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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우연 입니다 Feb 04. 2023

살아가는 것은, 변화하는 것.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은 있기 마련이다지.

나에게는 식구들이 참 많다.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다가. :-)

7년 반 전, 긴 여행을 떠났을 때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낯선 나를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심지어 넉 달까지도 자신들의 집을 내어 주셨던 그들, 그들이 모두 내 가족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마을일은 살아가는 거지 이벤트가 아니라던(미국에서 메이데이 축제를 준비하며 샌디가 내게 해 주었던 말)" 그 말처럼 여행도 일상도 잠시 반짝이는 이벤트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고 일하고 울고 웃으며 살았다. 이 생각이 늘 곁에 있다 보니 세상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든 사람의 인연은 식구처럼 늘 귀하다.  


스코틀랜드 모니아이브 (스코틀랜드 사람들도 잘 모르는, 아주 아주 외진 마을)에 갔을 때도 그랬다. 일흔이 넘은 노 부부가 나의 가족이 되던 순간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자그마치 칠 년 하고도 반, 2015년 7월, 우리는 어떻게 만났을까?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난 날, 그때 썼던 글이다 https://blog.naver.com/wooyeon1983/220403656653


덴마크에 오고 나서 스코틀랜드는 가까우니 방학이 되면 꼭 찾아가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마을사람들도 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매해 단 한 번도 빠짐없이 해남 시골집으로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주던 우리 할매 할배가 누구보다 보고 싶었다.  마을이벤트를 담당하는 Tim과 Sue와는 코로나로 전 세계가 문을 쾅쾅 닫고 있을 때에도 한국에서 스코틀랜드로 스코틀랜드에서 한국으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자주자주 살아가는 일상을 나눴다. 스마트폰이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어 Sue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Sue! 잘 지내죠? 우연이예요! 모니아이브에 가고 싶은데 할아버지 할머니 소식 좀 전해 주세요! 일정은 언제가 괜찮은지도 물어봐 주시겠어요? 우연이가 너무너무 보고 싶다고도 전해주세요!"


조금 있다 답장이 왔다.


"우연, 할머니가 지금 치매를 앓고 있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조금이라도 기억이 남아 있을 때 7년 전 우리에게 어떤 주옥같은 일들이 벌어졌는지 빨리 가서 나누고 싶어졌다. 연이은 메시지가 왔다. 


"우연, 할아버지가 우연이가 언제 오든, 네 방은 항상 준비가 되어있으니 어서 오라고 전해주래" 


비행기 표를 끊고, 우리들의 추억이 가득 담긴 사진들을 외장하드에 채워 넣어 모니아이브로 향한다. 반가운 마음도 마음이지만 걱정과 두려움도 그만큼 크기다. 살아간다는 것은 매 순간 한쪽으로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어떤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일 테다. 그리고 그 자연스러운 일들의 방향을 우리는 한 치 앞도 모른다.  오늘 만날 할머니의 시간이, 이 자연스러움이 왜 무섭고 아플까. 두려움 깊숙이 던져진 마음을 건져 올리며 집을 떠난 지 14시간 만에 7년 전 매일 드나들던 문턱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현관문 너머 둘이 걸어 나온다. 다시 만나 너무 반갑고 행복해서 눈물이 났다. 다시 돌아온 내 방에, 짐을 풀다 침대 옆에 놓인 "WOO"라고 적힌 카드에 시선이 멈췄다. 


"네가 오기 전부터 할머니가 니 이름을 하루에도 수십 번 물어봐서, 기억 연습 하려고 사다 올려 두었어. 할머니가 니 이름을 잊어버릴 때마다 저 방문을 하루에도 수십 번 열어 읽고,, 또 기억이 안 나면 다시 열고 읽고, 한동안 계속 연습했는데, 연습한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네"

할매 할배는 나를 "WOO(우)"라 불렀다.  이 카드를 보고 눈물이 날 뻔했지만 꾹 참았다. 7년 전 앨리스도 그대로다. 나를 기억하는지 내 품에 달려와 안기더니 저리 잠들었다.

이날 밤, 서너 번의 장작을 더 태우는 동안에도 지난 7년의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다. 9시면 잠이 들어야 하는 할머니는 내 이야기에 신이 나서 노래하다 춤을 추고 내 이름을 쉴 새 없이 불렀다. 나쁜 기억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좋은 추억만 기억한다는 할매의 치매 증상에 할아버지는 연신 우리는 행운이며 다행이다하고 웃으셨다. 우리의 재회는 나의 생각만큼 두렵고 우울한 밤이 아니었다. 되려 당차고 씩씩하며 유쾌했다. 새벽이 다되어 내 방으로 돌아와 창밖을 보니 별들이 가득이다. 정말이지 단하나도 변한 게 없는 밤인 것처럼, 어제일처럼 익숙하다. 나는 지금 내 방에 있고 할매 할배 곁에 있다. 

거실 티비 선반엔 내가 만든 액자에 7년전 우리들의 사진이 :-)

이른 아침, 할매는 내 방문 앞에서 "우! 우!" 하고 불렀다. '아차! 어젯밤 내가 맛있는 요리를 해주겠다 약속했지! 그래, 아침엔 다 같이 시내로 장을 보러 가기로 했었어!' 급하게 옷을 챙겨 입고 시내로 나왔다. 

늦게 일어나는 나를 위해 할배는 내 컵, 내 시리얼 그릇, 내 숟가락을 늘 이렇게 셋팅해 두셨다. 그날 아침도 변함없이.  아! 반가워라!

시내로 나가는 길 내내 할매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자부심, 어젯밤 있었던 우리들의 이야기,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 같은 말을 반복하다 노래하고 춤을 추고 내 이름을 또 수시로 불렀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같이 노래하고 같이 춤을 췄다. 매번 똑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을 반복해야 하는 할배의 피곤한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나는 그게 보기 좋아 할배에게도 같이 노래하자 부추겼다. 못 이기는 척 노래했지만 내가 너무 잘 알지. 할배, 합창단 활동을 무지 오랫동안 했던 베테랑이시잖아요. (하하하)

스코틀랜드 국기만 보면 할매 노래는 장소 물분,  대형마트에 국기가 매 코너마다..... 아이고, 할매 노래가 끝없다. 가사는 대충 "PROUD OF SCOTLAND"

장을 보고 돌아 나오는 길, 할매가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나온 것을 알아챘다. (슬프기는커녕) 우리 셋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빵 터져 한참을 웃었다.  이 모습이 귀여워 사진 찍자 했더니 할매 엄지 척, 차로 돌아와 내 신발을 보니, 나도 양말을 거꾸로 신었네. (한두 번이 아니지 나도 참)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노을이 아름답다. 양말을 신었고 신발을 신었으면 됐다. 조금은 서툴고 엉망이더라도 이런 마음으로 신고 걸으면 된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할매가 쓴 자서전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자신의 어린 시절만큼은 너무도 또렷하게 기억을 하고 있는 터라 어느 챕터를 읽던 내가 한 줄을 읽으면 다음줄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해 내신다. (우리 할매는 1995년, 9월에 공식 인정받은 멘사 멤버 하하)

문제는 내가 모르는 영어 단어가 너무 많아 더듬더듬 읽고, 할매는 한 문장 읽을때마다 노래와 춤을 계속,, 하루에 한 챕터 읽기가 어렵다. 우리 둘은 삼천포로 빠지기 대장들이다.

지난 7년 동안, 할아버지는 도자기 페인팅에서 멈추지 않고 결국 세라미스트가 되셨다. 직접 만든 도자에 직접 페인팅을 하신다. 덕분에 마을에서 일주일에 두 번 성인대상 취미반 프로그램도 운영하시게 되었다. 그날 밤, 고단 하셨을 텐데 밤늦은 시간까지 싱크대 앞에서 본인 작업에 몰두하셨다. 7년 전에도 그러셨다. 모두가 잠든 밤, 날이 새는 줄 모르고 페인팅하시던 할배, 그 고요한 시간이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 고스란히 흘러왔다. 

나도 곁에서 할배 도움을 받아 작은 컵과 상자를 만들었다. 개인 교습 받은 셈

모니아이브, 가족으로 나를 받아주던 그 작은 마을.

지난 7년간 누군가는 마을 떠나고 누군가는 마을에 정착했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하늘나라로 간 사람들도 있고 그 새에 또 다른 생명들도 탄생했다. 어느하나 자연스럽지 않은것이 없다. 

상냥한 자연과 언제나 펍을 지키는 Tim도 Sue가 마을 곁에 있다. 페스티벌 마을답게 멈추지 않은 라이브 음악들도 여전하다. 나를 기억해 주는 마을 사람들에게 고맙다 인사하니 우리가 너를 어찌 잊냐 하신다. (그래 내가 참 많이 나대고 다녔지.. 하하), 여전히 포근한 이 사람들 마음속엔 경계란 없다. 그래서 모두가 가족일 수 있다는 그 믿음을 이렇게 웃음으로 전한다.  

dont's take life too seriously. nobody gets out alive anyway

매일밤 할매에게 책을 읽어주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할배와 함께 도자기를 빚었다. 집안일을 혼자서 도맡아 해야 하는 할배가 안쓰러워 몇 날밤 저녁은 내가 차렸고, 할매가 더 이상 베이킹을 할 수 없어 할배가 좋아하는 스콘을 맛본 지 오래되었다 하여 스콘도 매일 구워 드렸다. 떠나기 전날밤엔 모든 재료 다 털어서 또 한 번 구워 빈 그릇을 가득 채워 두었다. 공항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것을 말려 시내까지 배웅 해준 그들에게 고맙다 인사하고 버스에 올랐다. 첫날 마을에 도착해서 한번, 할매 할배 만나고 한번, 방에서 한번, 도자 빚으면서 한번, 몇 번을 꾹꾹 참았던 눈물들이 왈칵하고 쏟아져버렸다. 따스히 안아 주시는 품 속에서, 한국을 떠나오고 난 후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을 맞닥뜨렸다. 고마움으로는 부족하고 서러움과 아쉬움 이라 하기에는 조금 더 긍정적인 단어가 필요하다. 한국에서 가족들과 헤어질 때 비행기에서 느꼈던 그 울컥했던 마음과 비슷한 듯하다. 많이 보고 싶고 그리울 것 같은 마음이다.

밖에서는 유리창 썬탠으로 내부가 안보이나 보다. 나를 찾으려 애쓰다 결국 버스가 떠나자 허공에 손을 흔드신다.  버스가 저만치 떠나도록 인사하는 둘의 모습에 또 눈물이 쿵!

2학기 시작 하루를 앞두고 덴마크로 돌아왔다. 할머니의 노래를 다시 들으며 학교 갈 준비를 한다. 지난 1학기에 아쉬웠던 것들을 정리면서 2학기엔 쫄지말자, 할머니 노래처럼 당차고 신나게 때로는 신발을 거꿀로 신더라도 그것이 인생의 큰 오점이 아닌 것처럼 툭툭 털며 그리 걸어보자. 


살아가는 것은 쉴 새 없이 변화하는 것이라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일 것이다. 먼 훗날, 내가 70이 되고 80이 되어 지금 이 시간을 떠올리면 어떤 감정일까.

같이 나눈 마음, 추억, 사랑일 테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결코 변하지 않을 것들. 유쾌한 할매의 노래 속엔 이런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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