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없는 사람

독서 감상문 - <자본론 1[상]>

by 오또쭈

가치는 무언가의 값이다. 그 값의 출처는 생명, 그러니까 특정한 자가복제하는 분자이다. 분자는 전략을 갖고 태어나고, 몸은 이에서 파생되어 군대와 같이 움직인다. 추구하는 것은 전략에 해당된다. 전략을 다른 말로 하면 ‘적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정당화’도 좋은 표현이다. 인간은 적응을 사랑한다, 적응 없이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이러한 적응 과정은 추구를 향한 것인데, 추구는 두 분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선천적인, 그러니까 전기 신호를 바탕으로 나머지 몸에게 지시를 내리는 ‘감각’이라는 주된 전략이다. 다른 하나는 후천적이며 적응 과정에서 발생하는 습득된 것이다. 선천적인 것은 기본 욕구이다. 이때, 기본 욕구는 생장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인간마다 고유한, 태어났을 때부터의 열정 또는 감각을 의미한다. 후천적인 것은 그러니까 기본적인 감각을 벗어나, 적응을 통해 뇌가 직접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은 인간의 고유 전략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많은 돈을 벌어 좋은 집과 차를 사는 데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태어났다고 해보자. 자본주의를 채택한 국가의 학교에서는 사치를 일반화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뇌는 적응을 사랑하여 돈을 쓸 때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더라도 행복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의 대비이다. 가치의 값은 그것이 무엇이든 적응하고 추구할 때 발생한다. 이러한 사례는 철학, 도덕, 정치, 경제 등 많은 곳에서의 오해를 부른다. 이 글에서 나는 책을 읽고 느낀 것을 토대로 이 오해들을 하나씩 검토해 볼 것이다.

우리 시대의 가치에 대한 고찰을 시작하겠다. 착함과 나쁨이 필연적으로 상대적임은 의심할 수 없다. 이것의 근거는 나에게서 찾을 수 있다. 내가 느끼는 것과 보편적인 도덕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의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 도덕적 상대주의를 변호하겠다. 사람들이 이것을 비판하는 데 사용하는 가장 편한 근거는, 바로 현시대에서 대부분의 사회가 비슷한 도덕 원리를 따르고 있다는 말이다. 도덕이 이렇게 보편적인데, 어떻게 상대적일 수 있냐는 주장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선 종교를 파고들어야 한다. 종교는, 가장 원초적인 도덕이다. 사회는 종교로 결합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면 결합되기 전에 있었던 느슨한 관계,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국가의 시초는 무엇이며 종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발생설은 4분의 1만 맞다. 사회 계약론 같은 것은 나머지 4분의 1이며, 루소의 생각과 달리 앞서 설명한 후천적인 적응 과정에 해당한다. 이 둘은 절대로 1의 값을 대표할 수 없으며, 이에 대해 내 생각을 설명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사회적인 본성이 있어 본능적으로 공동체 생활을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명 전의 인류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 인간 공동체는 지극히 선택적이었다. 규모는 오직 효율을 따랐으며, 가치를 얻기 위한 일부만의 전략이었다. 공동체는 절대로 보편적인 본능일 수 없다. 인간이 본격적으로 사회적 동물이 되기 시작한 것은 이들 중에서 공동체가 본능인 감각을 갖고 태어난 이들이 등장했을 때이다.

생명체가 가치를 얻기 위해 채택한 전략은 분자의 복제를 위한 설계이다. 이 전략은 반드시 옳지 않으며, 더 성공적인 전략을 가진 개체가 등장하면 쉽게 경쟁에서 이긴다. 사회적인 본성의 인간들은 착취에 매우 유리하다. 그들은 쉽게 자신들을 확장해 나가고, 매우 편하게 자신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 구조를 획득한다. 인류는 원래 사회적인 동물이 아니었음에도, 사회적인 일부의 생존 전략은 손쉽게 다른 이들을 지배하였다. 선천적으로 굴복할 수 없었던 개체들은 후천적인 과정으로 뇌에 굴복이 심어졌다. 사회적인 개체들은, 자신들의 적응을 충족하기 위해서 자신과 피지배계층들 모두를 정당화할 수 있게 할 새로운 논리 구조가 필요했다. 모두를 효과적으로 총괄할 수 있는 그것이 바로 종교이자 이후 도덕이었다. 이에게 익숙해진 유전자를 가진 이들의 후손은 점차 이 도덕을 선천적으로 받아들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자연스레 습득하였다. 이러한 도덕 원리로서의 사회 구조는 점차 팽창하여 보편적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보는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아직 이러한 팽창이 완료되지 않아 발생한 것이다. 그러니까, 도덕적인 것은 보편적이지만 착취로 이루어졌으며, 이 상대적인 사람들을 공리주의의 늪에서 깨어나 바라볼 경우 도덕적 상대주의는 정당화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더 쉽게 설명할 방법은 노예 인식에 대한 예시이다.

조선의 노비 계급을 보아라. 노예는 나쁜 것이니, 옛날 사람들은 모두 나쁜 사람들이었거나 높은 계급의 사람들의 지배 사상에 당했다는 생각이 드는가? 조선 시대의 노비는 1500년 동안 존재했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이것을 노예 사회라고 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표한다. 왜 이렇게 뻔한 것을 의심하는가? 필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일 것이다. 인권은 새로 개발된 도덕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노비가 당연했다. 노비는 자신의 처지가 당연하다 여겼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공산주의 이야기를 했다면, 왕이 아닌 백성들에게 직접 얻어맞았을 것이다. 계급이 도덕이었기 때문이다. 노예가 도덕적이지 않은 것 같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더 이상 도덕은 그렇게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님을 이미 증명했으니 말이다. 계급이 당연시되다가 무너진 이유는 무엇인가? 피지배 계층의 정당화이다. 그것을 통한 이익 투쟁이다.

미국은 독립을 할 때 거주민들의 이익을 위해 싸웠다. 이를 보고, 프랑스의 국민들은 영감을 받았다. 그런데, 미국 혁명과 달리 프랑스혁명은 국가전체의 이익이 아닌 하위층만의 이익이다. 중앙집권적인 사회에서 국민들의 반항은 도덕적이지 않다. 국가의 균형을 무너트리는 일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이익이 필요했다. 이익을 위해, 새로운 도덕 이론을 만들었다. 인권이라는 새로운 도덕이 개발되었다. 자신들의 이익과 잘 섞였기에 곧바로 적응하였다. 이후, 이것이 퍼져나가 조선에 도달했다. 백성들은 자신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깨우쳤다. 자신의 이익이다, 그러니 믿는다! 적응한다! 후천적이든, 선천적으로 그런 기질이 있든 간에 심어졌다! 종교에 대해선 성경과 쿠란, 반야심경 등을 읽고 나서 생각해 볼 것이기에 확실하게 주장하지는 않겠지만, 종교를 왜 믿는지 조금은 알 것 같지 않은가? 어쨌든 이렇게 새로운 이익 투쟁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조선은 순식간에 새로운 도덕을 얻었다. 이후, 조선의 학자들은 이 새로 개발된 인권을 토대로 공산주의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 짜릿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이후, 새로운 대비들이 피어올랐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있다. 무엇이 더 ‘도덕적’인가? 말하기 전에 지금까지 설명한 도덕을 제대로 정의해야겠다. 도덕은, 적응을 위한 가치이다. 가치는,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든 가치이려면 이기적이어야 한다. 도덕은 이기심이다. 소중한 가족과 위대한 영웅들, 불쌍한 소수, 귀여운 개고양이를 사랑하며 그들에게 나의 돈을 줄 때, 그것은 반드시 나의 이익이지 않은가? 조두순이 사형될 위기에 처했을 때 돈을 써서 그를 구할 수 있다면 당신들은 생명이라는 개념이 소중하다 생각한다면서도 조두순은 악하기에 죽이려 들지 않겠는가? 감각도 가치의 일부이다. 어쩌면 전부이다. 당신은 가치 없는 것에 손대지 않는다. 가치는 단순히 돈이 아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의 주장들을 고려하겠다. 돈이라는 것은 가치이다. 그러나, 가치는 상대적이기에 돈은 가치 중 일부이다. 단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을 숭배하니 후천적인 과정을 거쳐 최고의 가치로 등극한 것이다. 그런데, 자본이라는 가치는 매우 수상하다. 자본은 돈의 축적이기에 그것도 가치 중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자본 없이도 가치는 존재한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자본을 제거했을 때 사회의 가치가 상승한다고 말한다.

자본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생산 및 노동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한 사람의 가치는 그 과정에서 소비된 노동력과 같다. 이때, 이 노동력을 통해 생산된 가치의 총량 안에는 그 생산에서 사용된 생산 수단과 노동 수단이 포함되어 있다. 가치는 노동의 전환이기에 이 둘의 값은 같다. 그런데, 이윤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일까? 노동력보다 더 큰 가치를 얻는 게 말이 되는 것일까? 이것이 마르크스가 경계하는 자본의 성격이다. 가치는 자연 상태로 존재한다. 가치와 가치의 거래는 개인의 상대적인 욕구의 차이이다. 그러니까, 부는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교환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재능이 있다면 그 재능으로 자신이 잘하는 노동을 행하고, 거기서 얻은 가치를 자신이 원하는 가치와 교역 거래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의 경우는 다르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윤으로써 이루어진다. 이 이윤이 만들어지려면 반드시 누군가가 노동력에 비해 합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자본이라는 가치는 착취로써만 생긴다는 말이다. ‘공정한 경쟁’이라는 말은 표준적이지 않다. 선천적인 요인으로 인해 무조건 계급이 생긴다. 개인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는데도, 오로지 한 가지 기준으로써 매우 안정적이게 판단한다. 이것이, ‘공정함’이 자본주의자들의 도덕이다. 마르크스는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노동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노동을 통해 생산된 가치가 합당한 과정을 거쳐서 이익이 되는 사회를 꿈꾼다.

당신이 인류라는 개념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이념의 손을 들어주어야겠는가? 자본주의인가, 공산주의인가? 안타깝게도 이 우주는 당신의 거처가 아니다. 앞서 공산주의의 의의를 설명한 것을 토대로 공산주의의 편을 들어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공산주의도 하나의 도덕이다. 도덕은 이기심이고, 자본가의 이기심과 노동자의 이기심은 서로 융화될 수 없다. 바로 선천적인 요인 때문이다. 당신이 뛰어나게 태어나 다른 사람들을 손쉽게 착취할 수 있다 해보자. 그렇다면 삶의 의미를 얻기 위해 이윤을 쫒아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의 노동력에 대한 대가를 받으려면 상류층이 되어야 한다. 반대로 평범한 방식으로 노동력을 소비하는 사람이라면, 본질적으로 착취를 해야만 하는 계급 사회를 탄압해야 하지 않겠는가? 부르주아 독재나 프롤레타리아 독재 둘 중 하나만 존재할 수 있다. 모두가 공평하게 태어나지 않았기에 세상은 계급투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계급들은 서로 공평하게 자신들의 노동력에 대한 가치를 환급받을 수 없다. 따라서,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질 것이다. 무엇도 덜 도덕적일 수 없다. 누군가는 손해를 보는 세상이다, 평화가 수학적으로 거짓이다. 결국 삶의 의미를 찾으려면 최대한 가치를 쫓아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 선천적인 가치든 후천적인 가치든 버릴 건 버리고 가질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에 속지 말고 최대한 사유해서 사수해야 한다. 자신만의 도덕을, 자신의 이기심을 찾아야 한다. 아, 그렇지만, 이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불행하기도 전에 행복에 관심이 없는,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기적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이 글을 쓴 이유는 그 사람이 나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가치와 가치를 나타내는 개념인 도덕, 그리고 이것들을 잘 나타내는 이념인 마르크스주의를 하나씩 연결 지어보았다. 마지막으로 논의할 가치는 나의 대한 가치이다. 나는 열정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다. 학교에서 나의 꿈을 쓸 때,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것들을 쓴 적이 없다. 단지, 후천적인 적응의 결과였다. 모두가 열정이 있어 보였다.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열정이 없는 유전자는 지금까지 살아남기 힘들다. 당연히 인간에겐 원하는 게 있다고 생각했다. 무지한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내세우는 거짓된 자유를 보고 공산주의에서 보다도 많은 가치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사람들이 합리적인 가치를 얻기 위해서 공산주의 사회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지금도 변함없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가치들에 대해 생각해 보니 딜레마에 빠졌다. 내가 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좋게 생각한 이유는, 그것이 나의 이익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재능이 있지만, 딱히 돈을 벌고 사치를 부리는 데에 관심이 없다. 고시원에서 살며 전철만 타고 평생을 살아도 딱히 상관없다. 그리하여,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를 얻을 수 없을 것이었다. 나는 돈이 제일의 가치인 사회에서 이기적일 수 없었다. 대신, 가치가 정당한 값으로 교환되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내가 원하는 가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성찰을 해봐도, 내가 원하는 가치는 없다. 분명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에도, 그 모든 것 중 내가 관심이 있는 게 없다. 인류는 노동력으로써 이루어지는데, 내 노동력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아까 내가 보편적인 도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 즉, 나는 이기심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 무엇을 하든 내 이익이 없다. 내가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거나 좋아하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가 어떻게 변화하든 나에게 도움 되지 않는다. 나와 달리 신념과 열정이 있었던 히틀러 같은 사람들이 부러워질 지경이다. 아이들이 죽고 옆 나라에서 민간인을 학살해도 분노가 안 느껴지고 그러려니 한다. 가족이나 친구나 종교, 그리고 이젠 이념 같은 것에 관심이 없어졌다.

지금 나를 죽음으로부터 붙드는 것은 이성이다. 후천적인 가치들, 그러니까 삶을 살며 적응되는 가치들은 쉽게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선천적인 가치들은 거의 평생을 함께한다. 그런데도 나의 선천적인 가치들이 하나씩 사그라들고 있다. 책을 읽는 것은 질리지 않기 때문이지 지식을 좋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정말로 글에 열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쓸 때 오히려 생각을 덜 하게 되기 때문이다. 잠을 잘 때와 같다. 가치를 찾지 않아도 되는, 내 뇌가 소멸하는 상태만이 나를 편안하게 한다. 따라서 독서와 글쓰기는 후천적인 가치이며 이것이 나를 구원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의 선천적인 가치는 기본적인 것들, 그러니 먹고 자는 것 말고는 없다. 외로움도, 우울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식욕조차 거의 없다. 선천적인 가치가 감소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자는 것 말고는 하고 싶은 게 없다. 하다 하다 죽음의 두려움도 점점 무감해지며, 나는 오직 나의 삶을 내 뇌의 차가운 계산에 맡기고 있다. 아직 남은 욕구들이 있기에 자살은 비효율적이다라는, 감정 없는 수학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면 알아서 생각해도 상관없지만 이런 고민을 할 때 두려움이 안 느껴진다. 자는 것은 죽는 것과 달리 생각의 소멸을 ‘느낄’ 수 있기에 합리적인 가치이다. 단지, 충분한 가치가 아니기에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난 내가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생각한다. 단지 열정이 생물학적으로 없는 것이다. 나는 싫어하는 것만 많고 좋은 것은 거의 없다. 또한, 싫어하는 것을 없애는 그런 삶은 합리적인 가치가 아니다. 나는 이기적이고 싶은데, 이기적일 수가 없다. 합리적인 삶을 계산하기 힘들다. 그나마 떠올린 것은 나 홀로 조용히 자연에서 사는 것이다. 원하는 것으로써 움직이는 이 공감되지 않는 사회를 벗어나 원하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산다는 대안이지만,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단지 물리 법칙으로 인해 발생한 작용이기에 이렇게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사람들은 노동력이 있고, 그것은 인간에게 가치를 준다. 따라서, 그 사람들은 가치 있는 사람이다. ‘가치가 없는 사람’은 흔히 생각하는 우울하고 자괴감과 죄책감을 가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자신을 한탄할 때 쓸 말이 아니다. 가치 없는 사람은,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