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인문학에 대한 갈증을 느끼며 살아간다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있음

by 나디아

뭐만 하면


“그게 스펙이 돼?”

“그게 돈벌이가 돼?”


효용성이 없으면 가치가 없는 것으로 치부당하는 것이 당연해진 요즘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스펙(spec)’이란 단어의 본래 의미는 ‘사양’이다. 컴퓨터와 같은 물품의 사양을 말할 때 쓰는 어휘인 것이다. 그런데 어느샌가 우린 이를 사람에게 붙여쓰기 시작했다.



경제난과 맞물린 취업난은 살아있는 지식의 숨터라는 대학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게 하는데 충분했다. 상업적인 속박에 못 이겨 대학은 인문대를 포함한 순수 학문을 학부로 통합하며 기초학문에 대한 투자를 대폭 줄이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보이고 있다.



“돈을 생산하지 않는 지식은 쓸모없는 지식인가?”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는 인문학의 가치를 상업적인 속세에 묶어두었다. 무용한 지식은 유용성을 생산해 내야 하는 경제 시스템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배척되었으며 그 결과 인간은 돈을 낳지 않는 지식을 폄하하게 되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가 이 세계에서 목격하는 모든 종류의 유용한 지식은 무용한 호기심에서 시작했다. 처음부터 돈이 될 것이기 때문에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유용성을 극대화하기 때문에 시작한 지식은 없다는 것이다.



유용성만 좇다 보면 인간은 외로워진다. 매 순간 효율을 따지고 효용의 가치를 우선시할 때 인간은 가장 인간다운 본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우리가 꼭두새벽에 눈 비비며 일어나 해돋이를 보는 일도, 가파른 산을 오르는 일도, 사랑하는 연인에게 편지를 쓰는 일도 유용성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다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가끔은 무용해서 그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돈이 안 되는 걸 알지만 그게 비록 나한테 즉각적인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그걸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 순간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걸 절실히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런 동물이다.



“왜 인문학이 중요한가?”



지식은 지식 그 자체로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지식의 추구는 결과가 아닌 과정에 있어야 하며 그러한 지식은 무용할수록 더 깊은 무게감이 있다. 효용성을 창출하는 지식만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수세기 동안 일궈낸 문명이라고 일컫는 모든 문화양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 위대한 파르테논 신전도, 고흐의 걸작도, 셰익스피어의 문학도 유용성이라는 이름 앞에서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다 어른’, ‘책 읽는 나의 서재’, ‘알쓸신잡’ 등 이런

인문학 관련 프로그램이 다시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급속한 경제 성장 속에서 우리는 빠르게 달리는 법을 체화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세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각성한다. 나는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었는가, 내가 유영하고 있는 이 세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부의 축적은 현실에서 나를 살아남게 해 줬지만, 내가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해주진 못했다.


인간은 그런 갈증을 안고 살아간다. 유용성 추구의 결과가 외면을 채워줄지는 모르지만 내면은 결코 채워주지 못한다. 온갖 유용한 것들은 인간을 상업적인 굴레에서 지탱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인간 내면의 깊은 응어리를 풀어주지는 못한다. 인문학은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이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인간의 갈증, 인간만이 느끼는 그 순수한 열망은 무용한 것들에 깃들어 있다. 그것이 인문학을 비롯한 순수 학문이 지닌 가치이다. 돈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가치 있는 학문들이 인류 문명을 더 생생하게 이뤄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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