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통을 관용하는 사회

독서 감상문 - <시민불복종>

by 오또쭈

대한민국이나 다른 모든 국가들은 군주제의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국가는 신성한 대상을 만들어 군림하니, 모든 국가에는 군주가 있다. 사람들은 국가에 애국심과 자부심을 가지며, 국가를 자신과 분리하여 숭배한다. 동시에 국가는 국민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기조를 알고 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나누는 (자신의 정체성과 국가의 일을 분리하는) 역설의 모습이다. 국가는 여전히 우리에게 군림하고 있으니, 국가가 통치하는 것보다도 더 큰 문제이다. 민주주의는 너무 형식적이다. 소로가 말하는 시민 불복종의 사유는 매우 타당하다. 하지만 강압적인, 권리를 제한하는 통치는 존재해야 한다. 모든 이해관계가 공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통치보다 더 잘못된 것은 군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해관계마다 지배할 기회가 있는 것이 어떨까? 혁명과 내전 같은 투쟁이, 가장 공식적이면서 가장 우리에게 와닿는 사적인 무언가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군림하는 자는 없지만, 통치하는 자는 남을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이념이 있다. 각자는 모두 다른 뇌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원하는 것도 다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인데, 사회 통념과 나의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우울해진 적이 많다. 보편적인 사회상과 다른 이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내가 소수자임을 의미한다. 나에게 “사회적인 무력”이 없는 것이다. 국가는 국가의 이념과 반대되는 이들을 적으로 간주함에 그치지 않고 도덕적인 잣대로 비난한다. 구조적인 문제를 그렇게 대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해결되기에는 힘들다. 소수자들이 자신이 소수자라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애인이나 성소수자는 체제가 그들의 목소리를 허용한다. 그러나, 정부가 적이라 규정하는 피지배계층은 완전히 고립된다. 그들은 자신이 소수인줄 모른다. 결국 죽음을 앞두고서야 불행을 깨닫는다. 나는 그들도 소수자라 인정하며, 그들을 위해 글을 쓰고자 한다. 사람들은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의견은 잘 내지 않는다. 문제에 순응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는 의견을 선호한다. 소로가 경고한 청원이나 입법 같은 것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이 이런 경우이다. 상징 밖에는 없지만, 그 상징은 위험하다. 군주제와 지금의 민주주의가 비슷한 것이 이 상징의 위험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 때문이다.

사람들이 순응하고 복종하는 대상은 언제나 상징이었다. 신과 왕과 국가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곳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행동에 ‘혁명’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 대부분은 그냥 통념에 대한 순응의 일종이다. 이 모든 것은 편견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선하다 생각하는 것들은, 예를 들어 국민들이 결정한 국가의 헌법은 다 편견의 일종이다. 헌법이 한 문제에 대해서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아까 전의 의견에 관한 서술을 참고하라) ‘규칙’ 그 자체가 사유를 저지하고 숭배할 대상을 만들기에 나쁘다는 것이다. 편견은 어떤 상황에서도 쓸모없다. 그것이 좋게 작용한 경우는 없다. 편견은 언제나 복종을 강요한다. 군림하는 존재를 생성한다. 생각을 조금이라도 관두고 다른 기관들에게 맡길 경우, 나태의 후폭풍은 인생의 모든 것을 잠근다. 이 모든 것들의 해결 방안은 불복종이다. 당신이 사유한다면 복종하거나 숭배하지 않아야 자신의 뜻이 실현됨을 알 것이다. 결국 건강하게 불복종을 하기 위해서는 사유가 계속 이루어져야 할 것인데 사유는 상대적이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사유대로 행동하려면, 다른 사람들과 척을 져야 할 것이다. 단순한 개혁이나 보완으로는 의미가 없다. 끊임없는 투쟁이 필요하다.

처음에 나는 투쟁이 없는 사회를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좋아했다. 그냥 모든 것을 공평하게 배분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개인에게 쓸 예산을 균등히 나누어서 그 예산대로 각자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면 안 될까? 사회도 제대로 돌아갈 수 있고 불행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상을 지금 실행하면 잃는 기득권이 생긴다. 또한, 소수자에 대한 남들의 혐오감도 채울 수 없다. 결국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수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어떻겠는가? 나는 도저히 현재의 국가와 문화를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사회에 급진적인 변화를 주려는 노력을 사회는 정당화하지 못한다. 이는 앞서 설명한 대로 당연하다. 내가 구조적으로 설득하지 못하는 사람과는, 공식적으로 대립해야만 한다. ‘공식’이라는 단어에는 나의 모든 사적인 정서가 들어가야 한다. 사회는 대립의 연속이어야 한다. 설령 나 혼자뿐일지라도 다수에게 도전하겠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행복할 수 없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자연법칙을 훼손하지 않는 사회상이 혁명을 관용하는 이상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이러하다.

이런 투쟁의 사회에서 각자는 각자의 사상을 필두로 서로에게 끊임없이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지배계급이 변혁할 것이며 상하관계가 항상 뒤바뀐다. 아무도 군림하지 못할 것이다. 지배 사상의 변화를, 비록 동의하지 않더라도 관용하는 사회여야 한다. 이것을 혼란스럽다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고요하게 죽어가는 것보다는 시끄러운 두통을 지니고 사는 게 낫지 않겠냐’고 말하고 싶다. 고요한 죽음이 더욱 나은 사람들이 있다면, 나를 이기면 된다.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나에겐 평화보다 의미 있는 것들이 많기에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이 결투는 흥미진진할 것이다. 나와 다르다고 남을 인간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견만 버리면 된다. 하지만 이것들 모두 망상이고 나 역시 입헌군주제 한국과 신성의 노예가 될 것임이 유력하다. 극단적인 이상 세계를 구상해야 할 만큼 사회의 문제가 베베 꼬여있다.

내 글의 핵심은 이러하다: 피지배계층 (소수)의 자유를 위해서는 그들이 직접 지배계층 (다수)와 대립해야 한다. 통치하는 자는 존재하되 아무도 군림할 수는 없다. 그것이 군더더기 없이 실행되려면 나의 방법이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이것의 실현이 어려워지도록 수많은 작업이 이루어진 지 오래이다. 그로 인해 이미 수많은 사람들은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정설로 생각한다. 자신이 왕을 섬기는지도 모른다. 자유를 얻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슬프다. 그러나, 눈물은 불복종을 막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