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그냥 대충 살면 안 될까? 대충 살아본 적은 있는가?
도시에는 리듬이 있다. 자동차 바퀴가 구르는 소리, 공사장의 소음, 카페의 타자 소리, 헬스장 러닝머신의 진동, 산성비가 내리꽂히는 소리, 그리고 꽉 찬 지하철의 흔들림까지. 마치 리듬 게임의 키패드를 끊임없이 누르는 듯한 박자감이 우리 몸속에 내재되어 있다.
이 도시는 우리에게 멈추지 말고 움직이기를, 비우지 말고 채우기를 강요한다. 그러한 리듬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일까? 우리는 항상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는 움직이지 않았던 적이 언제인지, 그 리듬을 듣지 않았던 적은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도시인들은 참 달리기를 좋아한다. '갓생', '미라클 모닝', 'N잡' 같은 단어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열심히 달린 끝에 찾아오는 허무감은 때로 폐부 깊숙이 침투한다. 최근 1년 동안 준비해 온 시험을 마쳤다. 결과와 상관없이, 도대체 무슨 의미로 이토록 치열하게 준비했는지 모를 허무함이 밀려왔다. 시험을 준비하며 겪은 고통보다, 그 고통의 '무의미함'이 사람을 더 주저앉게 만들었다.
직업의 갈림길 앞에서 "먹고살기 위한 선택지가 과연 있는가" 싶으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 "꿈이 있는가?"라는 물음표는 직장 상사의 전화처럼 머릿속을 울려댄다. 동시에 '먹고사니즘'은 끊임없이 속삭인다.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정말 생존만을 위해서라면 아르바이트를 해도, 일용직을 해도 먹고살 수 있다. 어쩌면 "그래야만 한다"는 목소리는 일종의 집단적 강박이자 신화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토록 고민하고 괴로워하는가?
책에선 "만약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선택은 가치를 지킬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이 반복된다면 여러 대안을 체험해 보고 어떤 선택이 최선인지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일방통행이다. 연습도, 리허설도 없다. 한 번뿐인 삶은 비교할 대상이 없기에, 내가 한 선택이 타인의 삶보다 더 낫다거나 못하다고 판단할 근거조차 사라진다.
비교할 수 없는 데이터는 우열을 가릴 수 없다. 그렇다면 랜덤으로 생성된 내 삶의 굴곡이, 우연히 빚어진 타인의 삶보다 더 가치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가볍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야 하기에, 풍선 같은 가벼운 존재에 억지로 무거움을 채워 넣는다. 책임, 희망, 감동, 사랑, 혹은 복종 같은 것들 말이다.
문제는 이 '인위적인 무거움'과 '본질적인 가벼움'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현기증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추락하고 싶은 욕망,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본원적인 욕망. 프로이트는 이를 '죽음 충동'이라 했고, 분석 심리학자들은 '태아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라 불렀다.
우리는 애초에 별 의미가 없는 것들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해 삶을 무겁게 만들고 있다. 본질과 현실의 괴리, 그곳에서 오는 어지러움이 바로 현대인의 현기증이다.
이쯤 되면 "이런 우울한 이야기를 왜 읽어야 하나" 싶을 것이다. 맞다. 이런 현기증과 죽음 충동 앞에서 알베르 카뮈는 "참된 철학적 문제는 오직 자살뿐"이라고 말했다. 살 가치가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죽음이 아닌, '그냥' 살기를 택한 인간의 복잡함을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는 항상 삶의 무거움(Es muss sein!)을 논한다. 하지만 그 무거움에만 집착할 때 존재의 그림자는 우리를 덮쳐온다. 팽팽하게 부풀어 터질 것 같은 풍선처럼 위태로워진다. 치열하게 살기 위해서라도 가끔은 그 풍선의 바람을 빼주어야 한다. 존재와 비존재는 결국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가치 없는 것을 휘두른다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일론 머스크나, 수용소에서 고작 배설물 문제로 모멸감을 느껴 자살을 택한 스탈린의 아들이나, 우주의 관점에서는 먼지 같은 존재라는 점에선 차이가 없다.
이 사실은 참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자유로움을 준다. "이렇게 살아도 돼?"라는 질문에 "그렇게 사는 것도 하나의 삶"이라는 답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럼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부의 추월차선을 달리든, 그냥 평온한 하루를 살든 상관없다. 무겁게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한 번씩 가벼움을 바라봐야 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은 '카레닌'이라는 개를 통해 이를 역설한다. 작가는 카레닌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기 전의 아담'으로 본다. 우리는 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개가 매일 똑같이 꼬리를 흔든다고 해서 "너는 발전이 없니?"라며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인간이 매일 같은 말만 한다면, 심지어 그것이 연인이라 해도 지루해하며 핀잔을 줄 것이다.
존재 그 자체로 사랑받는 경험, 그 달콤한 낙원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현기증.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나아가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 인간은 참 더럽게 복잡한 존재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우리 인생의 가벼움을 역설한다. 어쩌면 당신이 지금 끙끙 앓고 있는 그 고민이, 사실은 참 무가치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존재의 가벼움이 당신에게 무엇을 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가벼움을 인정할 때, 우리가 더 '인간'이라는 존재에 가까워지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역설은 인간을 설명하는 가장 세련된 단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