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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in Nov 09. 2022

주재원 와이프로 살아가기

철저한 조연의 삶-주재원 와이프이자 아이의 로드매니저 일 뿐.

주재원 와이프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재원 와이프의 삶은 독박 육아로 시작해 독박 육아로 끝난다는 것을.

남편은 너무 바빠서 집에서 잠만 잘 수 있다는 것을. 

수많은 회식과 출장으로 집에서 일어나는 거의 대부분의 일은 혼자 해내야 했다. 

대략 남편의 회식은 주 1회, 출장은 적게는 한 달에 1번, 많게는 4번.

어느 날 누군가 나에게 " 남편이 실존하니?"라고 물었을 정도다.


한국에서 남편은 코로나로 인해 2년 가까이 재택근무를 해서 육아와 살림을 모두 같이 했다. 언제나 우린 2인 1조로 함께했다. 그땐 몰랐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최고의 한 팀이었다. 

독일에 온 후 남편이 없이 모든 걸 혼자 하려니 허전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고, 매 순간 같이 놀아달라고 조르는 4살 딸과 함께 하려니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다.

' 와, 역시 집에 있는 것보다는 회사에서 일하는 게 낫다.'

그래도 한국을 떠나기 하루 전까지 일을 했던 내 입장에서는, 처음 한 달은 일을 안 하는 거 만으로도 너무 행복하고 몸이 가벼웠다. 매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근, 퇴근, 육아까지 더해지니 하루라도 편하게 쉬고 싶었는데 드디어 맘 편히 쉬게 되었다는 생각에 너무 행복해서 '1년 동안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쉬어야지'라고 다짐했다. 


독일에 오고 3주 뒤 딸아이는 유치원에 가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8:30분부터 3시까지 자유시간을 갖게 되었다.

'아, 얼마나 바라던 시간인가?'

'이제부터 그 시간에 독일어도 배우고, 혼자 카페도 가고, 운동도 하고, 취미생활도 하고, 정말 많은 것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에 너무 행복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정작 나를 위한 시간은 단 한시간도 존재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이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


나의 하루는 매일 아침 5시 딸아이의 스낵박스와 런치박스 만들기로 시작한다.

8시 25분까지 등교해야 하는 딸아이를 6:30분에 깨우려면 나는 5시 기상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

아이의 기상과 함께 정신없는 준비를 마치고 30분 거리의 학교까지 매일 픽드랍을 해야 한다.

우리 학교는 Grade1부터 스쿨버스를 탈 수 있고, 그마저도 노선이 제한적이라 나는 여기 있는 동안 아이의 로드매니저가 되어야 한다.

등교를 시켰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유치부의 경우 아이가 운다거나 힘들어하면 데려가라는 전화도 자주 온다고 해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항상 전화도 붙들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숨 돌리려면 쉴 틈 없이 울리는 와츠앱 메시지와 메일들.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게 여기도 채팅방에서 같은 반 엄마들끼리 이런저런 정보를 공유한다.

우리 반의 경우에는 다들 처음 학교를 보내는 엄마들이고, 아이가 어리니, 관심도 질문도 당연히 많고, 모임도 많은 편이다.

학교에 행사는 얼마나 많은지, 메일은 계속해서 오고,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면 모든 메일을 다 봐야 한다.

무슨 메일이 그렇게 많은지 가끔 나는 회사 업무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오고 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나에게 주워지는 자유시간은 4시간 30분 정도인데, 그마저도 청소, 빨래, 요리로 끝나버린다. 

주재원 와이프들이 등원 후 모여서 커피 마시고, 단체로 골프 치러 가고, 쇼핑이나 하며 유유자적하게 하루를 즐긴다고 들었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되고 싶었던 주재원 와이프는, 정말 별게 없어도 너무 없는 '철저한 조연의 삶'을 살아가는 아내이자 엄마일 뿐이다. 모두 아이를 보내고 흩어져서 집안일을 하기에 바쁘고, 한식을 해먹이려고 현지 마트와 아시아마트를 오가며 어느 누구보다 바쁜 시간을 보낸다.

그래도 가끔 시간이 있을 때면, 같이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밥을 먹기도 하는데 그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유일하게 영어에서 해방되어 한국어로 맘편히 대화할 수 있는 날. 다만 그런 날은 한 달에 한번 될까 말까 한다.


365일 중 학교에 가는 날은 175일뿐인데(방학이 너무 많아서 등원하는 날의 수를 세어봤다.) 각종 행사와 상담이 정말 많아서 만약 내가 일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이것들을 다 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럼에도 같은 반 대부분의 유럽 엄마들은 일을 하고 있는데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들이 일할 수 있게 파트타임 제도를 잘해놓은 독일이 선진국임을 한번 더 깨닫는다.

학교에 갈 땐 이벤트가 많아서 바쁘고, 학교에 안 가는 날에는 내가 딸을 위해 스케줄을 짜고 아이가 다른 활동을 할 수 있게 해야 해서 바쁜 로드매니저의 삶.


오늘은 담임선생님과의 상담, 체육 선생님과의 상담으로 하루를 보냈고, 내일은 하루 방학이다.

방학이 하도 많아서 이제 방학은 놀랍지도 않다.

목요일에는 랜턴 데이 행사가 있고, 금요일에는 학부모 워크숍이 있다.

다음 주에는 나를 위한 시간이 있길 간절히 바란다. 나에게도 쉬어갈 시간은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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