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의 데드라인

독서 감상문 - <공산당 선언>

by 오또쭈

세계의 공장과 기업들은 전부 ‘완전 기계화’의 수순을 밟고 있다. 90퍼센트의 직업은 대체가 가능하고, 대체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인간의 계산 능력은 더 이상 효율적인 생산수단이 아니며, 인간 노동력의 가치는 수직하향하였다. 이제 자본은 어떻게, 어느 방식으로 교환되어야 하는지, 어떤 사고방식과 목표를 가지고 행동해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마르크스의 설명을 읽고 떠오른 나의 생각을 적어보겠다.

우선, 기계화를 막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자리가 없으면 사람들이 돈을 벌지 못할 텐데, 기계화는 반인륜적이지 않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기계화가 왜 필연적인지에 대한 내 생각을 쓰겠다. 우선, ‘가치’를 정의해야 한다. 각자에겐 어떠한 결핍이 있으며 그 결핍을 해소하면 행복을 얻게 된다. 행복은 자신을 위한 보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상을 추구한다. 보상은 자연적인 무엇인가가 노동이라는 작업을 거쳐 변화한 결과다. 결핍은 선천적이기에 보상의 기본적인 가치는 일정하다. 작업은 노동력을 요구하는데, 노동은 자신의 보상을 소비해야 구입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은 노동을 교환해야만 보상을 얻는다. 자신의 보상을 상대의 보상과 교역한다. 이 보상은 한 사람의 인생의 전부다. 가치보다 중요한 것은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가치는 인륜적이다. 가치를 증진하려면 노동력을 더욱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 그 방법은 노동 시간을 단축하고 보상 소비를 최소화하는 것 둘 뿐이다. 가치가 ‘나’ 그 자체이기에 가치의 증진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 반인륜적인 것이다. 따라서, 노동 시간 단축과 보상 소비 최소화를 제외한 다른 요소를 작업과 교역에 부여하면 안 된다. 기계화는 이 두 가치를 반영하기에, 이를 효율적으로는, 그러니까 인륜적으로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개인마다 결핍은 다양하다. 기계화로 인해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갖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가치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다.
“나는 이 사람들의 일자리를 지켜주는 것에서 가치를 얻는데, 내 가치가 부정되니까 이건 반인륜적인 것이 아닌가?”
이것은 딜레마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기계화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 즉 직장인이나 농부등은 생산수단이다. 기계화가 되면 생산수단은 로봇과 A.I등으로 바뀐다. “생산수단이 인간이 아니면 안 된다”라는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기계화는 단순한 생산수단의 변화이다. 생산수단의 변화는, 본질적으로 보았을 때 ‘대체’ 일뿐이지 다른 인간을 교역에서 제외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기계화로 인한 인프라가 제대로 갖추어진다면, 그러니까 기존의 직업을 잃어도, 인간은 계속해서 보상을 사고팔 수 있다. 시장은 인간 중심이기에 인간이 총책임자로서 지휘해야 하니, 기계화 이후에도 인간은 자신의 ‘사유’를 판매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을 교역에서 제외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소유 구조의 결함이다. 모두의 보상을 강탈해 가는 그 요소는 대체 무엇인가? 생산수단을 사로잡고 있는 사람들, 세습하고 군림하는 사람들… 상류층인 부르주아 계급이다.

부르주아들은 생산수단의 독점권을 쥐고 있다. 분명 인간을 기계로 대체하면 모두가 이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익을 기업인들이 독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자유’라고 한다. 부자를 위해서 움직이는 사회를, 파시스트들의 사회를 자유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제 세상은 부르주아 독재로 향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이것을 위한 이념이었다. 그것의 모든 성질이 그러하다. 생산수단의 자동화가 사회 전체의 이익이 될 수 있음에도, 이익을 독점한다. 과거에는 부르주아에게서 돈을 받고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계화를 완전히 장악한 지금, 그들은 더 이상 아무에게도 돈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보상을 담보로 두지 않고도 보상을 생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세상의 그 모든 국가들은 자본으로써 움직인다. 국가는 인간의 공동체이기에 가치로써 작동하는데, 그 가치를 전부 가져간 사람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독재를 위한 길을 성공적으로 개통하였다. 이미 아스팔트는 전부 굳었다. 화폐는 가치를 상징하는 물건이지 가치가 아니다. 가치는 다양하기에 그것을 전부 공통분모로 만들기 위한 도구가 돈이다. 돈을 버는 것에 대한 제한이 있더라도, 다양한 가치를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 자유 아니겠는가? 우리는 부르주아의 설탕 발린 입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자유다”를 귀가 터지도록 많이 듣는다. 그런 말들이 만들어낸 신자유주의는 모순이며, 그것 같은 성격은 최대한 탄압되어야 한다.

노동자, 프롤레타리아에게 곧 사형이 집행된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는 그 인상과는 달리 자유롭지 못하다. 민주주의는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체제이다. 그런데 국가들은 국민을 마음껏 선동하여 거짓을 가르치곤, “이것이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라며 고작 대통령 선거 결과를 자랑한다. 그들은 히틀러와 스탈린과 같다. 우리에게 ‘나’보다도 우선시할 대상을 만들어준다. 우리는 가치보다도 돈이라는 도구를 우선시하게 되었으니, 이 사회는 완전한 전체주의이다. 그들의 가스라이팅을 내던져야 한다. 이제 지배 계급은 더욱 견고해졌으며, 곧 모든 부가 그들에게 향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엄한 자기 자신을 탓하다 굶어 죽을 것이다. 프티부르주아, 그러니까 소시민들은 과거 근대 공산주의 운동에 별로 공감하지 못했었다. 그 당시 부르주아가 대체할 수 있던 생산수단은 신체적인 노동이었지 지능적인 노동은 견고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과 같은 소위 ‘인텔리 계급’도 확정적으로 죽을 것이다. A.I는 그들의 지식과 지능을 확정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 결국 부르주아를 제외한 모두는 허무해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들에 대항한다면, 혹시 모른다.

가치를 완전하게 추구하기 위해 계급을 없애고 진짜 보장된 자유를 만들어야 한다. 진짜 민주적인 공산주의가 2세기가 지나서야 드디어 합리적인 대안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공산주의가 안 좋게 느껴지는 이유는 소련, 중국, 북한 같은 공산 국가들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크게 우려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공산주의가 독재 없이는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은 큰 거부감을 부른다. 소련의 스탈린주의와 중국의 마오주의, 북한의 김 씨 세습은 최악의 독재이다. 그런데, 이러한 독재 유형은 전혀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부르주아 반항을 막기 위한 장치이다. 위협은 탄압하지만, 내부에는 관용적이다. 필요가 사라지고 모두가 동의한다면 독재는 폐지된다. 독재하는 정부는, 정부의 폐지를 위해서 움직인다. 그들은 오직 통치할 뿐, 군림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 3국의 경우는 어떤가? 그냥 황제들 아닌가? 같은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고, 명분과 돈에 집착하는 모습은 그냥 파시즘이다. 공산주의의 핵심은 계급의 폐지임을 창시자인 마르크스가 거듭 강조하는데도 이는 무시당한다. 공산주의의 핵심인 민주적 요소인 직접선거와 자본 분배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의 공산당은 공산주의의 이름만 빌렸다. 그들은 파시즘 국가를 만들었고, 새로운 부르주아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공산주의는 그냥 극우의 한 모습이다. 부르주아가 만들어낸 편견을 타파하고, 진짜 공산주의를 실현할 기회는 지금 뿐이다.

이미 기술은 크게 진보했다. 어쩌면 내가 성인이 되어 뭔가를 해보기도 전에 모든 부가 상류층에게 넘어갈지도 모른다. 그만큼 프롤레타리아는 위기에 몰려 있다. 내가 적은 만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부르주아를 저지할 대책을 당장 내일이라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이 글은 나의 생각과 추론일 뿐이지만,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이는 미래이다. 어른들이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행동을 개시하기를 애원하는 마음으로 감상문을 작성했다. 요즘 국가들의 인프라와 경제는 공산화가 되어도 충격이 적을 정도로 잘 발달하였다. 남은 문제는 사람들이 정말로 행복하게 살 의욕이 있는지이다. 가치를 원한다면, 빨리 움직여야 한다. 데드라인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