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체험
'별빛야행'을 다녀왔다.
이름부터 낭만적인 '별빛야행'은
'문화재청'에서 다소 긴 이름으로 바뀐 '국가유산진흥원'에서 하는 '궁궐체험' 프로젝트다.
동행은 둘째 딸의 시어머니, 사부인이시다. 경복궁역 5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편하기만 한 사이는 아닌지라 약속시간보다 서둘러 갔다. 사부인이 먼저와 기다리고 계셨다.
입장시간이 남아 행사장소인 '계조당' 앞 뜰에 앉아 안부를 나누었다. 구름 낀 하늘에 선선한 바람까지 불어와 야외에 앉아있기 좋은 날씨다. "이제 연세도 있으니 김장은 그만하세요". 해마다 정성이 담긴 김장김치를 꼬박꼬박 받아먹는 나의 인사다.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해야지요"
요즘 트렌드에 맞추어 딸은 시댁김장에 참여하지 않는다. 사위만 가서 부모님의 김장을 돕고 나눌곳에 배달까지 책임진다. 장모님께 드릴 김치는 아무도 손못대게 하고 사위가 직접 김치통을 꽉꽉 채운다고 했다. 어찌나 꼼꼼하게 양념을 바르는지 부럽다고 하신다. 사부인은 아들만 둘이다.
'별빛야행'은 '경복궁야간개장'과 함께 일 년에 두 번 봄, 가을에만 열린다.
총 소요시간은 110분, 국악연주를 들으며 임금님과 왕비가 드시던 수라를 먹고 궁을 안내받는다
왕세자의 공간인 '계조당' 앞에서 신분을 확인하고 번호가 적힌 주머니를 받았다.
주머니 속에는 궁을 둘러볼 때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이어폰장치가 들어있다.
시간이 되자 상궁마마께서 나오셨다.
'임금님이 특별히 초청하신 손님들을 귀히 모시러 나왔다'라고 인사를 했다.
상궁복장을 한 전문해설사님의 안내를 들으며 궁궐 안 '외소주방'으로 갔다.
번호표가 놓인 자리마다 맵시 있게 묶은 보자기가 놓여있었다.
"이제 진지를 드시라"는 상궁마마의 말에 나인의 도움을 받으며 보자기를 풀었다.
<상궁마마와 국악공연>
'도슭(도시락) 수라상'이다. 왕과 왕비에게 올리던 12첩 반상이 방짜유기그릇에 정갈하게 담겨 있다.
연근해물채. 저염명란젓. 오이송송이. 배추김치
호두조림. 삼합장과. 더덕구이. 탕평채
진지. 생선완자전. 애호박 전. 너비아니
석류표고버섯탕.
귀한 음식이라 천천히 음미하며 먹었다. 후식이 나왔다.
전복초. 꽃인절미. 정과. 모약과. 구기자차
<도슭(도시락) 수라상> 사진을 너무 못찍은..
<후식다과>
식사가 끝나자 국악 연주도 멈추었다.
이제 안내에 따라 궁을 둘러볼 시간이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전문해설가의 설명을 들으며 궁궐탐험에 나선다.
'자경전'은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효심이 깊은 왕이 어머니의 수명장수를 위해 만든 '십장생굴뚝'은 보기에도 아름답다. 열개의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연기길이 이곳으로 모여 빠져나가게 시설이 되어있다. '십장생굴뚝' 덕분인지 당시 조선의 평균수명이 47세인데 '고종'의 양어머니 '신정황후조씨'는 83세 의 수를 누렸다는 해설이다. 단명한 왕의 대비로 과연 편안한 삶이었을지는 의문이다.
<십장생굴뚝>
하늘이 어두워지자 관람객들에게 '청사초롱'을 나누어 주었다.
궁궐의 장독이 있는 장고에서 궐의 '장'을 관장하는 '장고마마'와 '나인'의 상황극을 구경했다.
"왕실과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신성한 장을 담기 위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정성을 다하라"는 내용이었다.
<장고마마와 나인의 공연>
'고종'의 서재이자 외국사신접견소였던 '집옥재'와 '팔우정'에서는 임금님이 하사하시는 '포춘메모'같은 선물이 색색의 띠를 두르고 밀지처럼 놓여 있어 하나씩 가져왔다.
<임금님의 하사품>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거처하던 '건천궁'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 을밝힌 곳이라고 했다. 멀리서 볼 때 사람모양의 모형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자 임금님과 신하가 전등을 두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백성들에게도 밝은 전기를 제공해주고 싶은 나라님의 진심이 전해져 울컥했다. 강대국사이에 끼인 힘없는 나라의 임금님으로 자신이 누리는 것들이 어찌 편안하기만 했겠는가.
<고종과 신하의 공연>
'향원정'은 '경복궁' 안의 작은 섬안에 지은 아름다운 정자다. 왕실의 휴식공간으로 만든 곳이라고 했다. 연못 위 '취향교'를 건너 정자 앞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연못에 비친 육각형 지붕의 단청이 너무나 아름다워 감탄사가 나왔다. '건청궁'과 '향원정'은 평소 일반 관람객에게 비공개인 장소라고 했다.
소녀 같은 사부인에게 아름다운 장소마다 사진을 찍어드렸다.
<향원정,취향교>
궁궐의 비포장길을 '초롱'을 들고 걷는 길에서는 여러 상념이 일어났다.
궁의 수많은 왕족과 비빈의 비단치맛자락이 스친 길이자, 그들의 시중을 들던 이들이 숨 가쁘게 뛰어다니던 길이었을 것이다. 가끔은 전장의 소식을 전하러 온 파발마가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지나가기도 했을 테다. 기쁘고 슬프고 억울하고 절박했던 온갖 사연들이 이 길을 오가며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알쓸신잡통영편"에서 정재승작가님의 과학고재학 시절 에피소드를 무척 재미있게 들었다.
"우리는 이순신의 숨결을 실제 느낄 수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놓고 계산을 해봤다고 했다.
-인간이 하루에 내쉬는 공기가 13kg이면 이순신장군 53년의 생애에 내쉰 공기 수억톤이 대기중에 균일하게 흩어져 있으니 우리가 그공기를 다시 흡입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등을 펴고 크게 숨을 쉬어보았다.
110분의 궁궐여행이 끝났다. 출입구에서 '별빛야행'이 각인된 텀블러를 기념품으로 받았다.
자식을 나눈 가깝고도 먼 사이인 사부인과 포옹으로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사부인과 두번째 함께한 '별빛야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