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격하 운동

독서 감상문 -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by 오또쭈

양심상 평화가 존재하며 그것이 좋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평화는 그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소말리아의 아이들에게 평화가 좋다고 설교하는 일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한 오만이다. 평화는 안전하려는 인간의 욕구 중 일부이다. 평화만으로는 모든 불행을 해결할 수 없다. 그런데 평화는 다른 모든 의견을 묵살하고 침묵시키려는 파괴적인 습성을 지니고 있다. 많은 이들이 고요한 폭풍에 삼켜져 목소리를 잃었다. 만약 더 큰 행복을 위해 내 몸의 일부를 포기해야 한다면,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평화에 대한 욕구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일석이조이다. 세계 정상 국가들은 다수결의 힘을 이용해 제국주의를 이어나가고 있다. 차라리 사람들의 생각을 탄압하는 그 위선을 버리고, 악으로써 자신을 표명한다면 나는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현대의 지배 계층이 어떻게 사람들을 벙어리로 만들었는지 그 역사를 살펴보며 조사했다. 이 자료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단서를 줄 것이다. 이 글은 누가 더 선한지를 설명하지 않으며,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만을 말한다. 장 지글러가 걱정하는 이 시대의 사상을 파헤쳐보자.

평화가 적어도 지금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것들은 그것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먼저 근대의 공산주의를 예로 들어보자. 마르크스가 구상한 공산주의와 이후 레닌의 공산주의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노동자가 자신을 대표하여 자발적으로 일으키는 혁명이라 보았다. 그러나, 레닌은 이와 반대되는 주장을 한다. 지배계급과 혁명가 사이에는 다른 종류의 계급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소시민 계층이며, 이들은 지배 계급의 논리에 쉽게 잠식된다. 이러한 소시민들은 부르주아를 옹호하며, 과거의 파시즘과 현대의 민주주의의 옹호자들로 변한다. 레닌은 생디칼리즘을 비판하며 전위당론을 주장하였다. 이는 총체적인 볼셰비키 혁명과 적백내전을 일으켰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사람들이 체제에 익숙해질 때까지만 그들을 돕는 버팀목으로 보았지만, 스탈린주의는 이것을 중앙집권화된 불멸의 체제로 보았다.

중요한 것은 근대 공산주의의 실패가 반대 의견을 묵살하는 정책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레닌주의는 분명 마르크스주의를 보다 현실적으로 보완한 방법이다. 계급 혁명은 자신과 같은 계급을 위해서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데 나와 같은 계급인데도 지배 계급에게 세뇌당하여, 그들의 사상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최대한 덜 다치도록 구원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강압과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소시민이 자신을 위한 합리적인 선택을 내릴 정도의 위인이었다면, 진작에 세상은 유토피아였을 것이다. 설령 불만이 있더라도 삶의 의미가 보장된다면, 한국에서의 높은 자살률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소련이 실패한 이유는 경제와 자본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것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동지를 배반했다는 것이다. 계급투쟁을 일으켰다면 자신과 같은 계급과는 동료이다. 뜻이 같은 개개인이 협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사회 통합 이론보다 훨씬 더 좋다. 가치관이 다를 때, 그것을 빌미로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은 허용할 수 있으나, 나와 가치관이 같은 사람과는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에게도 이익이다. 하지만 소련은 직접 민주주의를 실행하지도 않았고, 일국 사회주의론과 전체주의에 빠져버렸다. 자신과 같이 혁명에 동참한, 자신과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묵살하였다. 혁명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초월하는 것이 목적인데, 본질을 잊은 것이다. 이것은 평화를 침해하는 혁명이 오해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 평화를 추구함이 당신의 본질이 아니라면, 평화라는 지배 사상에 반항하는 것이 당신의 본질이다.

공산주의의 비유를 통해 평화보다도 폭력이 필요한 이유와, 혁명의 실패가 폭력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전부 평화보다 중요한 게 있는 사람들을 위한 말이다. 누군가의 인생의 유일한 행복이 평화의 실현이라면, 그들을 위한 고민도 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평화라는 건 오늘날 존재하지 않으며, 이미 계급들은 서로와 싸우고 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번엔 아랍 국가들로 비유해 보겠다. 80년대 사담 후세인은 철권통치와 세속주의를 통해 국가를 더욱 부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후세인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협력했다. 다른 이들과 투쟁하고, 다른 이들을 학살하여 자신의 이익을 얻는다. 호메이니는 시아파를 아랍에서 부흥시키려 한다. 시아파의 성장을 위해 주변 국가의 체제를 위협했다. 고로 그도 이익을 얻는다. 후세인은 쿠웨이트 없이는 나라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전쟁만이 자신의 집단을 위하는 행위이다. 전쟁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 한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를 포기할 수 없다. 고로 참전하여 이익을 얻는다. 몇 년 후, 2001년 9월 11일, 미국은 기분이 상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기분이 상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화풀이가 그들의 이익이다. 고로 후세인을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각자의 이익이 있다. 각자의 사상이 있다. 이 사상들은 선천적으로 그들에게 각인된다. 이것들은 융화될 수 없다.

평화가 있다면, 그것은 지배된 세상의 풍경이다. 굶주리고 배고픈 이라크 사람들의 식량 위기를 해결해 주는 사람은 없다. ISIL로부터 자신을 구해줄 용병을 구하려면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냥 도운다면 그것은 남을 위해 베푸는 국가여야 한다. 그런데 그 국가조차 보수 진영을 무릎 꿇린 후에나 그들을 도울 수 있다. 투쟁은 당연하고, 이해관계는 다양하다. 그것을 왜 우리는 생소하고, 염세적인 편견으로 바라볼까? 바트당과, 이란과, 미국 중에서 가장 건강하지 않은 국가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익은 하나, 자신의 기독교적 정당화이다. 그 근거들은 말도 안 되며 형편없다. 그 근거들은 고스란히 대한민국에 전해졌다. 미국이 떠벌리는 것들 중 진실이 있기는 한가? 투쟁을 한다면, 그 이유를 공개해야 한다. ‘우리는 후세인이 우리를 조롱했기에 그를 죽이러 왔다’고 고백해야 한다. 그것에 명분이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정당한 경쟁이다. 그러나 ‘권리’나 ‘테러 방지’와 같은 온갖 거짓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포장하는 위선이야말로 참혹하다.

거기다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말하면서 법에 도덕성을 부여하는 것도 이상하다. 차라리 도덕을 노골적으로 강제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렇지 않다면 법은 법대로, 도덕은 도덕대로 되어야 하며, 인권이나 처벌 같은 것은 체제 안에서만 규정해야 한다. 굶주리는 외국인들에게 부유국들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이는 부유국들이 자신의 악을 인정하며 자신의 이익을 표명하고, 지배 관계를 선포하면 정당화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착한 행세를 하며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는 아무것도 안 한다면, 기조도 없고 의미도 없는 사라져야 마땅한 공동체이지 않겠는가? 지글러는 자본주의를 경계한다. 자본주의는 경쟁 관계를 초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본주의가 반인륜적이다고 경고한다. 나는 약간 관용적인 태도로 그냥 반인륜적이게, 당당하게 살자고 말하고 싶다. 노사 갈등과 정치적 투쟁, 세대 갈등이 더욱 활발히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 사회의 통합은 무산되어야 하며, 이제 국가는 서로의 이익 투쟁의 장이 되어야 한다. 만약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평화롭기에 합당한 사회를 만들라. 현재에는 그러한 사회가 없으니 당신의 몫이다.

나세르주의는 아랍의 정체성을 필두로 투쟁한다. 이스라엘, 이란, 팔레스타인등은 자신의 종교를 필두로 투쟁한다. 나는 내 주변인들이 이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종교나 그런 민족주의 같은 것들 때문에 전쟁하는 게 말이나 되냐고 말이다. 그런데, 나는 아랍 국가들이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국가처럼 보인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도와주는 이슬람교와 유대교가 부럽다. 그들은 당당하고, 하나의 신조가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제 그만 노예에서 벗어나고, 지배 계급을 향한 혁명을 시작하는 것은 어떠하겠는가? 서로가 서로를 잡아 뜯는 이상 세계, 결함이 없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일단 완전한 분열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모두가 자신의 입장을 고백했으면 한다. 이미 지글러의 주장대로 자본주의의 도덕적 결함은 명백히 드러났다. 카다피는 이렇게 주장한다: 부유국들은 과거 식민지시절부터 지금까지 항상 아랍의 혁명과 이슬람에 반대한다. 방식만 달라졌을 뿐이다. 소말리아의 자기 방어와 빈 라덴의 보복을 겪고 단순히 테러와의 전쟁밖에는 떠올리지 못하는 민주주의 시민들에게 조금 더 넓은 시각을 보여주고 싶다.

나는 국가들에게 위선적인 선행을 가장하지 말고, 차라리 악을 인정하라고 주장한다. 굶주린 이들을 신경 쓰는 척하는 것이야 말로 더 큰 해악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은 상대적이지만, 거짓은 그냥 거짓이지 않은가? 거짓이 정말로 사라졌으면 좋겠다. 헛된 희망을 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러다가 남겨진 굶주린 이들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대할지 고민이 생겼다. 지금까지 나는 이 책을 읽고 국가가 굶주린 사람들을 대할 태도에 대해서 글을 썼는데, 나의 방법을 사용하면 정작 굶주린 사람들은 방치될 것이다. 이들을 구원하려면 역시나 투쟁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겠는가? 앞으로 나의 과제는 내가 어떤 사람을 더 중요시하는지 아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자기 객관화와 성찰을 통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어야 한다. 언젠가, 완벽한 지배 계급이 일어설 수 있다면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다. 굶주리는 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매우 어려운 과정일 것이며, 짜내어진 민주주의의 거미줄은 너무 질기다. 나의 본질과, 그 본질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더욱 탐색해야 한다. 나에게도 숨겨진 목소리가 있을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지배 계층에게 당했을 것이다. 계속 의심하고, 계속 성찰하고, 계속 시도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관점을 공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