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 스타트업은 처음이지?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그런 말이 나온다. 어차피 노비가 될 거라면 대감집 노비를 해야 한다고. 여기서 노비는 우리고 대감집은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대기업, 공기업을 지칭한다. 왜 젊은이들이 자신을 노비라 하는지는 모두 잘 알거라 생각한다. 대감집이 아닌 곳에서 일하게 되면 들어갈 땐 들어가더라도 나갈 땐 내 의지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나 또한 나갈 시기를 스스로 정할 수 없었다.
작년, 스타트업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할 적의 일이다. 스타트업 회사라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보통 젊은 직원들, 수평적 조직 분위기, 다양한 경험 등이 떠오를 것이다. 나의 경우 지방에서는 보기 힘든 사업을 하는 회사였기에 흥미가 있기도 했지만 단순히 그저 돈을 벌겠다는 이유로 입사했다. 자아실현이 아닌 생계를 위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업이 일치한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기업이다 보니 장점과 단점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장점은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다, 분위기가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다른 것들도 있지만 이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그렇다면 단점은? A의 일이 내 일이 되고 B의 일이 내 일이 되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너무 자유롭다 못해 체계가 없는 것 같은 분위기다. 근무시간 중에도 자유롭게 자리를 비우고 잠도 자는 모습이 내겐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아마 여기서 호불호가 많이 갈리지 않을까 싶다. 예전이었다면 ‘잠도 자고 좋은데?’라 생각했겠지만 현실은 ‘자도 너무 자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다른 건 그렇다손 치더라도 업무가 점점 많아지는 건 정말 골치 아팠다. 처음엔 좋은 곳이라 말하고 다닐 때도 있었다. 일도 재미있고 분위기도 편하니 정말 오래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와 맞지 않는 성향의 사람이 있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한다는 건 감정소비가 심한 일이니까. 하지만 이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원래 A에게 갔어야 할 일이 내게 돌려졌다. A는 맡기 싫음을 친한 상사에게 어필했고 그 일이 고스란히 내게 온 것이었다. 나를 호구로 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한 번은 내게 할 말이 있다며 부른 상사가 본래 두 명이서 하던 일을 나 혼자 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건 물음이라기보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난 공평하지 않거나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 본능 같은 것이다.
오랜 이야기 끝에 본래 해오던 것처럼 두 사람이 하는 걸로 이야기는 끝이 났다. 하지만 이 일이 있은 후로 나를 대하는 상사와 그의 측근의 태도가 조금 바뀌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거나 불필요해 보이는 일들을 시켰다. 불필요해 보인다고 말하는 이유는 관심도 없고 제대로 체크조차 하지 않아 흐지부지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묵묵히 해야 할 일들에 최선을 다했다. 어쨌든 일은 일이니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별다른 반응이 없는 내게 흥미가 떨어졌는지 조금 덜해지기는 했다.
슬슬 일이 손에 익자 자연스레 하는 일에도 정이 붙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퇴근해서도 일에 대한 생각과 공부를 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따로 학원을 다닌 건 아니고 유튜브로 독학했다. 계약 만료일이 다가오더라도 다시 재계약을 하던 정사원이 되던 계속 여기서 일을 할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했다. 처음 계약할 적에 회사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기도 했고. 그런데 그게 일을 열심히 하게 만들기 위한 사탕발림이었다는 건 뒤늦게 알았다. 불행은 예고도 없이 닥쳐왔다.
퇴사 D-7
대표님이 이야기 좀 하자며 나와 다른 계약직 동생을 따로 불렀다. 대표님이 말하길 더 이상 우리에게 월급을 줄 여건이 안 된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를 지원금을 기다리며 무급으로 일하기. 두 번째는 회사 지분 일부를 받는 것. 선택은 우리의 몫이라며 내놓은 제안은 절대 우리에게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를 지원금을 무급으로 손 빨며 기다리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이 말인 즉 그냥 알아서 그만두라는 의미다.
해고라는 게 ‘너 해고야’가 아니라 얼마나 비겁하고 야비하게 돌려서 나오는지 이번 기회에 절절히 느꼈다. 그만두라는 말을 어찌나 빙빙 돌려 말하는지 답답하고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그게 다 본인들 유리한 상황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이었다.
퇴사 D-1
“내일 결정해서 말하라는 건 내일까지 일하라는 말씀이신 건가요?”
“빠르면 내일이고 시간 필요하면 이야기하세요. 그런데 내일 말해주면 좋고.”
대표님은 우리에게 시간을 주겠다하고서도 결정하기를 재촉해왔다. 빨리 좀 나가라는 거다. 그러면서 끝까지 우리를 너무 좋게 보고 있고 돈을 못 주게 되어 신뢰가 깨지는 상황이 되기 전에 우리가 결정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건 그런 선택권이 아니라 회사 측에서 확실히 해고라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야 해고 수당을 받을 수 있으니까.
‘해고수당’이란 사용자가 30일 전에 해고예고를 하지 않았을 경우 30일분의 통상임금을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넉넉잡아도 일주일 전에 들은 것이니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해고가 아닌 권고사직이 될 경우에는 해고수당을 받기 어려워진다. 그들이 노린 것이 바로 이 점이다. 그래서 자진해서 퇴사에 동의했다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밑밥을 깐 것인데 이미 눈치챈 내가 언제까지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자 초조해하는 듯했다.
퇴사 D-0
결국 대표님이 마지막까지 말하지 않으려던 것을 말하게 만들었다. 오늘 까지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당일이 되어서야 그만두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종이가방에 열심히 짐을 챙겨 넣는데 의외로 가볍다. 이렇게 까지 열심히 했는데 해고수당은 받았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못 받았다. ‘계속 일하고 싶어도 월급을 줄 수 없다고 하시니 해고 아닌가요. 해고수당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해보았지만 ‘월급 줄 돈 없어서 그만두라고 한 건데 그게 가능하겠나?’라는 답이 돌아왔다. 내가 받은 상처는 안중에도 없고 자기 힘든 이야기만 늘어놓는 그의 모습에 밑바닥을 본 느낌이었다. 노동청에 신고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이미 많이 지쳐있었기에 그만뒀다. 더 이상 이 징글징글한 회사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다 같이 으쌰 으쌰 열심히 해보자고 할 땐 언제고 언제 그랬냐는 듯 등 돌리는 게 참 쉽다. 이 모든 게 단 일주일 만에 일어난 일이다. 정말 폭풍이라도 지나간 것만 같았다. 슬픔보다는 허탈함이 컸고 눈물보다 웃음이 나왔다. 며칠 전만 해도 회사를 그만두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으니까.
그러니 회사를 가족같이 생각하라 말하지는 말자. 회사는 언제나 계산기를 뚜드리며 어떤 게 돈이 되고 도움이 되는지 계산할 뿐만 아니라 어려워질 경우 가장 먼저 뭘 해야 하는지도 이미 뚜드려 놨다. 회사의 진심은 돈으로 알 수 있다. 아쉽지 않으면 그냥 보내고 붙잡고 싶으면 연봉협상을 하듯이 말이다. 액수가 높을수록 그만큼 당신에게 진심이라는 것이다.
계약기간도 다 채우지 못한 채 해고당한 후 느낀 건 회사가 아닌 나를 키워보자는 것이었다. 회사를 위한 영상 등 작업을 할 적에 문득 '회사가 아닌 나를 위한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백날 열심히 회사를 위해 일해도 언젠가 나는 그 안에 없고 이름도 안 남는다. 회사는 여러 사람들이 돌아가며 키워주지만 나는 아니다.
내 브런치 글에 들어가는 이미지는 내가 직접 만든다. 예전의 나라면 그림 그려 넣을 생각은 하지 못했을 텐데 지금의 나는 부족하더라도 직접 내 모습을 그려 넣는다. 어차피 쓱 보고 지나가는 그림 한 장 일지라도 즐겁게 작업하고 있다. 이것도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다. 앞으로도 나의 것들을 하나씩 차곡차곡 만들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