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17세기 스피노자의 유명한 글귀. 사실 스피노자는 이 말을 한 적이 없고, 우리나라에서 잘못 알려졌다고 한다. 해당 문장은 1944년도에 나치 히틀러에 항거하면서 생긴 "고백교회"의 목사 칼 로츠의 편지 속 글이었다. 그 글귀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여러분 우리 국민들의 위태로운 상태에 대한 제 글로 인해서 여러분들이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루터의 말을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습니다."
우스갯 소리로 포장해 보는 나의 경험은 내일 자산가치가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추가 매수를 했던 적이 있다. "희망찬 내일을 바라보자면 어차피 언젠가 오를 일 아닌가? 농담이다. 사실 이와 비슷한 경험으로는 내일 피곤할걸 알면서도 늦은 밤 조깅을 한 얘기를 하고 싶다. 조깅을 할 때면 10초 정도의 간격으로 내 머릿속은 이런저런 생각 천지다. 오늘 조깅한다고 당장 내 체력에 큰 변화를 가져올까? 아니다. 오늘 쉰다고 내일의 내가 살찔까? 아니다. 지금 바로 쉰다면 편할 텐데? 이 부분은 틀림없이 맞다. 그럼에도 나는 왜 뛰는 걸까? 바로 어제 보다 더 나은 나를 위해서다. 실질적인 변화가 0에 수렴할지라도 그런 희망을 가지고 주 2-3회 나의 남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다. "어제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어쩌면 모두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이쯤 정돈하고 다시 팩트체크를 해보자면 목사 칼 로츠가 루터의 글을 인용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검증된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팩트체크를 떠나 이 글귀가 퍼졌던 시절 그 맥락을 살펴보자. 위의 말은 나치 통치의 고통 속에서 사람들에게 한줄기 빛이 되었을 편지 속 문장이다. 전쟁의 정당성을 마련하고자 행했던 히틀러 나치의 악행은 굳이 적지 않아도 유명하다. 나치통치 시절과 지금 사는 세상을 비교할 순 없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또한 위태롭다. 위태롭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결과가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없거니와 바라고 있던 어떠한 무형의 개념들의 균형상태가 아닌 채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렇듯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무언가 새로운 상황에 놓이고 판단해야만 하는 건 우리들의 자연스러운 숙명이다. 그렇기에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지혜와 희망이 필요하다.
최근 벌어지는 국제 정세와 국내 사건들을 맞이하며 2025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또한 어두운시기를 지나고 있다. 이 사건 주체자들이 철학과 지혜를 가졌더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이런 시기에 강단 있는 태도로 흔들림 없는 논조를 펼치는 몇 명을 면밀히 살펴보면서 경외심을 가져보았다.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이 현생을 어떤 태도로 살 것인가? 고통과 역경에 직면했을 때에도 희망을 가지고 올바름을 주장할 수 있을까? 돌아와 최근 안 사실을 열거하자면 스피노자는 굶 핍한 삶을 살면서 비교적 젊은 나이인 40대에 죽었다. 그 유명한 루터 또한 로마 가톨릭 부패에 항거하며 평생을 어려운 시기에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후대에 위대한 철학자로 평생 회자되고 있다.
그럼 다시 우리 생각을 정돈해 보자.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제한된 재화와 시간 그리고 에너지 속에서 무엇에 집중을 하고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모두가 바라는 바는 다 다를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 모두를 다 아우르는 한 단어가 있다. 바로 희망이다. 내일 지구 종말이 올지라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글귀처럼, 우리는 더 나아간다는 희망으로 살아간다. 당장 내일 세상이 망하더라도 각자가 바라는 바는 연속적이고 영속적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만물의 최고 영장류인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나만의 이득을 위해서?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란 불씨를 살리기 위해서?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 또한 나 자신이 최우선순위임에도 반문하고 싶은 순간이다.
그러기에 위대한 철학자들의 생각의 가치는 어둠 속에서 더 빛을 발휘하는 것 같다. 바라건대 모두가 바라는 희망 속엔 사랑이 담겨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