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력지색(地力地色), 도시는 어떻게 자신의 빛깔을 증명하는가
어떤 마케팅은 유행을 만들고, 어떤 기획은 도시의 유전자를 바꿉니다. 최근 나이키가 신주쿠에 새 매장을 오픈하며 선보인 협업은 단순한 광고를 넘어 타운 매니지먼트의 새로운 문법을 제시했습니다. 나이키는 왜 세련된 모델 대신, 신주쿠역의 경비원 사토 슈에츠(Sato Shuetsu)와 손을 잡았을까요?
© video source. instagram @niketokyo
한 번쯤 신주쿠역에 가본 사람들이라면 그 안에서 길을 잃어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미궁, 신주쿠역은 늘 공사 중입니다. 2002년부터 이곳에서 근무를 시작한 경비원 사토 슈에츠씨는 혼란스러운 역내에서 승객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주변에 흔히 굴러다니던 덕테이프를 잘라 안내 문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메가폰으로 사람들을 안내했지만, 하루 300만 명 이상이 오가는 역에서 목소리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핍이 만든 근육: 예산도, 디자인 툴도 없던 상황. 오로지 ‘길을 잃지 않게 하겠다’는 목적 하나로 탄생한 투박한 직각의 글씨, 이른바 ‘슈에츠체(Shuetsu-tai)’는 신주쿠라는 혼돈을 통제하기 위해 탄생한 생존의 도구였습니다. 그리고 이 글씨는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가며 디자이너와 큐레이터들 사이에서 “가장 인상적인 타이포그래피”로 회자되기 시작했습니다.
시코드 인사이트: 도시는 계획된 랜드마크보다, 이런 결핍을 메우기 위한 평범한 이들의 행동(Behavior)에서 진짜 힘을 얻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땅이 가진 본연의 힘, 지력입니다.
© Image source. Spoon & Tamago
사토 씨의 이 투박한 테이프 글씨는 2025년 일본 사인디자인협회(SDA)로부터 '경로 창조'로 플래티넘 특별상을 수상하며 공공 디자인의 정수로 공식 인정받았습니다. 20년이 넘는 헌신이 마침내 제도적 언어로 번역된 순간입니다. 나이키는 이 흐름을 포착했습니다. 사실 나이키 이전에도 그의 안목을 먼저 알아본 브랜드들이 있었습니다.
브랜드의 리스펙트: 일본의 라이프스타일을 선도하는 도큐핸즈(Tokyu Hands)와 패션 편집숍의 상징인 유나이티드 애로우즈(United Arrows) 역시 그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매장의 간판과 디스플레이를 그의 테이프 타이포그래피로 채웠던 것이죠.
© Image source. Spoon & Tamago
신주쿠 매장 오픈 시, 나이키는 사토 씨를 공식 협업 파트너로 세워 스토어 로고와 사이니지를 슈에츠체로 완성했습니다. 각 층의 안내 사인도 도쿄 지하철 시스템에서 영감을 받은 시각 언어로 구성됐습니다.
축적된 가치: 나이키의 협업은 갑작스러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지역 기획자들이 수년간 공들여 발견하고 검증해 온 '지역의 결'이 글로벌 자본인 나이키를 만나 폭발한 사례입니다. 화려한 네온사인 뒤에 가려졌던 경비원의 노고가 도시의 독보적인 빛깔(지색, 地色)로 피어난 순간입니다.
© Image source. instagram @nuhsikasas
© Image source. nike.com
© video source. instagram @niketokyo
시코드 인사이트: 자본의 가장 영리한 선택은 지역의 맥락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을 세계적인 언어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력지색’의 문법은 시부야의 <더 도쿄 토일렛(The Tokyo Toilet)> 프로젝트에서 이미 그 힘을 증명한 바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단순한 '화장실 개보수'를 넘어 도시 브랜딩으로 승격될 수 있었던 데에는 패스트리테일링(유니클로)의 임원이자 회장 아들인 야나이 코지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자본의 힘(Capital Power): 야나이 코지는 이 프로젝트를 도쿄 올림픽을 위한 단발성 홍보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막대한 사재를 투입하면서도 이를 기업 홍보 수단으로 전락시키지 않았습니다. 대신 "도시의 가장 취약한 공간을 통해 시부야의 품격을 보여주겠다"는 자본의 의지를 세웠습니다.
기획의 힘(Director’s Vision): 그는 이 하드웨어에 서사를 입히기 위해 거장 빔 벤더스를 끌어들였습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청소부 히라야마의 성실한 일상을 통해 화장실이라는 공간을 '도시의 환대(Hospitality)'로 재탄생시켰습니다.
시코드 인사이트: 자본이 '공간'을 만들고 거장의 기획이 '서사'를 부여할 때, 기피 시설이었던 화장실은 전 세계 기획자들이 찾는 시부야의 강력한 IP가 되었습니다.
© Image source. 영화 퍼펙트 데이즈
© Image source. C.CODE
도쿄가 우리에게 던지는 솔루션은 명확합니다. 지력지색을 살리는 타운 매니지먼트는 다음의 단계를 거칩니다.
일상의 주연화: 도시를 지탱하지만 소외되었던 존재(경비원, 청소부)의 행동을 포착할 것. 지력은 늘 거기서 시작됩니다.
자본의 번역가 포지셔닝: 나이키나 야나이 코지처럼, 거대 자본은 지역의 맥락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을 세계적인 언어로 '번역'하는 역할을 수행할 것.
지속 가능한 IP화: 반짝이는 이벤트가 아니라, 그 지역에 계속 머물러야 할 이유를 디자인과 서사로 축적할 것.
성수가 팝업의 파도를 타고, 익선동이 과거를 소비할 때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나이키가 신주쿠 경비원의 글씨를 스토어 로고로 만든 것처럼, 야나이 코지가 화장실 청소부의 일상을 영화로 만든 것처럼. 우리 도시의 숨겨진 지색(地色)을 발견해줄 기획자가 있는가?
결국 도시는 건물의 합이 아니라,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과 그 행동이 만들어내는 빛깔의 합입니다.
C.CODE는 이 다정한 지색들이 자본의 시스템과 만나 어떻게 대체 불가능한 도시 IP가 되는지 그 여정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