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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이 Feb 13. 2024

『정의란 무엇인가』로 수업하기

얼렁뚱땅 원서 수업

어느덧 외고의 첫 중간고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수업과 출제를 병행하면서 틈틈이 중간고사가 끝난 뒤의 수업들도 구상했다. '교과서 없는 영어 수업'이라는 환경에 적응하려고 애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해보고 싶은 수업이 하나둘 떠오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원서로 하는 수업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누구나 알고 있듯, 영어 원서 읽기는 장점이 많다. 독해력이 향상되고, 자연스러운 어휘와 문장을 익힐 수 있고, 말하기와 쓰기의 기초를 쌓을 수 있고, 등등... 하지만 나는 보다 단순한 장점에 초점을 맞춰보기로 했다. 바로 '나 이거 원서로 읽어 봤다.'라는 자신감이다. 너무 원초적이라서 우스울 수도 있지만, 이 자신감은 영어 공부에서 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원서를 내 힘으로 읽어냈다는 사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성취감을 느끼게 하고, 이 성취감은 앞으로의 공부를 계속 이어나갈 힘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원서가 누구나 알 법한 소위 말하는 '폼나는' 원서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학생들이 이미 많이 접했을 것 같은 쉬운 문학 작품 대신, 다소 어려운 비문학을 읽혀보고 싶었다. 비문학 중에서도 마냥 정보 전달로 끝나지 않고 학생들을 사고하게 만드는 영역이 무엇일지 고민하다 보니 '윤리'가 적합하다고 생각됐다. 여러 윤리 도서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로망을 갖고 있지만 혼자서는 손이 잘 가지 않는 책,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원서로 읽혀보기로 했다.


다만 분량이 문제였는데, 두 책 모두 1년의 수업 시간을 다 쏟아도 완독이 불가능해 보였다. 물론 읽기를 숙제로 내도 되지만, 어려운 난이도의 책을 학생들 스스로 다 읽어오게 할 수는 없었다. 학생들이 좋은 텍스트를 생각하며 읽기를 원했지, 빨리 읽어내라는 부담을 주고 싶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윤리 전공자가 아닌 내가 1년 내내 윤리 책으로만 수업하는 것도 부담이었다. 결국 완독 대신 발췌독으로 타협하기로 하고, 책 전체의 핵심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2페이지 정도씩만 골라 읽기 자료를 만들었다. '나 이거 원서로 읽어 봤다'라는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다소 소박해 보이지만, 원서에 대한 흥미 정도만 생겨도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수업 자료를 만들다 보면 언제나 학생들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보디랭귀지의 효과에 대한 TED를 봤는데, 네 생각은 어때?",  "난민 수용에 찬성하는 기사를 읽었는데, 너의 의견은 어때?"와 같은 질문이 자꾸 하고 싶다. 그래서 이번에도 원서를 읽어본 뒤의 생각을 물어보기로 했다. 난민 프로젝트 수업을 했을 때처럼 에세이를 써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양한 방식을 시도해보고 싶어서 1인 1발표를 하도록 수업을 구상했다. 그렇게 기말고사까지 남은 기간을 원서 수업과 발표 수업을 합쳐 총 11차시로 만들었다.


1차시: 공리주의와 의무론에 관한 지문 읽기

2차시: 『정의란 무엇인가』 발췌독

3차시: 자율주행 자동차의 윤리적 딜레마에 관한 TED 듣기

4차시: 로또 활동

5차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발췌독

6차시: 마이클 샌델의 TED 듣기

7차시: 발표 주제 선정

8차시: 발표 개요 작성

9차시: 발표 대본 작성

10,11차시: 발표


1~3차시는 '정의'를 주제로 했다. 1차시는 밀의 공리주의와 칸트의 의무론에 관한 지문을 교과서에서 읽고 내용 요약표를 완성했다. 교과서로 수업하지 않는 분위기가 외고에 있긴 하지만, 사실 교과서에는 적당한 난이도의 지문과 좋은 활동들이 많이 실려 있다. 어떻게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빛을 발할 수도 있는 게 교과서이기에, 앞으로도 종종 활용하려 한다. 2차시 발췌독 시간에 가장 신경을 쓴 점은 어휘와 모둠 학습이다. 원서의 문장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생소한 어휘의 뜻은 학습지에 미리 제시했고, 긴 지문 사이사이에 내용 이해 문제를 실어 모둠원들과 함께 답을 맞혀보도록 했다. 3차시는 'What moral decisions should driverless cars make?(자율 주행 자동차는 어떤 윤리적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TED를 함께 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TED 영상 링크)


4~6차시는 '돈'을 주제로 했다. 4차시 로또 활동은 단순하지만 학생들의 반응이 좋았던 수업이다. 로또 1등에 당첨되어 100억을 받게 된 상황을 가정하고 예산계획서를 써서 공유하도록 했다. 100억 정도는 있어야 뭔가 할 수 있다고 말하던 아이들이 막상 검색을 해보고는 "강남에 빌딩도 하나 못 사요."라고 말하는 모습이 귀엽고 웃겼다. 추가로 우정, 건강, 커리어 성공 등 무형의 가치에 40억, 70억, 20억 등 가격을 매겨 제시한 뒤 사보도록 했다.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알 수 있었고, 80억짜리 세계 평화를 산 친구에게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6차시 TED는 마이클 샌델이 자본주의에 대해 관중들과 토론하는 영상을 골라, 내용 복습도 하면서 저자의 명강의를 직접 볼 기회라며 학생들을 독려했다. (TED 영상 링크)


7~11차시는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발표 주제 선정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공리주의와 의무론을 보완할 수 있는 윤리 이론은 무엇일까?', '시장 사회에 대한 마이클 샌델의 의견에 동의하는가?' 등과 같은 예시를 제시하고, 이 외에도 1~6차시 수업과 관련해 관심 있는 주제가 있으면 정할 수 있게 했다. 시간이 부족했지만 짧게나마 좋은 발표의 조건에 관한 지문을 읽고 토의도 해보고, 발표의 분량을 제한한 뒤 제출 여부만 평가에 반영했다.




'내 맘대로 프로젝트 수업'에 이은 '얼렁뚱땅 원서 수업'이었다. '나 이거 원서로 읽어봤다'라는 자신감을 심어주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학생들이 읽 분량은 책의 1% 밖에 되지 않았고, 스스로에게 타협하며 쉬운 방식의 수업을 진행한 차시도 있었다. 평가 계획을 사전에 짜지 못한 것도 아쉬웠다. 하지만 '마이클 샌델의 유명한 책을 원서로 읽어볼 수 있어 좋았다, ' '어려워서 손을 대지 않을 것 같은 원서들도 발췌로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라는 학생들의 피드백은 그야말로 딱 원하던 반응이었다. 아예 틀린 방향의 수업을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며 분명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언젠가 100% 만족할 수 있는 수업을 향해가는 그런 수업이었기를 바라본다.







(참고: 외고 첫 근무 시절을 추억하며 씁니다. 현재 진행 중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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