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살펴본 발해 지방제도의 오류
이 글의 취지는, 우리가 교과서에서부터 흔히 배워왔던 발해의 지방행정제도인 '5경 15부 62주'가 오류가
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과서에서는 발해의 역사를 배울 때, 이 5경 15부 62주를 문왕과 함께 배우며, 고려와 함께 당나라의 3성6부제를 도입해 온 것과, 그 외 발해의 독자적인 체제인 5경 15부 62주를 배웁니다.
그 5경 15주 62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참고로, 이게 진짜 발해 부들의 정확한 영역은 아닙니다. 발해의 주들의 영역은 현재 어느 곳도 확실하게 고증이 불가능합니다.
우선 5경부터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5경
1.상경(용천부) : 상경 용천부가 정식명칭이지만, '홀한주'라고도 불리웠습니다. 혹은 홀한 말갈부라고도 불리웠습니다(거란국지)
이 성의 이름은 '홀한성'입니다. 문왕 시기에 중경의 뒤를 이어 잠시 부분적인 수도로 작용했으며, 이후 동경에 수도자리를 다시 내 주었다가, 폐왕이 시해당한 이후 794년에 성왕이 이곳으로 수도를 완전히 옮긴 이후에는 926년까지 발해의 수도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휘하에는 용주, 호주, 발주의 3개 주가 있었습니다. 이 3개의 주는 홀한주를 이루고 있었으며,
사실상 발해의 수도권, 핵심지역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당서』 발해전 中
-용천부는 용, 호, 발 등을 관할하였다.
2.중경(현덕부) : 오늘날의 중국 화룡시에 있습니다. 고왕 대조영 후반부와 무왕 시기~문왕 초반부의 수도를 맡았습니다.발해의 3대 왕인 문왕이 천보 연간(742~755)에 중경을 수도로 정하고, 전국을 통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후로는 발해의 수도로 되돌아오지 못했지만, 여전히 발해의 핵심도시 중 하나로 기능하고 있었음은 고고학 연구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중경의 성 이름은 '서고성'입니다.
특이할 점으로는 서고성 주변에는 성, 유지, 무덤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서고성 주변에서만 20여개의 산성과 평성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제가 전에 쓴 축성전설 글과도 상당히 일치합니다.
그리고 중경현덕부에는 노주, 현주, 철주, 탕주, 영주, 흥주의 6개주가 있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중경 서고성은 발해정부 붕괴 이후에 후발해 정권이 수도로 삼은 것으로 유력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신당서』 발해전 中
-숙신고지를 상경으로 삼아서 용천부라 하였고, 그 남쪽을 중경으로 삼아 현덕부라 했다.
『요사』 지리지 中
-현주 봉선 군상절도는 원래 발해 현덕부 지역이다.
3.동경(용원부) : 용원부는 '책성부'라고도 부른 기록이 있습니다. 그만큼 고구려 시절부터 있던 책성의 존재감이 큽니다. 하지만 정작 동경용원부의 주도가 어디 있었냐는 책성설과 팔련성설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지만, 최근의 동향은 팔련성으로 확정이 났습니다.(연변대 방학봉 교수님 저서인 발해의 강역과 지리에서 발췌.) 당연히, 성의 이름은 위에 말한 팔련성입니다. '8개의 연꽃'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책성이라는 존재부터가 고구려 시절부터 두만강 유역의 말갈을 통제하는데 쓰인 거점이기도 하고, 당과의 전쟁에서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받은 지역이기 때문에 이후에 이 지역 자체가 발해의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발해 시대에 발해의 수도까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논의는 아직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용원부에는 경주, 염주, 목주, 하주의 4개 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상술했듯이, 삼국사기에도, 당서에도 용원부라는 이름 말고 책성부라는 이름이 상당히 많이 나온 것으로 보아서, 용원부의 이칭은 책성부라는 것이 사실상 확실합니다.
『신당서』 발해전 中
-예맥고지를 동경으로 하고 용원부 혹은 책성부라 하였으며, 경, 염, 목, 하 등 4개 주를 관할했다.
4.남경(남해부) : 남경남해부 역시 최근까지 함흥, 백운산고성, 종성, 북청, 신창, 경성설이 대립하다가 최근에 방학봉 교수님이 현재 함남에 있는 북청성으로 확실하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곳은 신라와 맞닿은 곳이기도 하고 신라와의 교통을 주로 맡기도 하였으며, 아마도 선왕~대이진 시기에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이주시킨 말갈족들이 이곳에 다수 살았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통일이 되면 발해고도들 중 유일하게 우리가 탐사해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증보문헌비고』 제 29권 여지고 - 성곽함경도조 中
-북청 청해토성은 숙신고도 혹은 발해고도이다.
『신당서』 발해전 中
-옥저고지에 남경남해부를 두어 옥주, 정주, 초주 등 3개주를 관할하였다. (중략) 남해는 신라로 가는 길이다.
5.서경(압록부) : 서경압록부는 고구려의 고토에 세워진 부로서, 주도인 서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고구려의 고도인 국내성/환도성이 위치해 있습니다. 이 중 환도성은 멀쩡한 성으로 다시 복구되어 발해의 압록부의 주 중 하나인 환주의 주도로 쓰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4개 주 중에 신주가 압록주의 주도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곳에 서경의 주재지인 신안성/임강진성이 위치해 있습니다. (두개 중 하나로 표기해 놓은 이유는, 확정이 난 나머지 4개인 상경,중경,남경,동경과 달리 아직도 두 개의 의견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안성 설을 지지하는 편이라서, 아래에도 서경을 신안성으로 표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발굴된 진만묘지명에서 925년에 야율요골의 지휘하에 함락된 발해의 두 주인 신주와 환주가 이 압록부에 해당한다는 것이 드러나서, 925년에 발해가 거란에게 압록부를 공격당해 서경 신안성이 이때 거란에게 함락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서경의 임강진성 유적은 여기저기 박살나고 깨진 유적유물들이 많습니다.)
『신당서』 발해전 中
-고구려의 옛 지역을 서경으로 하고 압록부라 하였으며 신주, 환주, 풍주, 정주 등 4개주를 관할하였다.
우선, 5경의 설명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와 주를 살펴보겠습니다.
6.장령부 : 고구려 고지이며 하(瑕)주와 하(河)주 두개의 주가 있습니다. 압록부의 바로 옆 혹은 서북쪽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당나라의 영주로 가는 제일 큰 길목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길림성 해룡현에 주도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도리기』 中
-영주에서 도호부로 가고 다시 동북방향으로 옛 개모, 신성을 지나고 또 발해 장령부를 거쳐 1500리를 더 가면 발해 왕성에 이른다.
7.부여부 : 발해의 서쪽으로, 막힐부와 함께 거란과 맞닿은 발해의 최전선 중 하나였습니다. 과거 부여의 고토여서 부여부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주와 선주 두개의 주가 있었다고 합니다.
『신당서』 발해전 中
-부여의 옛 지역을 부여부로 삼아 항상 강병을 두어 거란을 막았다. 산하에 부, 선주 두개가 있다. (중략) 부여는 거란으로 통하는 길목이다.
8.막힐부 : 역시 부여부와 함께 발해의 서쪽 변경으로서, 거란을 막는 부여-막힐-장령의 라인 중 하나였습니다. 막힐부의 산하에는 막주, 고주 두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9.회원부 : 『신당서』 발해전에 의하면 월희말갈의 고지로서, 달주, 월주, 회주, 기주, 부주, 미주, 복주, 사주, 지주 등 9개주를 관할했다 합니다. 철리부와 같이 말갈 일파의 영역 자체가 통째로 발해의 영역으로 넘어온 예라고 생각합니다. 뒤에 설명할 안원부 역시 월희고지에 설치되었다고 하는 단락이 있습니다. 따라서 회원부, 안원부는 전부 월희말갈의 영역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0.안원부 : 역시 위의 회원부와 세트로 월희말갈의 고지에 세워졌으며, 영주, 미주, 모주, 상주 4개의 주를 관할하였다고 합니다. 이 일대에 발해의 큰 호수인 미타호가 있었다고 합니다.
11.동평부 : 불열말갈의 고지로서 이주, 몽주, 타주, 흑주, 비주 등 5개주를 관할했다고 합니다. 상술한 미타호의 서안에 있었다고 합니다.
『신당서』 발해전 中
-불열고지를 동평부로 하고 이, 몽, 타, 흑, 비 등 5개주를 관할하였다. 불열고지는 불열말갈의 옛 지역을 의미하며 불열말갈은 말갈7부 중 한개 부이다.
12.철리부 : 철리말갈 고지에 설치된 부로서 흑룡강성 이란현이 현재 유력한 추정 지역입니다. 신당서 발해전에 따르면 광주, 분주, 포주, 해주, 의주, 귀주 총 6개주를 관할했다 합니다.
13.정리부 : 읍루의 고지에 설치되었다는 말도 있고, 숙신의 고지에 설치되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정주, 반주 2개의 주를 관할하였습니다.
『신당서』 발해전 中
-읍루고지를 정리부로 하고, 정, 반 등 2개주를 관할하였다.
14.안변부 : 역시 위의 정리부와 같이 읍루의 고지에 설치되었다고 하며, 안주, 경주 2개의 주를 관할하였다고 합니다. 이외에 알려진 것은 일절 없습니다.
15.솔빈부 : 신당서 발해전에 따르면 솔빈의 옛 지역을 솔빈부로 하고, 화주, 익주, 건주의 3개주를 관할했다 합니다. 솔빈은 솔빈말갈의 옛 지역을 의미한다 합니다. 그리고 솔빈고지는 오늘날의 '수분하'유역이라고 합니다.
독주주 : 독주주란 발해에 속한 주들 가운데, 어느 부 소속인지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으며, 부에 들어가지 않은 독자적으로 설립된 주일 가능성이 높은 주를 의미합니다.
현재 우리나라로 치면, 도시나 군이 강원도, 전라남북도, 경기도 같은 도에 속하지 않고 아예 그 시 자체가 독립된 행정구역인 경우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중앙정부에 직접소속된 직할주였을 것입니다. 현재까지는 2~3개정도의 독주주가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이름이 밝혀진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독주주는.
영주, 동주, 속주 이렇게 세개입니다. 속주는 속말수, 즉 송화강 유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동주는 중경 근처, 그리고 영주는 전혀 어디 있는지 갈피조차 없습니다. 연변대의 방학봉 교수님조차 후세의 연구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라고 언급하셨으니 진짜로 확실히 알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아는 발해의 5경 15부 62주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지금까지 교과서에서 배우면서, 발해는 5경 15부 62주가 있고, 그 제도를 토대로 나라를
다스렸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5경 15부 62주에는 지금 생각새 보면 약간의 오류가 있습니다.
우선 한가지 문헌을 살펴 보겠습니다.
저 위의 5경 15부 62주를 제일 먼저 기술한 『신당서』에 서술된 발해의 지리, 풍속, 관제, 군제 등의 주제들은 당나라 사람으로 발해에서 몇년간 머무르다 간장건장(張建章)의 저서인 『발해국기』에 언급되는 내용을 복붙한 것입니다. 장건장은 806년 생으로, 그 당시에는 결코 적지 않은 생애인 60년을 살고 866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장건장의 묘지와 묘지명 역시 현존합니다.)
장건장은 833년에 당에서 발해로 파견되어 발해를 방문하고 835년에 당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시기는 발해의 11대왕 대이진 시기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장건장은 대이진 함화 3~5년, 즉 선왕이 죽고 난 다음에 왕위에 오른 대이진 초기의 발해 상황만을 보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유주로 돌아온 장건장은 『발해국기』를 저술하였습니다. 이 발해국기는 현재 원본이 남아 있지 않지만, 몇 개의 사서들에서 인용되어 써 있는 것으로 그 존재가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발해에 대해 매우 직접적으로 저술한 사료로서, 현재까지 남아 있었다면 대이진 초기 시기까지의 발해의 미스터리는 모두 풀렸을 겁니다.
바로 이 책에 5경 15부 62주가 쓰여 있어서, 그것이 후세에 쓴 신당서와 책부원구 등의 사료에 무수히 복붙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가 발해의 제도로 배웠습니다.
대략적으로 이야기해 볼 수 있는 5경 15부 62주의 오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1.이 5경 15부 62주는 대이진 시대에 발해의 지방제도가 정비되었다는 것을 알려줄 뿐, 이 때 설치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2.대이진의 시대인 833~835년에 쓴 책이므로, 835년 이후에 발해가 벌인 정복이나 영토상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3.달랑 2년간 발해에 있던 외국인인 장건장이 2년만에 발해를 그렇게 자세하게 분석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장건장은 본래 자신이 발해에서 해야 할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을테니 더더욱)
따라서 장건장이 833~835년의 경험을 바탕삼아 돌아와서 바로 쓴 발해국기는 대이진 시기까지의 발해 상황을 충분히 알 수는 있지만, 그 이후의 약 90년간의 발해 역사에는 아무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5경 15부 62주는 장건장의 발해국기가 그 시발점이기 때문에, 후기의 발해와는
맞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존재한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사 지리지 2권에
『12대 대이진 때에 이르러 마음대로 연호를 고치는 한편 궁궐을 증축하고 5경 15부 62주를 두었으니
요동의 번성한 나라가 되었다』
라는 항목이 존재합니다. 한마디로, 대이진 시기는 이미 완벽한 지방자치기구로서의 5경 15부 62주가 정립된 것이고, 다만 이후로는 이게 어떻게 달라진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 이후 시기인 대이진 후기와 대건황, 대현석, 대위해, 대인선의 시대에는 어떻게 된 지 아무도 알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5경 15부 62주의 개념 안에 없는 기록들이 현재 존재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쓴 목적은, 그 기록들을 소개함으로서 5경 15부 62주의 오류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물론 장건장이 발해국기를 쓸 당시에는 5경 15부 62주가 맞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 이후 100년정도의 세월 동안 과연 발해 영토와 제도, 지방통치가 단 하나도 바뀌지 않고, 발해의 영역 역시 단 하나도 변경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기는 힘듭니다.
제가 지금부터 써 놓는 기록들은, 5경 15부 62주에 포함이 안되어 있는데, 동시에 문헌사료에는 있는 발해의 지역들입니다. 다만 이 기록들에 나온 지명들은 발해 초기에 나온 다음 이후 수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들도 포함되어 있으니, 그 점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목저주(木底州)
『속일본기』 제 22권 中
-758년 가을, 보국대장군 겸 장군인 행목저주자사 양승경을 대사로, (이후 생략) 파견하였다.
이 '목저'라는 지명은, 위에 언급한 5경 15부 62주에 없습니다. 다만, 62주 중에 이름이 누락된 주가 2개 있는데, 이 둘중 하나가 목저주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고 방학봉 교수님은 추측합니다.(발해의 강역과 지리 中)
이 목저라는 지명은 고구려 시절에도 존재했습니다. 목저, 목저주, 목저성이라는 명칭으로 말입니다.
『삼국사기』 18권, 광개토왕 항목 中
-(상략) 연군은 3천리나 행군하여 군사와 말들이 추위에 시달려 죽는 자가 길에 깔렸고, 우리 목저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후략)
『신당서』 고구려전 中
-647년 3월, 조서를 내려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중략) 남소와 목저에 이르렀다.
위와 동일
-설인귀가 남소, 목저, 창암성 등 세 성을 함락하였다.
참고로 고구려의 목저성은 오늘날 요녕성 신빈현에 있다고 합니다. 만약 목저주가 진짜 있었다면 이곳에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2.현토주(玄兎州)
-역시 『속일본기』에 대흥 22년(759년)에 고남신을 대사로 한 사절단을 파견하여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이 고남신의 직책에 대해 속일본기에서는 '보국대장군 현토주자사' 라고 쓰여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역시 발해의 지역 안에 현토주라는 주가 설치되어 있었는가의 여부 문제가 됩니다. 당연하겠지만 신당서 발해전에는 이 현토주의 이름이 없습니다. 다만, 고조선의 멸망 이후 한무제가 옥저 땅을 현토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고구려 시절에도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가 발해가 건립된 초기에도 명칭을 그대로 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토군의 소재지는 현재 요녕성 무순시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고구려 시대의 붉은색의 기와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합니다. 이는 이 성이 고구려 시대의 것이며 오랜 세월동안 사용해 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현토주가 진짜 있었다면 이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3.약홀주(若忽州)
-문왕 대흥 2년(739) 7월에 서요덕을 대사로 한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는데, 『속일본기』에서는 서요덕의 직책을 약홀주도독 충무장군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약홀주는 어디 있는지 현재로서는 파악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약홀주의 홀(忽) 이라는 한자를 보아서 홀한주, 즉 용천부 지역와 관련이 있는 주가 아닐까 하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지금 나온 약홀주도독 서요덕은 739년에 일본 사신으로 갔다가 물에 빠져 죽습니다.
4.덕리부(德理府)
『태평환우기』 175권 中
-지금의 흑수말갈의 지경은 남쪽으로 발해국의 덕리부에 이르르고 북으로는 소해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실위에 이른다.
『발해국지장편』 14권 지리고 中
-덕리진은 나라의 북쪽 경계에 있었다.
『신당서』 지리지 中
-발해의 왕성에서 북쪽으로 덕리진을 지나 남흑수말갈까지 1000리이다.
『만주원류고』 中
-덕림석은 영고탑성 서쪽 90리 되는 곳에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부가 문헌에 나와 있습니다. 분명 5경 15부 62주에는 없는 '덕리부' 라는 부가 언급되고, 그 덕리부에 소속된 '덕리진'이 또 언급되고 있습니다. 우선 위의 사료를 보면 발해의 왕성인 홀한성에서 북쪽으로 1000리 되는 쪽에 남흑수말갈이 존재하며, 남흑수말갈과 발해의 경계는 덕리부, 덕리진이며 마지막으로, 덕림석은 영고탑성에서 서쪽 90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알려지지 않은 발해의 덕리부, 덕리진에 대해서 만주역사지리부도에서는 덕리부를 지금의 중국의 흑룡강선 의란현으로 보고 있습니다. 김육불 선생도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의란은 송화강과 목단강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발해의 영토보다 조금 위로 올라가 있는, 하바로프스크 인근을 아우르는 지역입니다. 이 설이 사실이라면 발해의 국경선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좀 더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흑수말갈은 흑룡강 하류와 송화강이 합치는 지대, 그리고 흑룡강 남쪽에 거주하는 흑수말갈을 남흑수말갈, 북쪽에 거주하는 흑수말갈을 북흑수말갈이라 불렀습니다. 흑수말갈의 중심지는 현재의 하바로프스크라고 합니다.
이게 모두 들어맞고, 선왕 이후에 발해가 해북제부를 공략하여 복속시켰다는 사료와 합쳐보면, 적어도 선왕~대이진 중반대에 발해는 최하 남흑수말갈을, 최대 남/북 전체 흑수말갈을 정벌하여 지배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 세워진 부가 덕리부라면, 덕리부가 장건장의 발해국기에 기술되어 있지 않은 이유 역시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혹은 덕리부가 아니라 '흑수부'라는 부 자체가 발해에 의해 세워졌을 가능성 역시 제시하고 있지만, 현재 대놓고 사료에 나온 덕리부에 비해 흑수부는 당이 흑수말갈을 부를 시에만 한정적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에, 만약 발해가 일시적으로 정복하고 복속시킨 흑수말갈 영토에 설치한 부가 진짜 있다고 가정할 시에는, 이 부의 이름은 흑수부라기보다는 여기 나온 덕리부가 알맞지 않는가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철리말갈이 그대로 하나의 부가 된 철리부도 존재하지만, 월희말갈이 흡수된 회원부는 부 자체의 이름이 부족의 이름과 맞지 않기 때문에 흑수말갈로 이루어진 부 역시 굳이 원래 해당 부족의 이름을 써야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합니다.
5.집주(集州)
-대체 언제 어느 부에 속한지 전혀 알 수 없는 주입니다. 다만, 『요지(遼志)』에 의하면 집주의 아래에 '봉집현'이라는 현이 하나 있었다는 것, 동경도 집주 회중군하에 발해가 이 주를 설치하였다. 라고 되어 있는 것은 나옵니다.
이는 집주라는 이 주가, 발해가 설치한 한 주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 외에는 언제 세워졌는지, 어디에 있는지 위치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발해국지장편을 쓴 김육불 선생은, 요나라 때 심양 동남쪽 봉집보가 집주라고 주장했는데, 구체적인 증거 자체가 없어서 방학봉 교수님도 이 의견은 아직 빗장 걸어놓은 상태입니다.(그리고 20년에 돌아가셔서 이 주제는 앞으로도 어찌될지 모릅니다.)
6.녹주(녹州 : 녹자가 사슴 록에 풀초변이 있는 벽자인데, 제 컴이 후져서인지 이 벽자가 안쳐집니다.)
-녹주 역시 발해 시기에 설치한 주이지만, 어느 부에 있었는지조차 기록이 없습니다. 대신, 『요지』에 따르면,녹군현, 녹파현, 운천현 3개 현을 관할하였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방학봉 교수님은 이 녹주와 위의 집주를, 역사에 나온 62개주 중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누락된
2주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과거형인 이유는, 방학봉 교수님이 20년에 돌아가셔서입니다.)
7.곽주(郭州)
-『청일통지』에 발해의 주 중 하나로 곽주가 있으나 당나라 사서에는 빠져 있다고 『발해고』 에 언급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이 곽주는 발해고, 청일통지 외에는 찾을 수 있는 문헌이 전혀 없기 때문에 무언가 오류가 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해북제부(海北諸府)?
-해북제부의 제부는 너무나도 뻔하지만 당연히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말갈들을 가리킵니다. 참고로 이 해북제부에 나오는 '해'는 당시 기준으로도 상당히 큰 강이었던 흑룡강을 일컫습니다.
그러므로, 해북제부는 흑룡강 이북에 살고 있던 말갈의 일파들을 이야기하는 단어로 추정됩니다.
신당서 북적전을 보면,
'흑수의 서북에 사모부가 있다. 거기서 북으로 10일 가면 군리부가 있다. 동북으로 10일 가면 굴설부에 이른다. 동남으로 10일 가면 막예개부가 있다. 이외 불날, 오루, 월희, 철리 등이 있다. 그 남쪽은 발해이며 북과 동쪽은 바다이고 서쪽은 실위이다. 남북의 길이는 2000리, 동서너비는 1000리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발해는 선왕 대인수 통치시기에 이르러 해북제부, 즉 월희, 불열, 우루, 철리, 흑수 등 말갈제부를 모조리 복속시키고 통제했다고 신당서, 구당서 전부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사료들에서는 발해가 이곳에 설치한 군읍들이 대략적으로나마 나옵니다. 예를 들면 철리고지에 철리부를 설치하고, 불열고지에는 동평부를 설치하고, 읍루고지에는 정리부를 설치하고, 월희고지에는 회원부를 설치한 등 말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함께 복속시켰다고 얘기한 흑수말갈 지역에 설치된 부는 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 수 있습니다.
최근에 이어진 연구결과와 이 자료들을 보면, 사료에 간간이 나오는 위에 있는 덕리부가 위치도 그렇고, 발해가 복속시킨 남흑수말갈과 북흑수말갈 일부를 합쳐서 만든 부가 아닐까 하는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흑수말갈이 유독 늦게 복속되고 발해에게 마지막까지 대항했던 말갈족이기도 했기 떄문에 뒤늦게야 완전복속 되어서 군현의 설치가 장건장이 발해국기를 쓰던 그 시점까지 늦추어졌다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습니다. 혹은 해북제부를 완전히 통합한 것은 맞는데, 기록의 누락으로 인해 흑수의 영역은 기록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말입니다. 이 부분은 확실하게 자신있게 말하기는 힘든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다만, 위의 자료들과 방학봉 교수님의 의견, 김육불 선생의 의견으로 보아 덕리부가 그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들고 있습니다.
※요동?
방학봉 교수님의 저서인 『발해의 강역과 지리』 에서 발췌.
-발해의 세력이 요동지역에까지 뻗쳤는가? 뻗치지 않았는가? (중략) 발해 시기의 요동문제를 밝히는 것은,
발해사를 이해하는데 자뭇 중대한 의의가 있다. 발해시대의 요동을 다루는 많은 연구논문 중 절대다수가
『신당서』와 가담이 쓴 『도리기』에 의거하여 5경 15부 62주가 발해의 강역범위하고만 인정하고, 요동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않고 있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 의구심을 느껴왔기에..(후략)-
발해사의 최고 권위자인 연변대의 방학봉 교수님조차 5경 15부 62주를 사실상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바로잡아야 하고 색다른, 더 정확한 서술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선 발해의 요동에 대해 언급하는 학계 의견은 다음과 같이 나뉩니다.
1.발해 서남 경계는 압록강의 박작구와 장령부의 남쪽에서 당과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이게 거의 정설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다른 주장이 딱히 없고, 다수의 찬성을 얻은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을 한 학자는, 왕승례(발해간사), 가담(도리기), 이전복, 손옥량(발해국)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의 두사람과 달리 이전복과 손옥량은 발해의 서쪽경계를 요하를 넘어 거란의 송막도호부와 맞닿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첫번째 관점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논리는 신당서와 도리기의 관련기록입니다. 이 두 사서에 의하면 발해 영역과 행정기구는 5경 15부 62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관점의 제일 큰 약점은 바로, 위에서도 언급했던 그 밖에, 그 이후에 발해 영역 안에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영역의 기술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첫번째 관점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신당서와 도리기에 기재된 내용만 의거하고 그 외에 발해가 확장했다고 확정이 지어진 흑수말갈 지역과 요동(요양)지역은 쏙 빼놓은 거라 이겁니다.
2. 발해의 서남 경계는 지금의 요하 하류이다.
-이건 해괴하게도 북한 주장입니다. 1979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 백과사전출판사에서 출간한
『조선전사』 에 있읍니다. 이 책을 쓴 채태형은 훗날 1992년에도 요동반도는 발해국의 영토라는 주장을 하면서 무려 요하의 하류와 그 주변지역, 요동반도까지 발해의 영역범위에 포함시켜 놨습니다. 북한의 연구가 그렇듯이, 구체적 근거는 부족하지만 의외로 이 주장을 미는 학자들도 존재합니다.
3.발해의 영역은 요동지구에까지만 미쳤다.
-이 견해는 중국의 위국충이 처음 제기하였습니다. 이 위국충은 이상한 사상이 들어있는 중국 학자들 중에서
제일 양심있는 분으로 손꼽히는 분으로, 현재까지 중국 학자 중 발해의 영역이 요동에 미쳤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조선족을 쏙 빼면 이분이 유일합니다. 그런데 주장이 주장인지라 중국의 학계에서는 아싸 취급 당하고 있는 학설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같이 3개씩이나 커다란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는 것은, 요동 문제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선, 요동지역 자체가 발해의 세력범위였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통전』 中
-발해 대숭린 정력 8년에 (요동이 )다 동이의 땅으로 되었다.
위와 동일, 통전 186권 中
-고려의 남은 무리가 스스로 보존하지 못하고 흩어져 신라와 말갈에 투항하니 이전 국토는 전부 말갈에 귀속되었다.
참고로 여기 나오는 '말갈'은 발해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통전은 당 덕종때 쓰인 역사서로, 당연히 당나라의 시선에서 철저히 쓰여진 책입니다.
당연히 발해를 말갈로 취급하여 기록하였으며(그 이유는 나중에 제가 글로 쓰겠습니다.)말갈을 동이 가운데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 동이의 땅으로 되었다, 말갈에 귀속되었다는 것은 발해 땅이 되었다는 겁니다.
(아이러니하게 중국의 시점에서 쓰여진 이 통전의 구절은, 시점에 따라서 발해가 남들이 보기에도 동이, 그 중 한민족의 조상이라는 것을 본의아니게 인증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통전에서는 거란, 해, 실위 등을 몽땅 북적으로 넣어 취급해서 따로 굴리고 있기 때문에, 요동이 이 이민족들의 땅일 수는 없습니다.
『구오대사』 거란전 中
-아보기는 그 무리를 거느리고 발해의 요동을 토벌하였다.
『거란국지』 10권 中
-동경은 발해의 옛땅이다. 아보기로부터 20여년간 힘들게 싸워서야 비로소 얻었다.
『요사』 천조제 2권 中
-동경은 옛 발해의 땅이다. 태조는 20여년간 힘써 싸워 이를 얻었다.
『요동행부지』 中
-당은 먼곳에서 지배할 힘이 없어서 요동은 발해 대씨의 소유가 되었다.(후략)
『요사』 지리지 2권 中
-당 고종이 고려를 평정하고 안동도호부를 이곳에 두었는데, 후에 발해 대씨의 소유가 되었다.
『금사』 지리지 상권 中
-요양부는 본래 발해 요양 옛성이다. 요가 이를 점령하고 동평이라 하였다.
『자치통감』 273권 中
-동북의 이민족들은 다 거란에 복속하였지만 오직 발해는 복속하지 않았다. 이에 먼저 군대를 일으켜 발해의
요동을 공격하였다.
『일본후기』 23권 中 『중대성첩(발해 중대성이 일본에 보내는 첩)』 中
-해 돋는 지역은 동으로 멀고, 요양의 서쪽은 막혔으며 양국은 만여리나 상거하였다.
위와 동일.
-해 돋는 지역은 동으로 멀고, 요양의 서쪽은 막히었으며 양국은 만여리나 상거하였다.
『속일본후기』 19권 中, 인명천황이 대이진에게 보내는 글 中
-길이 먼 것도 잊고 특산품이 서로 이어지니, 요양이 가까운곳처럼 여겨집니다.(후략)
이 사료들만 보아도 요동이 발해땅이었음은 사실로 보입니다.
그리고 당시 당이 안사의 난으로 혼란해졌을 때에는 당은 이미 요서와 요동을 통제할 힘이 되지 못했으며, 거란과 실위, 해는 세력이 요동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신라의 북방영토는 발해에 의해 막혀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요동을 가져갈 나라는 발해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안사의 난 이후에 발해가 요동에서 거란과 해와 전쟁을 벌여 이들을 물리치고 요동을 다 차지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방학봉 교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요동은적어도 문왕 때에 발해에 흡수되었을 것입니다.(다만 최근 학설로는 요동의 내륙부분이 문왕때 흡수, 나머지 반도부분은 강왕~선왕 사이에 병합되었을 가능성도 제기 중입니다.)
하지만 발해 말기에 발해가 거란에게 요동을 빼앗겼다는 것도 역시 인증이 되는데, 위에 써놓은 사료에서도
요사 부분을 보면, 태조가 20여년간 힘들여 싸워서 요양을 뺏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따라서 900년 전후부터
발해와 거란의 대립과 전쟁이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습니다. 태조 야율아보기가 칸이 된 것이
906년이니, 마침 발해의 멸망인 926년까지 딱 20년입니다. 칸이 되기 이전인 903년과 906년에도 그가 전쟁을 숱하게 일으켰고, 926년 발해멸망전에 나서기 전에는 '발해와는 대대로 원수지간이다' 라고 말했으니, 이는 발해와 거란 사이에 치열하게 격렬한 싸움이 오랫동안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사』 태조본기 상편 中
-봄 정월에 요동에 갔다.(909년)
이때 야율아보기가 요동 어디 갔는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요동 중에 어느 구역을 확보했던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요동에 아예 요의 세력이 없었다면 요동에 갈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거란국지』 1권, 천찬 3년(태조) 中
-태조가 발해의 요동을 쳤으나 실패하였다.(924년)
924년에도 야율아보기가 요동을 치다 실패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면, 요동이 한순간에 거란에게
전부 날아간 것보다는, 거란령 요동이 발해령 요동을 조금씩 잠식하고 있던 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나옵니다.
그리고 919년의 요사 기록에는 요양의 옛 성을 수축하고 발해 백성들로 채우고 동평군으로 개편하고 방어사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요양 옛성은 요동성을 가리킨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알다시피 발해가 금방 반격하여 924년 5월에 요주를 탈환하여 자사를 죽이고 백성을 되찾아 갑니다. 이걸 보면 요나라의 동경은 옛 발해땅이며, 요는 발해와 20여년이나 싸워서 이 지역을 힘들게
차지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럼, 요동이 발해 땅이면, 어떻게 다스렸는가?
-우선, 방학봉 교수님에 의해 부정된 5경 15주 62부는 좀 배제해 보고 쓰겠습니다.
요사를 보면, 요동 지역에 발해가 설치한 지역으로 보이는 기록들이 조금씩 나옵니다.
『요사』 지리지 2권 中
-요양현은(중략) 고구려 당시 구려현으로 고쳤고 발해때 상락현으로 하였다...(후략) 선향현은 발해 때 영풍현으로 되었다.
학야현은 본래 한나라 때의 거취현이었으나, 발해 때에 계산현으로 하였다. 석목현은 본래 한나라 때에 망평현 땅이었는데 발해가 화산현으로 고쳤다. 흥료현은 한나라 때에는 평료현이었으나 발해 때에 장령현으로 하였다.
위와 동일
-진주는 본래 고구려 때의 개모성이다. (중략) 발해가 개주로 고쳤다가 다시 진주로 고쳤다. (중략)
암주는 발해때의 백암성이다. (중략) 함주는 고구려 때는 동산현이었지만 발해가 이곳에 동산군을 설치하였다.
지금 나온 이 사료들만 보아도, 발해가 요동지역에 주, 군, 현을 설치했다는 증거가 나옵니다. 이 주군현들은 5경 15부 62주에 나오지 않는 명칭들입니다. 그리고 요동에 있었다는 성들이 확인사살까지 해주고 있습니다.
발해가 이 지역에 설치한 명확한 리스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을 밝히기는 어렵지만, 주군현이 다보이는 것으로 보아 당연히 부도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근처의 압록, 장령, 부여부가 요동의 영역을 나누어서 가졌는지, 아니면 요동 자체에 새로운 부를 만들어 통치했는지, 아예 다른 방식을 썼는지는 현재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요나라도 중국도, 일본도 요양이라는 단어를 하도 쓰고,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가 요양이라는 단어로 이곳을 부르기 때문에, 아예 요양부라는 부가 아 지역에 있는게 아니었을까 하고 강한 추정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위에 말한듯이 안사의 난의 피해로 안동도호부가 761년에 완전 소멸한 이후, 아마도 문왕 때인 이 시기가
발해가 요동을 점거하기 제일 좋은 시기였을 겁니다. 따라서 방학봉 교수님은 이 시기가 발해가 요동을 차지한 시기라고 봅니다. 언제까지 차지했는가에는 발해가 망하기 20년 전후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발해국지장편을 쓰신 김육불 선생은 발해와 당의 경계를 박작구와 신성 사이로 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나라의 지리학자 가담이 쓴 『변주입사이도리기』 에 근거한 것으로, 그 이후의 많은 학자들도 이것을 신봉하면서, 김육불 선생까지 이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중국 학자들은 정작 요사와 거란국지에 요동이 발해 땅이라고 대놓고 써져 있는 것은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중국학자들이 신봉하는 경계선은 발해 전기의 경계선을 의미할 뿐이고, 요동이 발해의 영역으로 들어온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김육불 선생이 가담이 쓴 변주입사이도리기에 근거하여 주장한 박작구-신성 라인설은 그 이후의 발해 상황을 반영할 수는 없다고 방학봉 교수님은 얘기합니다.
게다가 위에 쓴 발해가 요동을 차지했다는 근거들을 반론 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발해가 요동을 먹은 것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고더라도 적어도 문왕 중반부~선왕 초반부이며, 빼앗긴 것은 제가 최근에 한 연구로서는 대략 912년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정확한 학설과 주장이 다시 나오려면 더 상세한 자료가 나와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에서 확실하게 제가 말하고 싶은것을 요약해 본다면,
1.당의 장건장과 가담이 쓴 5경 15부 62주는 대이진 이후의 발해 영역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2.이 5경 15부 62주 외에도 여기 들지 않은 부,주,현들이 존재한다.
3.게다가 해북제부 문제와 요동문제까지 포함하면 발해의 부주현은 더 많아진다.
4.3번의 이 항목들 역시 2번처럼 5경 15부 62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5.따라서 발해의 지방제도를 말할때 주로 언급하는 5경 15부 62주는 발해사에 있어서 일부의 시절일 뿐이며,이 의견이 쓰여진 대이진 이후에는 발해의 부주현이 당연히 이보다 늘어났을 것이다. 적어도 덕리부와 요양부는포함시켜야 할 가능성이 크며, 주와 현들도 더 많아질 가능성이 크다.
6.결론. 5경 15부 62주는 발해 전체 시기의 지방제도를 논하기에는 너무 국한적인 시대에만 해당되므로,발해 시대 전체를 아우르는 표현으로는 옳지 않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