유함이 미치는 괴로움을 암시한다.
‘나’가 ‘우리’라는 주체로 확대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울분을 끄적거린 결과가 수필로 탄생했으므로, 그의 울분은 예술 창작의 자양분인 셈이기도 하다.
“고독은 뛰어난 정신을 가진 사람의 운명”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근원의 미적 감수성의 기저에는 고독과 우울이 깔려 있다.
이십 전후 나이에 “아무것도 아닌 일에 걸핏하면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라고 고백한 것에서 패기와 유희정신을 지닌 청년의 이면에 도사린 외로움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럴 때면 나는 흔히 책을 읽고 그림을 그렸다.” “한동안 고독한 가운데서 서책을 탐독하고 화필을 희롱한 후이면 어쩐지 그 외롭던 심사가 사라지고 배부른 듯 도도한 여유를 느끼게 되면서 내 편에서 도리어 남이 청치 않는 쾌활을 뽐내보기도 하는 것이었다.”(<고독>)
그런데 이 외로움이 “낫살이 들면” 사라져 버리는 줄 알았는데 “작금 양년으로 들어서 어인 셈인지” “다시금 바짝 외로워짐을 느낀다.”라고 토로한다.
“인격적 수양이나 예술적 토대가 부족한 데서 느껴지는 것일까.” 의문문으로 끝나는 이 문장에서 표현하지 못한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비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1939년 8월에 발표된 글임을 미루어 볼 때, 시대에 대한 울분을 표출하기 어려운 데서 오는 외로움이 깊었던 것 아닐지...
‘괜한 우울’이 예술의 발전을 방해했다고 자책하고 있지만, 이는 한편으로 근원의 예술을 낳은 원동력이 된다.
외로움을 느끼면 책을 읽고 그림을 그렸고 울분으로 수필을 썼기 때문이다.
“이 우울이 나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고 글을 읽게 하며 부단히 내 불량심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선부자화상>)
아울러 이러한 성향은 삶과 사물, 시대와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이 성찰의 힘은 뛰어난 관찰력을 더해 삶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글로 탄생한다. 못난 사물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에 관심을 갖는 근원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 해학적 장면이라 할지라도 둔중한 울림을 경험하게 된다.
행랑살이 문 앞이나 쓰레기통 옆에 함부로 심어져 있으나 “씩씩하게” 피어나고, “깡통 속에서 자배기 쪽 속에서” “아무런 불평 없이” 개성을 발휘하는 구와꽃을 존경하며, 못생긴 두꺼비 연적을 아끼는 마음에서 고독에서 빚어진 사유를 읽을 수 있다.
특히 못생긴 두꺼비 연적을 사랑하는 이유가 ‘고독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서술, “가끔 자다 말고 버쩍 불을 켜고 나의 사랑하는 멍텅구리 같은 두꺼비가 그 큰 눈을 희멀건히 뜨고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가를 살핀 뒤에야 다시 눈을 붙이는 것이 일쑤다.”란 마지막 문장은 그의 고독감이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져 오래도록 잔영이 남는다.
** 서울문학광장 주최 주관
<고전에게 길을 묻다 2> 발표 2024.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