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신을 죽인 이유
장롱에 박혀있던 두꺼운 옷들이 밖으로 나오고 점집은 문전성시를 이루는 계절 겨울이 돌아왔다. 무당들은 이때를 성수기라고 부른다. 추워졌다는 건 연말과 새해가 성큼 다가왔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조바심 나게 만든다. 그리하여 저마다 다른 희망과 소망을 품고 점집을 찾게 되는 것이다.
연말과 새해뿐만 아니라 새 학기 혹은 밸런타인데이와 같은 이벤트가 있는 시기에도 점집을 찾는다. 나 또한 학생일 때부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타로카드와 같은 점을 보는 걸 즐겼다.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점을 보고 나면 왠지 마음이 가볍다. 그건 내가 해야 할 선택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 순간에는 즐겁고 좋지만 막상 점대로 따른 적은 별로 없다. 그리고 잊어버린다. 점대로 행동하는 게 답이 될 순 없다는 걸 마음속으로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내게 있어 점이란 오락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적이 없다. 주변에 많은 친구들이 타로카드나 신점 같은 것들을 본 적이 있지만 맹신하며 깊이 빠지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점을 맹신하고 무당을 떠받드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예 없지는 않다. 그들은 무슨 일이든 무당에게 찾아가 점을 통한 조언을 구한다. 자신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아이와 배우자에 대한 것까지 모든 개인적인 문제를 무당과 그의 신에게 맡긴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마치 늪에 빠진 듯 헤어 나오기 힘들다. 왜냐면 믿을 수밖에 없게 됐기 때문이다. 믿지 않으면 그동안 자신이 낭비해온 돈, 시간과 비례하는 자괴감이 몰려들어 괴로울 테니 말이다.
그러니 고민을 점으로 해결할 수 있다 믿기보다는 살짝 간 보며 즐기는 정도가 딱 좋다.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의 의미를 보면 생각해보면 왜 신적인 것에 대한 맹신을 경계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세계의 리더들은 왜 철학을 공부하는가>라는 책에서 니체는‘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신은 이미 죽었고, 내가 직접 그를 죽임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렸다면 잘못된 걸까?’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곧 그것은 잘못이 아니며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종교에서 정한 도덕적 가치에서 벗어나 세상의 모든 존재의 가치에 대해 다시 평가하고 생각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라 한다. 옛날 마녀사냥을 하거나 고양이를 싫어하는 등의 종교적 이유로 행했던 일들을 종교라는 틀을 벗어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니체는 말하는 것이다. 즉, 도그마를 깨트리고 스스로 생각하라는 메시지가 ‘신은 죽었다.’에 담겨있다.
이렇게 니체는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 따진 다기보다는 신에 의존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게을리하는 인간에 대해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점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하다 보니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가 떠올랐다. 데우스는 라틴어로 신이라는 의미이며 마키나는 기계 관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매우 급작스럽고 간편하게 작중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사기 캐릭터 또는 연출 요소 등을 일컫는다. 주로 그리스 희곡에서 신앙심 고취 목적으로 자주 쓰이던 신의 등장 법이다.
놀랍게도 이 단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러한 작중 연출을 까기 위해 만든 개념이라고 한다. 어떤 어려운 상황이 발생해도 신이 등장하면 바로 해결되고 끝나다니 개연성 없고 재미없는 연극이지 않은가? 인간은 결국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끝이 난 것이다. 여기서 다시금 니체가 신을 죽이려 했던 이유를 느낄 수 있다. 신을 죽여야 인간이 스스로 움직일 테니까.
누군가가 대신해준 것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되지 못한다. 내가 못 풀고 있던 수학 문제의 답을 친구가 대신 알려준다 해서 내가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게 아니듯 말이다. 나에 대한 주도권을 무당의 신에게 맡기지 말자. 휘둘리지 않는 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고 최선을 다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거기에서부터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만의 인생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타인의 잣대로 만들어진 행복이 아닌 진짜 나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