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은 없겠지...
" 언니야 청학동 '삼성궁'이 억수로 좋더라 우리 형제끼리도 한번 가보자" 여동생의 말에 육 남매부부가 모였다.
도착해 보니 관광버스들이 줄지어 서있다. 산세가 수려한 데다 중간중간 폭포도 있어 노년의 형제들이 서로 의지하며 쉬엄쉬엄 올라가기 지루하지 않다.
정식명칭은 "배달성전삼성궁"이란다.
이름에 걸맞은 신령스러운 솟대와 돌탑이 허투루 놓인 게 하나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몇 세대에 걸쳐 쌓아 올렸다는 돌성에서는 영험한 기운이 모여있을 듯하다.
사람의 힘만으로 가능할까 싶은 규모에 감탄사를 연발한 관광이었다.
돌아오는 도로에서 우리 올케는 삼십 년 무사고운전의 기록을 깼다. 다행히 가벼운 접촉사고였다.
저녁식사를 예약해 둔 남해횟집에서 우리 형제의 건배사가 떠들썩하게 울렸다. "천만번 또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선창에 "사랑해" 한마음으로 화답한다.
자연스럽게 오늘의 차사고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고아가 된 우리 형제는 지난날이 그립다. 엄마 아버지도 계시고 우리는 젊었지. 명절마다 대가족이 모였다 흩어졌다.
폭설이 쏟아진 설날은 줄지어 가던 형제들 차가 다중추돌에 휩쓸리기도 했고, 어느 추석엔 졸음운전으로 차가 뒤집히는 아찔한 사건도 있었다.
심각한 길치인 똑똑한 막내사위는 해마다 다른 길로 갔다 와 변함없는 꼴찌도착이었다.
인원이 많다 보니 끌어낼 이야기들이 많기도 했다.
이야기 끝에 "나도 인사 사고 크게 난 적 있는데 아무도 몰랐지?" 짧은 순간 내 눈을 피하는 올케가 보였다.
"언니 알았어요?" "으응,, 들은 적이 있어"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남편이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제목이 "임신 출산 육아"였다.
'그래도 아빠노릇을 하는구나' 싶어 기분 좋게 받았다. 처음으로 장모님께도 칭찬받았다.
며칠 있다가 만난 시어머니께서 나를 살피더니
"그래 아가 책은 잘 받았나?" '그럼 그렇지 저 잉간이'
"네 어머니 고맙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무수히 많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머니가 사주셨다고 말을 해야 내가 인사를 하잖아" 묵묵부답.
혹시... "혹시 그때 사고합의금 언니오빠가 해주신 거예요?"
"으응 그렇지 뭐" 옆의 오빠는 웃고만 있다.
"그랬구나. 그동안 인사도 못하고 살았네 고맙습니다~ 공소시효 지났으니 안 갚아도 되는 거지예?"
함께 웃었지만 눈물이 났다.
늘 그렇듯 그날도 바빴다. 공장직원들 점심밥 하러 갈 시간인데 횡단보도 신호에 걸렸다. 마음이 바쁘니 점멸등이 시작되자 엑셀레이터에 발이 먼저 나갔다. 순간 앞에서 '쾅'하는 소리가 울렸다. 저 멀리 사람이 날아가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남편은 제조공장을 하고 있었다. 전기사용량이 많은 일이었다. 일은 많은데 매달 전기세 내는 것이 힘들었다. 납부기일이 지나 연체되면 꽤 먼 한전에 직접 가서 납부해야 했다.
그날도 밀린 전기세를 내러 갔다가 점심시간이 되어버렸다. 마음이 급했다. 횡단보도에 멈추어 파란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점멸등이 시작되자 다행히 횡단보도가 비었다. 차가 출발하는 동시에 사람이 뛰어들었다. 내 귀에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눈앞에서 사람이 튕겨 떨어지는 것을 보았는데 차에서 내리지를 못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경찰이 도착해서 차문을 두드렸다.
피해자는 택시기사님으로 손님이 내리면서 깔고 앉았던 방석을 길 위에 떨어뜨리고 가버렸다. 차를 돌린 후에야 방석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잠시 세워놓고 방석을 주으러 점멸등에 뛰어든 것이다.
사람을 다치게 한 죄책감과 사고당시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횡단보도 인사사고'는 '칠대 중과실'에 해당하여 합의가 되어도 형사처리된다고 했다. 피해자 측에서 합의금을 요구했다. 우리에게 큰돈이었다.
남편은 매일 술을 마셨다. 어린 나이에 사업이랍시고 하면서 여러 번 도움을 받은 터라 친정에는 돈이야기를 하기가 힘들었다. 마누라가 잡혀갈 판인데 '설마 이번에는 남편이 알아서 하겠지' 하는 마음도 컸다.
집으로 경찰관이 왔다. "경찰입니다". 하는 순간 불안한 마음에 남편에게 전화했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술집이었다. "경찰이 왔는데 빨리 와서 해결해 줘" 경찰서로 가서 유치장에 들어갈 때까지도 남편은 오지 않았다.
'합의를 빨리 하지 않아 피해자가 고소장을 내고 재촉을 하니 어쩔 수 없다'라고 경찰관님이 연신 미안해하셨다.
다음날 오후가 되자 남편이 친구부부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수치심에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사실 대답을 기대하지 않아 물어본 적도 없다.
같이 살 때도 우리 사이에는 다른 시간규모가 존재했다.
아주 가끔 꿈속에서 남편을 만난다.
당신, 멀끔하니 잘 지내는 것 같네.
나는 잘 못 지내.
봐 이번에도 마음의 빚이 새로 생겼어.
남편은 자신의 본성대로 자유롭게 살다 갔다.
어제를 고칠 수 없으니 내가 선택하지 않은 세계도 받아들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