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감상문 - <성경>
하느님은 실존한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인들에게 제기해야 할 것은 유치한 과학적인 부정이 아니다. 그가 우리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둘 이유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분명 이 사유를 통해 인류 최대의 가치가 창출되리라 생각한다. 성경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느님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창세로부터 시작하자.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의 표현은 이러하다.
‘표징과 절기, 날과 해를 나타내어라’ ‘그 가운데에서 큰 빛물체는 낮을 다스리고 작은 빛물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분명 자연을 매개로 인간이 도구로써 쓰고 이용하는 것들이다.
‘하나님의 영이 그 위를 맴돌고 있었다’
레위에서는 먹어도 되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할 때 이런 구절이 반복된다. ‘그것들은 혐오스러운 것이니 먹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 부정한 것과 정결 한 것이라는 대비를 사용하는 것이 그의 정체를 알기 위한 핵심적인 단서이다. 하느님의 판단에는 감상이 따른다. 이러한 형용사들 중 가장 처음으로 사용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보시기 좋았다,’ “좋음”이다. 성경에서 반복하여 강조하는 하느님과 우상숭배의 차이는 하느님이 만물이자 진리라는 설명이다. 이 모든 것을 규합해 야훼의 정의, “있는 나”의 정의를 알 수 있다. 하느님은 유대인들에 의한 물리 법칙의 표현이다. 하느님의 좋음은 이치와 필연의 움직임, 사물의 질서를 유지하는 합리성 그 자체인 것이다. 하느님이 반드시 실존한다는 것은 이러한 인식에서의 실존을 의미한다.
인간은 왜 그냥 간단한 단어로 물리를 설명하지 않고 신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한 걸까? 이는 이성의 성질에 의해서이다. 이성은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그 즉, 무언가의 본질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앞으로 설명할 것들을 내가 옹호하는 것이 아니며 이후 내가 비난할 대상들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이성을 통해 밝혀지는 본성이다.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텔로스는 비록 스승과 달라 보이지만 결국 목적이라는 본성이다. 칸트는 이성을 통해 보편적인 도덕 법칙이라는 본질을 찾는다. 애가에서
‘저희 때문에 너무도 화가 나셨습니까?’
분명 모든 것이 계획인 존재가 분노를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으니 그러하지 않을까? 분노를 야기한 것이 자기 자신과 같은 성질이라면 가능하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하느님의 법칙은 바로 이성으로써 야기되며, 유대인들은 물리 법칙을 이성이라 여겼다. 동물과 인간의 유일한 차이점이 바로 이성이기 때문이다. 만약 하느님이 다른 모습이었다면, 그러니까 하느님과 인간의 공통점이 나머지 동물들과도 공유되었다면 위의 구절이 더 일찍 나왔을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이미 만든 동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예수는 동물적인 성격과 이성이 섞인 인간과 완전한 이성을 지는 하느님의 차이를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아갈 수 없다.’
이성이 생명 그 이상으로서 숭배됨을 나타내는 구절이다. 앞서 말한 철학자들은 이성과 지혜를 최상의 것이라 여기며, 하느님이 베푸는 자비는 인간에게만 해당된다. 신자들과 철학자들의 인간과 자연을 향한 정당화, 그러니까 선천적인 것을 사랑하는 행태를 “인과”라 하며, 이것의 파생은 종교, 도덕, 사상, 이념, 전통, 법이 있다. 다른 말로 “세계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과보다 원리를 사랑하는 것, ‘본연의 가치’를 생각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위 3명의 철학자들은 [물리 법칙=이성]이라 여겼으며 이때 유대인들이 공식에 새로운 수를 더했으니 [하느님=물리 법칙=이성] 이것이 x라 하자.
이때, 인과의 사고방식으로 인해 x를 따르며 사는 것이 정당화된 것이다. [인과=적응=정당화]를 y라 하자. x는 y에 따라 일정하게 변하는 함수이다. 이때 중요한 점은 x는 반드시 일정한데 이는 그냥 이미 있는 것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y는 옳지 않은 것일 수 있으니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재의 문제를 수학 문제로 표현하면 x가 주어졌을 때 식을 만족하는 y를 찾는 것이다. 만약 내가 성경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y를 건들어야 하며, 앞으로 쓸 것들은 그것을 위한 과정이다. (이 비유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자신의 법칙을 변호하는 데에 하느님은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느님은 이치이기에 = 따라야 한다 라는 인과적인 사고방식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에게 있어 인간의 보존은 곧 이성의 보존이므로 소중하다. 거룩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출산을 강조한다. 동성애가 혐오스럽게 여겨지는 것이 이성의 보존에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판단 때문이다. 십계명, 남녀가 부정하게 되는 것들 등등 모두 이성적으로 혐오스러운 감상을 느끼기에 배척하는 것이다.
이 인과를 한층 더 확장시켜서 보면 성경 속의 ‘죄’를 이해할 수 있다. 인과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선 상업을 생각하면 쉽다. 돈을 주고 상품을 얻는 교역 말이다. 그것은 이성으로써 생각하였을 때 주고받음이 같으므로써 합리적이다. 이것을 인간관계의 인과라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정말로 법칙이고 이성이려면 행동에는 그 값이 치러져야 한다. 이때, 이러한 행동 중 하느님의 좋음에 어긋나는 나쁨, 그러니까 죄악을 판별하려면 인간의 보존이 필요하며 그것을 침해하는 것이 죄악이 되는 것이다. 용서를 하는 자비로운 하느님은 사람이 생각을 바꾸고 기도하며 고백할 때 그를 보듬어준다. 인간의 보존을 위해서는 동기가 가장 중요하기에 실수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저자의 권고’에서, 그리고 책의 역사 그 모든 구석에서 모든 인과는 하느님으로써 이루어진다. 코헬에서는 세상만사가 허무하기에 유일한 가치가 하느님임을, 지혜에서는 그 가치의 본연적인 면모를 칭송함과 그것의 계획을 이야기한다. 집회에서는 하느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함을, 이사에서는 ‘보라, 너희들은 아무것도 아니요 너희 업적 따위는 있지도 않으니’라며 인간의 성취를 부정한다. 죽음을 말할 때는 인간의 무기력함을 말하고, 부끄러움을 설명할 때 어떤 행동이든 하느님의 뜻이라면 부끄럽지 않음을 말한다. 예수는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 말하며, 이 인과를 순수하게 행함에 따라 하느님을 알기 쉬워짐을 말한다. 이 완벽해 보이는 이성과 인과의 관계를 부정할 수나 있을까? 하지만 사실 이 모든 설명들은 모순 덩어리로 가득 차 있다. 지금까지의 분석으로 드디어 성경을 폭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성의 값어치는 어느 정도인가? 신자들과 앞서 말한 철학자들은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평가한다. 크리스트교, 이데아론, 칸트의 정언명령은 모두 이성에 따른 인과에서 창출되었다. 이성이 우월해짐에 따라 많은 이익이 생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칸트에게 있어 보편적인 법칙이란 모두에게 합당하며 안정적이기에 이상적이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있으려면 의무감에서 비롯되는 도덕 법칙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사물 본연의 성질이므로 고유하다. 물리적인 법칙에 따라 존재하는 이치에 따른 타당성과 안전함에서 비롯되는 행복이 이성과 인과 관계 및 그것의 부산물의 값을 높인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그런데, 보편적인 법칙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우선, 사소한 논점부터 짚고 넘어가겠다. 성경에서 하느님이 만든 법칙을 지키지 않았을 경우, 그러니까 죄를 저질렀을 경우에는 처벌이 가해진다. 칸트가 말하길 도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안정한 원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정한 원리란 불안을 억제하는 것뿐이지 자유일 수 없다. 그렇다면, 계명이나 도덕을 지키는 이유는 고통이 무서워서 그것뿐 아닌가? 하느님이 재해와 죽음을 부를 것이기에 무서워서 가만히 있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에서 설명하는 하느님을 따라야 할 이유는 두 가지밖에 없다. 첫 번째로 벌을 받기 때문에. 두 번째로 그냥 이치이기 때문에. 첫 번째 원인은 정말로 도덕에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폭군의 횡포에 겁을 먹어 무릎을 꿇는 행태이다. 도덕을 인간이 죄책감으로 인해 고통받기에 지켜야 한다는 것도 그냥 두려움이다. 친구와 화해해야 하는 이유는? 착하고 행복해지니까. 이기적이면 안 되는 이유는? 나쁘고 불행하니까. 두려움을 피하는 것이 가치일 수는 있으나 그것은 추구할, 숭배할 것이 아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두 번째 원인을 보자. 이성과 인과 속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이 있다. 하느님이 이치이기에, 법칙이기에, 이성이기에 저절로 가치가 생길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가치는 상대적이다. 예술은 자유롭다. AI그림도 예술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AI 그림이 진짜 그림이 아니라 한다. 그냥 멋있으면 그만인 사람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뭔데 근거도 없이 감상에 기반한 보편적인 법칙을 정하지?”라고 말할 수 있다. 감상은 개인의 선천적인 뇌 구조 차이에 따라 다르며, 아무리 다수가 주장하더라도 어떤 기준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대적 가치의 예시이다. AI 그림이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해서 싫어해야 하는 게 아닌 것처럼 하느님으로 인해 우리가 탄생했다고 해서 하느님을 사랑할 의무는 없다. 의무와 책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의 선택과 가치이다. 철학자들이 이성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의 일정하고 자연적인 법칙이라는 본연의 가치 때문이다.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조상에게 고마우니까. 생명이 소중한 이유는? 고유해서. 자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너의 가족이 너를 사랑하니까. 분명 그것에 동의하는 데에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이 없음에도 불구 그것이 진리임이 강요된다. 이성이 인간으로서 최고의 가치인 이유가 사람에 따라 해당할 수도, 해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양성을 존중한다면서 원칙을 강요하는 것은 모순이다. 니체는 이러한 것들이 인간의 고유성과 차별성, 생명과 의지를 무시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딱 하나, 보편적일 수 있는 것이 있다. 성경의 문제점은 모두를 같은 기준으로 인간답지 않게 평가했다는 것이다. 정말로 인간다운 것은, 착하거나 공감하거나 위대한 과학 발전을 이루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법칙에도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법칙은 누구에게라도 절대로 관여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유로운 의지를 막으며 신을 만든다. 하느님의 생성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물리 법칙은 그냥 물리 법칙대로 있어야 하지 진리로써 여기는 것은 무지이다. 그렇다면 유일하게 보편적이어야 하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상대적인 가치들을 인정한다는 딱 하나의 단일적인 생각이다. 인간을 인간 본연대로 존중하고 자연스러운 본성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다양한 본성과 가치들이 도대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 나는 전체 가치를 공평하게 배분하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이 어떤 가치를 원하든 그 정도의 밀도만 서로 같다면 사회는 원활하게 유지될 수 있다. 정해진 영역에서 교환하는 것이다. 이를 잘 설명하는 철학자가 있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사상이나 이념이 되는 것을 원한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 그 정도로만 여겨지기를 원했다. 숭배하고 진리로 여길 법칙이 아니라 아이디어 말이다. 인간은 종교를 믿던 도덕을 행하던 사상을 믿던 사랑을 하던 어쨌든 가치를 쫒는다. 이 가치들은 그 생김새가 어떻든 인간의 노동력으로써 발생한다. 이것은 가치의 공통분모로 작용한다. 고로 그것으로만 묶인 사람들은 서로의 생각에 관여하지 않고 각자 자신의 이상을 찾을 수 있다. 마르크스의 핵심 주장은 노동자가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종교와 도덕은 노동 과정과 노동 생산물을 통한 자신 본래의 인간적인 성질로부터 노동자를 소외시킨다. 크리스트교와 자본주의는 매우 닮아 있는 것 같다.
예수의 무조건적인 사랑인 아가페는 성경을 근거로 함에 따라 매우 모순적이다. 선천적인 차이로 등장한 동성애자를 선천적인 견해로 인해 포용하고 사랑하면서도 ‘용서’하는 것이 예수이다. 누구든지 용서하는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을 숭배하는 행위는 인과적인 사고방식이다. 물론, 앞서 설명한 가치의 상대성에 따라 정말로 그것을 원한다면 반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상대의 가치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전체 가치를 (국부) 필요 이상으로 (공평하게 배분하지 않음) 쟁취할 때를 침해라 할 수 있다. 누구의 가치도 더 높게 평가할 수 없다. 그것에는 권리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합리적인 판단 때문이다. 인간의 능력은 공평하지 않기에 이 판단은 뛰어난 사람이 (자본가) 아니라 재능이 적은 사람이 (노동자) 판단한다. 공평하려면 누군가는 피해를 입는다. 사회의 균형과 편안함을 위해서 예수가 선택한 방법은 영원하지 못하다. 그러나, 그의 아이디어는 빌릴만하다. 사랑이 무조건적이려면 감정이 섞여서는 안 된다.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감정이라는 조건으로 인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게 누구든 간에 관계없이 자기희생적인 태도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관계 속에서 사람을 보살폈다. 우리는 그냥 그러한 관계를 약간 더 진보적이게, 살짝은 서로에게 무관심해 보이는 태도로 진행하면 된다. 그냥 나의 가치가 다른 사람의 가치와 맞바뀌어 발생했음을 인지하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사회는 유지될 수 있다. 그 개념을 사랑할 필요는 없다. 인생의 목적을 위해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인생에 목적이 없어도 된다. 인생을 중요히 여기지 않아도 된다. 그 어떤 법칙도, 진리도 본성을 규정할 수 없다. 자유로워라, 아무도 당신을 막을 권리가 없다. 권리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사회에 있어서 발생해야 할 변화들은 최대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자유는 인위적으로 보장됨으로써 진짜 자유가 되기에 공동체도 발달해야 하며, 가치를 제공하기 위한 경제까지 발달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 말했다. 내가 보기에 성경의 내용은 그냥 타이름, 위안, 고통을 피하는 방법, 권력에 순응하고 자기 자신을 버리는 법뿐이다. 혹 성경에 취해 중독되더라도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가능하면 나와 함께 진짜 느낄 수 있는 자유를 찾아보지 않겠냐고 하고 싶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나는 자본주의와 유교, 기독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사회 속에서 딱히 원하는 것과 느끼는 것이 없다는 고통을 지니고 살았다. 그러한 보편적인 법칙들을 벗어던지는 것만으로도 좋다. 나는 새로운 가치를 찾고 싶은데, 그것은 가치가 없어도 되는 삶이다. 쉽게 말해 발랄하게 살고 싶다. 나의 사례와 같이 하나의 진리가 아닌 다양한 종류의 완전체들이 공존하는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100년 전에 살았던 할아버지들이 만든 법을 지켜야 할 이유는 없다. 여기는 지금 살아있는 우리들의 민주적인 공동체이다. 당신이 성경을 읽고 누리는 가치는 정말로 당신의 가치인가? 크리스트교의 성질은 진통제와 같다. 몇 시간만 지나면 고통이 돌아온다. 매 주기마다 입에 막 쑤셔 넣는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자, 주어를 바꿔보자. 당신이 헌법을 읽고 누리는 가치는 정말로 당신의 가치인가? 자본주의의 성질은 진통제와 같다. 다음에는 불교와 이슬람교 등의 서적들도 읽어보고 난 후 종교에 대해 본격적으로 파헤쳐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