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하게 살펴보는 발해의 군사제도

역사기록과 학자의 의견을 통하여

by 동방지희

발해의 군사제도에 대한 이해는 우선 발해의 역사 그 자체의 흐름을 이해하면서 해야 합니다.

698~926년에 이르는 약 228년의 역사 가운데, 시기를 나누어서 그 시기에 따른 발해의 정책과 국방제도의 변화를 사료와 함께 살펴보면, 발해의 군사제도가 어땠다. 어땠다가 어떻게 변했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완전히 세세한 자료는 없지만, 다행히 사료가 어느 정도는 남아 있는 상태이므로 추측과 예상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발해의 강역 범위가 어디까지고, 언제 그 범위가 확정되었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발해의 범위에 대한 인식이 이에 대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 이해가 동반된다면 발해의 세력 범위가 미치는 지역에 대한 고찰이 가능해집니다.


『구당서』 발해말갈전 中


-남쪽은 신라와 서로 이어져 있고, 월희말갈과, 동북으로 흑수말갈과 이웃하고 있으며, 승병(勝兵)이 수만에 이른다.



신당서』발해전 中

-고왕, 무왕, 문왕 3시기에 부여, 옥저, 변한, 조선, 해북제국을 아울렀고 이 지역에 5경 15부 62주를 설치하였다.


발해는 생각해보면, 갑자기 인과관계 없이 생겨난 국가가 아닙니다. 구 고구려의 유산과 구 고구려의 지역, 그리고 그 제도와 국민을 가지고 복구된 나라로서, 고구려의 후신이라고 직접적으로 불리우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가 아무리 망했어도 고구려의 국민과 고구려의 유산, 고구려의 성곽과 제도가 불과 30년만에 모두 허공으로 사라질 리가 없기 때문에 새로운 나라를 처음부터 세우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게 나라의 기틀을 잡고 비교적 이른 시간에 팽창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빠른 팽창은 필연적으로 자연스러운 주변국과의 긴장과 갈등을 불러오게 됩니다. 신당서 발해전에도 부여부에 항상 정예군을 주둔시켜 거란을 방비했다는 기사라던지, 나라를 세운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흑수말갈과 전쟁이 난다던지, 당과 전쟁을 한다던지 하는 것을 보면, 발해의 군사 역량은 발해라는 나라 그 자체에서만이 아닌, 고구려 시절부터 쌓아온 역량이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발해 초반, 고왕~무왕시기에는 발해의 기틀이 갖춰지고 있는 단계인지라, 전 왕조인 고구려의 제도,그 잔재가 곳곳에 남아 있었으리라 판단되고 있으며, 이 시기에는 발해가 확장시킨 강역 범위에 고구려의 제도를 바랑으로 새로운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을 거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인 문왕 시기에는, 처음으로 발해가 그 전조인 고구려와 달리 당의 제도를 받아들여 발해만의 요소를 첨가시켜 만든 발해의 군제가 등장합니다. 이 시기가 바로 『신당서』 발해전에 나오는 중앙 3성과 좌우 6사, 7시, 그리고 10위가 설치되는 시기입니다. 이들이 발해 중앙군입니다.



10위
-좌,우 맹분위(猛賁衛)

-좌,우 웅위(熊衛)

-좌,우 비위(羆[큰곰 비. 벽자입니다.]衛)

-남좌,우위

-북좌,우위

그 외 현재 알수 있는 관직들(후술)


그 외에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중앙정예군으로 예상되는

-천문군(天門軍)

-좌,우신책군(神策軍)

이 두 부대가 있습니다.


발해가 유지한 이 '10위제도'는 사실상 당나라의 군제인 16위 혹은 12위를 그대로 가져와서 발해의 사정에 맞게 도입한 것으로 보이며,각 위에는 대장군 1명, 장군 1명을 두었습니다. 이것은 당의 상장군과 장군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속일본기』에 '과의도위(果毅都尉)' 라는 발해의 군제명칭이 보이는데, 이 역시 당의 제도입니다. 이것은 당의 부병제에 포함된 명칭으로, 위로는 위와, 아래로는 절충부가 있다고 되어 있고, 절충부는 다시 상중하로 나뉘고, 각 부에는 절충도위 1인과 좌우 과의도위 2명이 있다 합니다. 발해 역시 주변국처럼 당의 부병제를 본받아 주,현에 부병을 설치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구당서』 문종기 태화 6년 中

-발해에는 좌우 신책군이 있고 좌우 삼군과 120사가 있다. (832년)

라고 되어 있습니다. 832년이면 발해의 대이진왕 시기입니다.

이것으로 판단해 보면 위의 초기의 좌우10위 제도에서 좀더 세분화가 되어 있다는 것이 보이는데, 그 이전의 제도보다 상당히 확대개편 되어 있다는 것이 확실시 됩니다. 왜 하필 이 시기에 군제가 비대하게 확대개편 되어 있는지 그 이유는, 물론 시대가 지나서도 있겠지만, 이 시기가 발해의 황금기로 꼽히는만큼, 많은 정복활동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예측됩니다.

이 내용을 보면 발해군은 당을 모방하여 위군제+부병제가 뒤섞여 있는 것이 어느정도 느껴집니다. 상술한 10위와 신책군은 당의 제도를 그대로 도입한 군대로서, 딱히 발해군이 부병을 설치했는지 사료로는 없지만, 대신 그 부병의 군제들이 사료에 나타나기 때문에 발해 역시 부병을 포함한 당의 군제를 가져다 쓴 것을 알 수 있으며, 금군과 지방군이 구분되어 있음이 보입니다.



이것을 종합해보면, 발해의 군제는,

1.고구려시기의 군제와 그 잔재를 갖다 쓰다가

2.당의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하여(10위)

3.당의 제도를 상당수 도입하고 거기에 발해의 자치적인 제도를 첨가하여 완성.

이렇게 얘기할 수 있으며, 이 단계가 발해의 군제의 최종적인 완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군제 편성은 대이진~대건황 시기에는 완전히 만들어져 있었을 것으로 예상이 되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모든 내용을 종합하여 10위, 좌우신책군, 좌우삼군, 120사 정도, 지방군은 당의 제도를 받아들인 부병제로 국토를 방어하는 체제가 되겠습니다.




이 이상 군을 돕는 무언가의 기관이나 상호 기능이 있었다는 것을 더 이상 증명하기 힘들지만 지금 기록된 이정도만 해도 발해의 군제에 대해 상당히 많은 내용이 남은 것이 아닐까 하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후로는 지금까지 사료로서, 혹은 학자들의 추측을 가져와서 나머지 관직들을 설명해보겠습니다.




좌우 맹분위

『발해국지』 13권, 직관고 中


-대장군은 1명인데 궁성의 수비와 숙위를 담당한다. 장군은 각 1명인데 대장군을 보좌한다.


『당지』 中

-종 2품 상장군 각 1명, 정 3품 대장군 각 1명, 종 3품 장군 각 1명을 두었다. 궁성의 수비와 숙위를 맡고
무릇 5부와 외부를 모두 통제한다.


『발해국지』 13권, 직관고 中

-이것을 좌우 맹분위가 모방한 것이다. 당서에는 좌우맹분이라 하고 '위'가 없다. 이는 당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니 당연히 '위'자가 있어야 한다. (중략) 다시 생각건대, 일본 사서에 사신 이여성의 관직이 좌맹분위 소장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맹분을 '위' 라고 불렀다는 증거이다.



여기 설명한 좌우맹분위,(좌맹분위+우맹분위)는 발해국지에서 쓴것처럼 당에서 그대로 따 온 부대입니다.

이 부대는 주로 궁성과 수도인 홀한성, 홀한주(용천부)의 수비를 담당한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습니다. 궁성의 수비를 담당한다는 대목을 봐서, 이 부대는 왕의 친위대, 금군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좌우 웅위

『발해국지』 13권, 직관고 제 2 中

-대장군과 장군은 각 1명이고 임무는 좌우맹분위와 같다. (중략) 발해사신 대창태의 관직은 좌웅위이고 도장 고인의 관직은 낭장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장군 아래 도장과 낭장의 관직이 있던 것이다.

-좌우웅위는 딱히 기록은 없지만, 좌우맹분위와 임무가 같다는 것을 보니 역시 금군의 역할을 맡았던게 아닐까 합니다.



좌우 비위

-역시 위에 말한 발해국지 13권의 좌우웅위와 같이 임무가 좌우맹분위랑 같다고 서술되어 있기에, 이 부대 역시 금군부대로 여겨집니다.


『당지』 中

-좌우효위, 좌우무위, 좌우위위, 좌우영군위, 좌우금오위, 좌우감문위, 좌우천우위 등 좌우위를 합쳐 16위라 불렀다. 상장군,대장군, 장군 등 각 관원들은 모두 좌우위와 그 직무를 같도록 하였다.

※아마 이 좌우웅위, 비위 역시 '당지'의 내용처럼 수도를 수비하는 직무를 나누어 맡았으리라 예상이 됩니다.




남좌우위

『발해국지』 13권, 직관고 제 2권 中

-대장군과 장군은 각 1명인데 남위금병(南衛禁兵)을 관장한다. 나머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 부대는 아마도 도성이나 발해의 수도권인 용천부의 위병을 담당하던 부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북좌우위


위와 동일(발해국지 13권)

-대장군과 장군은 각 1명인데 북위금병을 관장한다. 나머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아마 이 북좌우위 역시 위병을 담당하는 부서가 아닐까 하네요.



그외 기록

『당지』 中

-좌우우림군, 좌우용무군, 좌우신무군이 있는데 우림군은 대장군 1명과 장군 3명이 통솔한다. 용무군과 신무군은 각각 대장군 1명, 통군 1명, 장군 3명이 통솔한다. 우림군과 용무군은 모두 북위금병을 관장한다.



※참고로, 『발해국지장편』의 저자 진위푸 선생은 발해군의 규모가 너무 큰 것이 아니냐는 취지로, 주석으로 발해국지에 이런 내용을 달아놨습니다.



『발해국지』 13권 직관고 제 2권 中(주석 포함)

-신무군, 총사군, 생병군을 6군이라 한다. 이것을 남좌우위와 북좌우위가 모방한 것이다. (중략) 마치 당에 남북아문이 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남북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이다. (중략) 발해가 망한 후 좌우위장군 대심리와 장군 신덕 등이 고려로 달아났다고 했다. 아마 남북위 중의 장군일 것이다. (중략)신책군은 아마 본전에 기록된 여러 위 중 하나일 것이다. 국왕 대이진때 처음으로 군을 두었고, 여러 이름을 지었다. 왕종우는 그것을 종국의 신책군으로 여겼을 뿐이다. 만약 제위 외에 별도로 6군을 세우고 또 120사가 있다고 하면 어찌 그렇게 많을 수 있겠는가?



『구당서』 문종기 태화 6년 中

-발해에는 좌우 신책군이 있고 좌우 삼군과 120사가 있다. (832년)

바로 이 내용 때문입니다.




진위푸 선생이 이걸 가지고 말하려는게 뭔지 대충 말해보면, 이 기록을 당에서 기술한 당 내시 왕종우가 신책군, 좌우삼군, 120사를 언급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와 반대로 왕종우가 착각한 것이다. 신책군은 10위 혹은 다른 위 중에 있고, 다른 군 중에 착각한 것이다.
별도로 또 6군이 있고 또 120사가 있다고? 어떻게 그리 많을 수가 있냐? 하고 자신의 생각을 따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논란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료가 발굴되지 않는 이상, 진짜로 왕종우의 착각인지, 발해국지장편의 저자 진위푸가 맞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물론 여러분의 생각 역시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외에 논란이 많은 좌우신책군을 제외한 천문군은, 제 개인적으로 추측하자면, 발해의 금군 중 가장 강력한 전력을 가진 병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천문군이 문헌에 언급되었을 대, 좌우신책군과 같이 언급이 되며, 천문(天門)이라는 한자를 살펴볼때, 고왕 대조영이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을 무찌르고 돌아와 발해를 세웠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부대는
발해의 창시자인 대조영의 승전 전투인 천문령 전투를 그 근원으로 기념하는 부대인만큼 중요하지 않은 부대는 절대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926년 1월에 발해의 멸망 직전에 홀한성에서 출격한 노상의 3만 발해군을 천문군+좌신책군+우신책군. 각 1만씩 도합 3만으로 보는 시점도 있는만큼, 이 부대가 발해에서 제일 중요한 부대 중 하나라는 생각은 확고하게 드는데, 그 외의 기록이 없어서 확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에서 써놓은 10위는 사실상 홀한주(용천부)의 수도권 부대, 즉 발해의 친위군, 금군을 이르는 부대들이기 때문에 지방군은 또 어찌 불렀는지, 어떻게 운영했는지, 어떻게 조직이 있는지, 발해군 이외의 말갈군은 어떻게 동원 및 배치가 되었는지, 발해와 말갈이 따로 나뉘어 구분되는지, 아닌지는 사실확인이 아쉽게도 불가능합니다.


그나마 120위와 당의 부병제를 통해 지방군을 만들었고, 부여부에 존재하는 강군처럼 지방군에도 강군이 충분히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혹은 군제에 말갈군 그 자체를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자료의 미비함으로 인해 장담할 수 없으며, 특히나 해군의 경우에는 진짜 드러나 있는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부분이 발해의 심각한 사료, 자료부족이 제대로 드러나는 항목이라고 생각됩니다.



발해의 기록과 사료는 발해 자국의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에 중국측과 신라, 일본쪽을 통해 주로 알아보는 판국인데, 당나라가 혼란스럽고 난리가 났을때는, 당이 발해에 대해 쓴 기록이 역시 미비한 상황이고, 당이 완전히 혼란기로 접어들어버린 당헌종 이후로는 그나마의 자료도 거의 없는 실상입니다. 그나마 완전히 혼란에 빠지기 전인 대이진때 기록이나마 존재하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대체적인 역사는 그래도 겨우 추정이 가능하지만, 제도나 통치기반, 관직, 그외의 자료들은 아직도 부족하기에 많이 아쉬운 점이 있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글 역시 미약하게 끝날 수 밖에 없으며, 다른 정보가 좀 더 나오거나 하면 다시 개편이 되거나 더 보충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발해의 군부는 발해의 정부 3성 중 제일 최고위인 정당성의 통제를 받으며, 정당성에서 군을 돕는 것으로 보이는 여러 기관과 직책이 확인되지만, 그것까지 군제로 끌어오기에는 무리가 있고, 그들은 정부기관이기 때문에 모조리 군제로 끌어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해서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후에 발해의 제도와 관직을 논할 때가 되면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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