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충만한 아름다움을 향해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어머 저 사람 예쁘다" "잘생겼네"라고 말하는 게 일상이 된 요즘, 소위 '얼평'의 시대에 우린 살아가고 있다. 보기 좋은 음식이 맛도 좋다는 말처럼 '美'는 무시할 수 없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정형화된 아름다움에 끼워 맞추기 위해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얼굴을 바꾸고, 몸을 치장하며 외모를 가꾼다. 물론 그것이 자기만족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 난 한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정해진 아름다움이라는 게 있을까?"라는 물음이다. 세상에는 여러 미의 기준이 존재한다. 어떠한 사물을 바라보고 그것이 아름다운지 아닌지 생각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건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을 보고 특정 누군가는 예쁘다/잘생겼다 라고 느낄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런 무한 가지 미의 기준 속에서 정형화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은 허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고정된 미의 틀에 자신을 밀어 넣는 것일까?
자존감, 자기만족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난 그 이유가 현대인의 불안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느낀다. 외모도 하나의 경쟁력이 되어버린 요즘 사람들은 다수가 추구하나 결국 허상에 불과한 그 아름다움을 향해 내달릴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수가 좇는 것은 이익의 수단이기에 그것이 자신들의 미의 기준과 일맥상통하든 하지 않든 그것을 향해 무작정 달리는 것이다. 통용된 아름다움의 기준이 바뀌면 사람들은 또 그걸 향해 내달릴 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생존 방법이라 믿기에.
그렇다면 가변적인 미의 기준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난 아름다움을 다르게 정의하고 싶다. '아름다움'은 단순히 예쁘고 잘생긴 것과는 다르다. 아름다움에는 그 사람만이 뿜어낼 수 있는 아우라, 즉 분위기가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단순히 얼굴 그러니까 보여지는 외모만 가꾼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우라는 그 사람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일생 동안 일궈낸 것이다. 예쁨 혹은 잘생김으로 표현되는 외적인 아름다움은 단시간에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특유의 분위기는 그 사람의 인생관이 담겨 있기에 절대 적은 노력과 시간으론 불가능하다.
난 나만의 아우라를 가진 사람이고 싶다. 고정된 미적 기준으론 감히 평가할 수 없는 나만이 가진, 나만이 표출해낼 수 있는 그 힘을 가진 사람이고 싶다. 각자의 충만한 아름다움이 미의 기준이 된다면, 아무도 어떤 정해진 형태의 아름다움을 추종하지도 맹목적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바꿔나가진 않을 것이다.
자신의 에너지로 일궈낸 아름다움, 그것이야말로 진정하고 더 충만한 아름다움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