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나파밸리 여행기

8월 26일, AJ 미디어 루키즈 전이준의 기록

나는 와인이 좋다. 소주보단 덜 씁쓸하고, 맥주보단 덜 배부르고. 위스키를 마실 때보단 더 오랫동안 취기를 유지할 수 있으며 칵테일을 마실 때보단 분위기 내는 데 더 유용하니까. 그래서 종종 친구들이랑 와인 바를 가기도 하는데, 좋아하기만 하지 잘 알지는 못해서 매번 메뉴 판을 보며 한참을 고민한다. 이거랑, 이거랑, 뭐가 달라? 둘 다 레드야?


그래서 신혜린 교수님께서 프로그램 마지막 날 직접 차를 렌트해 나파 밸리로 가는 여정을 계획 중이라 하셨을 때, 꼭, 꼭 참여해야지 다짐했다. 가서 와인도 마음껏 시음하며 더 많이 알아가고, ‘와잘알’(와인을 잘 알다) 교수님, 그리고 2주간 동고동락하며 가족 같아진 멤버들과 함께 저명한 와이너리에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미국에서의 마지막 추억을 위하여.


아침 댓바람부터 비몽사몽 정신줄을 붙잡은 채 서둘러 나갈 준비를 마치고, 7시 50분, 호텔 로비에서 집합했다. 교수님께서 빌리신 차를 타고 달리던 그때까지만 해도 잿빛 하늘에 바람이 서늘해 오후엔 화창해지길 바라며 중간에 들린 스타벅스에서 따뜻한 마끼아또 한잔을 마셨다. 그러고 약 삼사십 분을 더 달려 10시 40분, 이윽고 나파 밸리 진입하였다.  

Bouchon Bakery  

아점을 위해 부숑 베이커리에 들려 배를 채웠다. 들어서자마자 세련된 인테리어와 수많은 디저트 종류에 눈이 바빠 아무래도 ‘부숑’이 아니라 ‘부촌’이라 읽는 것이 맞을 것 같다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샌드위치랑 에끌레어를 다 먹고 11시 좀 넘어 나오니 갑자기 줄이 엄청 늘어나있었다. 사람 적을 때 딱 맞춰서 온 우리의 타이밍에 감탄하며 본격적인 와이너리 투어를 위해 다시 차에 타려는데, 하늘이 놀라울 정도로 파랗게 개있었다. 느낌 좋은 시작, 잘 끼워진 첫 단추.  

Robert Mondavi Winery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로버트 몬다비.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들어가기 전까지 잠깐의 대기 시간이 있었는데, 그동안 바로 옆에 있던 와인 샵을 둘러보았다. 와인 오프너, 와인 가방, 와인 꽂이 같은 소품들도 많았고, 자석 같이 와이너리 방문을 기념할 수 있는 상품들도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중 눈에 가장 띈 건 한 벽면을 가득 채울 만큼 즐비한 여러 종류의 와인이었다. 비로소 와이너리에 온 게 제대로 실감 났다.

고유의 포도밭이 한눈에 담기던 자리로 안내받아 총 다섯 가지의 와인을 맛보았다 – 기본 네 가지에 서비스로 받은 한 잔의 디저트 와인까지. 완벽한 장소, 완벽한 날씨, 혀끝에 맴도는 와인의 완벽한 달콤 쌉싸름함. 이렇게까지 마음 편히, 어떤 불순물도 없이 순도 백 프로 행복한 건 또 오랜만이었다. 오늘이 정말 평생 못 잊을 정도로 좋은 기억이 되겠구나, 싶은 생각이 이때부터 들었다.

V. Satuii Winery  

얼큰하게 취해 두 뺨이 붉어진 채 중세시대처럼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다음 와이너리로 이동했다. 이쯤부턴 뇌의 사고회로가 멈춘 듯 아무런 생각도 없이 신나기만 했던 것 같다. 연신 즐겁다고 외치며 여기서 시음하고 나면 글을 작성할 기억이 남아있을지 모르겠다고 조교님이랑 장난쳤던 게 유독 생각난다. V. 사뚜이에선 굉장히 긴 와인 리스트를 주고, 개인별로 종이에 동그라미 표시를 함으로써 각자 선호대로 다섯 가지 와인을 고를 수 있었다. 시음 순서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각 잔을 마시고 나면 왼쪽 사진처럼 와인 명 옆에 맛있었던 만큼 하트나 웃는 얼굴 같은 기호를 그려놓아야 했다. 귀여운 아이디어라고 느껴졌다.

전부 맛있었지만 유독 기억에 남은 한 가지의 와인이 있는데, 바로 Regina였다. 디저트 와인이라 달콤하겠거니 예상하고 들이켰는데도 그 이상으로 단맛이 진하고 깊었다. 색상도 정확히 황금빛이라 신기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별명이 Golden wine이라고 한다. 두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달았던 이 와인은 쉽사리 그 맛을 잊기 어려울 것 같다.

양질의 대화 시간  

와인 두어 병과 샐러드, 파니니, 파스타 등을 사 들고 교수님의 지인 두 분 – 김규현 교수님과 박영미 선생님 – 을 뵈러 사뚜이 와이너리 내 정원에 자리를 잡았다. 김규현 교수님과는 짧게 케이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요즘 한창 핫한 ‘뉴진스’라는 걸그룹의 인기요인 중 하나가 “nostalgia for things that never existed”이라고 말씀하신 걸 듣고, 꽤나 직관적이고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그 표현이 뇌리에 콱 박혔다. 귀와 눈에 쏙쏙 박히는 음악과 안무뿐 아니라 90년대 아이돌의 스타일링을 적절히 재연한 스타일링으로 주목받는 걸그룹이지만 사실 그녀들에게 주목하는 주요 팬 층은 대부분이 Z세대이기에, 과거를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레트로에 열광한다는 사실이 모순적이라 생각 들었다. 김규현 교수님께서도 이런 의미에서 꺼낸 문구이신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뉴진스뿐 아니라 여러 문화적 방면에서 현 세대가 좇는 복고풍 트렌드를 떠올리게 되었다. 또한 박영미 선생님과는 진로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알맹이 가득한 시간을 보냈는데,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쉽게 털어놓지는 못하는 진솔한 이야기들이 선생님 앞에선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고 싶은 걸 계속하세요” 다정한 격려와 따뜻한 포옹, 그리고 편안한 선생님과의 시간은 사기충전의 기회가 되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수미상관처럼 갑자기 다시 자욱해진 안개를 뚫고 금문교를 달리며 신혜린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헤비메탈 곡을 크게 튼 채 숙소로 돌아간 것까지, 전부 그간의 지친 몸을 달랠 수 있는 힐링 순간들이었다. 생각이 끝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피곤한 성향을 가진 내가 오롯이 순간순간의 즐거움에 집중할 수 있는 날이었다. 행복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혁신의 길목에 선 Udemy를 만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