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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을 보자마자 행복해졌다.
도심 속에 갇혀버린 옛집. 대문 앞까지 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좁은 골목 안에 들어 선 집. 골목만 나가면 번쩍이는 레온사인이 보이고 시끌벅적하게 붐비는 인파들이 느껴지는 곳에 있었다. 신기했다.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어릴 때 보았던 철 대문, 80년대 배경의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대문이었다. 집 안쪽에서 긴 철 막대를 밀어서 잠그는 구조. 그 철 대문에 스마트 도어락을 설치했다. 친구들은 저런 철 대문에 스마트 도어락이 가당하기나 하냐며 어울리지 않는다고 웃었지만 난 흐뭇했다. 비밀번호만 알려 주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지인들이 지치고 힘들 때 쉽게 이 집을 드나들며 쉼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진 돈도 없으면서 월세 계약을 하자고 주인에게 졸랐다. 보증금과 월세도 나의 형편에 맞춰 주인에게 무작정 들이 댔다. 턱도 없는 금액이었지만 인심 좋은 주인 덕분에 이 집에 들어오게 됐다.
기다랗게 이어진 대청마루에 앉아 있으면 햇살이 가득 나를 품는다. 물론 온갖 풀벌레와 모기들도 함께 내게 안기지만. 심지어 참새도 아닌 이름 모를 새가 대청마루에 드나든다. 마당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우물, 아직 물이 샘솟는 살아 있는 우물이었다. 마중물을 부어 열심히 펌프질을 해서 물을 기를 수 있는 옛날 수동식 작두 펌프가 우물 옆에 친구로 남아 있었다. 지금은 녹슬고 패킹이 닳아 기능을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고쳐 볼 마음이 든다. 녹의 무게만큼 오랜 세월을 묵묵히 지켜왔을 작두 펌프 앞에 겸허해진다.
마당엔 온통 달래가 풀인 듯 꽃인 듯 가득하다. 이제 한껏 피어나는 국화꽃, 석류는 자기가 꽃인 양 붉은 빛을 뽐내며 나뭇가지에서 대롱거린다. 봄을 기다리고 있는 앵두나무와 목련, 라일락이 겸손히 마당을 지키고 있다. 그냥 앉아만 있어도 미소 지어지는 집이다.
아파트에 길들여진 몸이 이런 집에서 견딜 수 있을까 주변 지인들이 걱정을 했다.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천정,
‘이리 오너라.’
하고 사극에나 어울릴 법한 열어젖히는 방문은 문풍지가 너덜거린다. 그나마 처마 끝을 덧대어 만들어둔 화장실이 방 옆에 있긴 했다. 그조차도 커다란 돌을 디디고 내려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무릎 관절도 좋지 않은데 살아 낼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하는 눈초리들이 나를 쳐다본다. 그래도 중년을 함께 살기로 약속한 다섯 살 된 퐁이와 나는 해맑게 웃는다.
이런 집으로 이사 오게 된 계기가 퐁이 때문이다. 폭력 앞에서 무기력할 때 퐁이는 나의 앞에서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지켜주었다. 믹스 견 발바리인 퐁이는 태어나 한 달이 되어서부터 함께 살았다. 성견이 되니 털갈이도 자주해서 알러지 체질인 나는 알러지가 더 심해졌다. 결혼 생활 종식과 함께 폭력이 사라지자 주변 사람들이 퐁이를 이제 떠나보내도록 권유했다. 알러지 쇼크까지 오자 나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나필락시스 쇼크를 몇 번 겪은 후 코로나 예방접종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런 와중에 기적처럼 내게 이집이 다가온 것이다. 퐁이와 함께 살아 갈 수 있는 집.
낯선 집에 대한 두려움으로 꼬리가 내려가 있던 퐁이는 온통 알 수 없는 풀들과 흙의 냄새를 맡는다. 이제는 바짝 세워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세상 속에 자리했지만 세상 밖에 떨어져 있는 듯 고요하고 평화로운 이 집이 좋아진다.
비가 그친 뒤 급격히 추워진 날씨에 지인들에게서 전화가 온다. 춥지는 않은지 안부를 묻는다. 급기야 함께 음악밴드를 했던 팀원들이 집으로 총출동했다. 처마 끝을 이어 비닐로 바람막이를 해야겠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나의 잃어버린 것들을 안쓰러워하는 마음이 동해서 모인 이들. 내게는 이들이 남아 있었다.
천막을 치는 과정을 함께하며 남은 생을 나누고 싶은 지인들을 알아보게 되었다. 힘들었던 결혼 생활의 끝에 접어버린 사업의 여파로 도시빈민으로 전락한 나를 위로 하는 이들. 같이 음악밴드를 하며 티격태격 다툼도 했다. 한 동안 멀리 하기도 하고 잠시 떠나 있기도 했던 이들이 지금 내 곁에 있다. 10월의 마지막 밤이라고 아직 짐 정리도 덜 된 집에 먹을 것과 와인을 사들고 무작정 찾아왔다. 작은 불을 지피며 축배를 나누었다. 각자의 추억에 젖어 모닥불을 피우고 옛 노래를 함께 불렀다.
그날 피운 모닥불이 그리워 30년 만에 만난 초등학교 동기들을 또 집으로 불렀다. 지난 태풍에 쓰러져 잘 말려진 나무를 쪼개어 불을 지폈다. 어린 시절 모습만 기억하는 우린 그저 멍하니 활활 타는 불꽃을 바라보며 각자의 감상에 젖어 침묵했다. 지금부터 오순도순 나눌 대화들이 생겨지겠지.
오래 오래 함께 늙어가고 싶은 이들을 만나게 해준 이 집이 고맙다. 집착이 아닌 애착으로 남기고 싶은 것들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바람 중 하나, 스무 살 때부터 나와 동거를 시작한 책들, 만난 지 오래 되지 않았지만 생사를 함께한 퐁이와 더 이상 옮겨 다니지 않아도 되는 마당이 있는 작은 집을 갖는 것이다.
잃어버린 것들은 두려움, 자신감, 자만심, 소속감.
남아 있는 것들은 피로감, 기다림, 그리움, 애착, 그리고 몹쓸 소망...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