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희 <섬에 들다>를 읽고
이름은 한 사람의 삶의 지향점을 함축시킨,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라고 할 수 있다.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몸짓’에 지나지 않던 존재는 의미 있는 ‘꽃’으로 거듭난다.(김춘수 <꽃>)
그래서 아기의 이름을 지을 때, 그 삶이 순탄하고 가치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담아 짓기 마련이다.
그런데 네 살짜리 오빠가 이웃집 아기 이름을 부른 게 호적에 올라갔다면? 그마저도 온전하게 불리지 못하고 ‘파란 대문집 막내딸’ ‘000 동생’으로 불렸다면?
이춘희의 <섬에 들다>는 아들이길 바랐는데 다섯째 딸로 태어나 환대받지 못했던 아이가 이름을 찾고자 애써온 삶의 기록이다.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결혼 후에는 자식을 위해 자신의 꿈을 접어야 했던 수많은 여성 서사의 계보에 들어갈 수 있는 이야기를 이춘희는 ‘아무도’ ‘아직도’ ‘그래도’라는 표현을 활용해 자신만의 서사를 인상적으로 완성시킨다.
“아무도” 관심 주지 않는 환경에서 “그래도” 주저앉지 않고 “아직도” 남은 꿈을 펼치는 여정은 ‘노력–성취-좌절-다시 노력’의 구조로 이어진다.
일찌감치 ‘내가 나를 가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아무도’의 땅을 비집고 죽순처럼 꿈을 내밀었”고, 꿈을 이루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살아왔다.
“밤잠을 장학금과 바꾸고 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해 하루하루를 아르바이트로 채웠다.” “벼르고 별러야 책 한 권 읽고, 영화 한 편 볼 수 있”을 정도의 고투 끝에 ‘000 선생님’이란 뿌듯한 이름을 얻는다.
하지만 아이를 잃을지 모른다는 남편의 노파심으로 어렵게 얻은 이름을 포기한다. 전업주부가 되어 자신의 꿈 대신 아이들과 남편의 꿈을 응원했다.
아이들은 훌륭한 성인으로 자랐으나 자신은 ‘000 엄마’ ‘아줌마’로 살았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묻어둔 꿈을 위해 ‘그래도’에 발을 내딛는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아직도’라는 섬에서 릴케의 시를 읽으며 문장을 엮는 꿈을 꾼다.
그리고 세상이 ‘냉기와 폭염, 가뭄과 센바람’으로 매번 그의 꿈을 막았음에도 분노나 원망 없이 담담하게 서술함으로써, 묵직한 감동의 파동을 일으킨다.
각진 돌이 몽돌이 되기까지, “바닷물에 침식되어도 묵묵히 서 있는” ‘아무도’를 벗어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 인내하고 분투했을지 고스란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자신을 찾는 순례의 끝에서 “나의 주인은 나 자신”이라고 천명한 제인 에어처럼 환대하지 않는 세상에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작가, 거센 물결이 몰려와도, 뒤울이가 몰아쳐도 꿋꿋하게 직면하며 ‘나만의 노래’를 완성하는 꿈을 이룬 “심지 깊은” 작가에게 진심으로 존경과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https://daily.hankooki.com/news/articleView.html?idxno=1132790
(수필 원문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