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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in Jan 31. 2023

영어 울렁증 말고 금발 울렁증

왜 꼭 노란 머리랑 놀고 싶은 건데? (플레이데이트의 세계)

독일에 온 지 6개월이 지났다.

내가 독일에 오기 전에 제일 걱정했던 건 딸아이의 적응 문제였는데, 아이는 걱정이 무색할 만큼 너무 빠르게 이곳에 적응했고, 이제 이곳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아이의 세계에는 이제 한국과 독일이라는 두 개의 나라가 확실하게 존재하고, 두나라의 공통점과 차이점도 스스로 인지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가끔 역할놀이를 할 때면 자기가 먼저 " 안됩니다. 여기는 독일입니다."라고 할 때가 있는데 정확하게 한국과 독일의 차이를 알고 있는 걸 보고 나도 놀라곤 한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되는데 독일에서는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은데 그걸 3살 아이도 정확하게 알고 있어 웃기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아침 8:30분에 시작해서 오후 3시까지 하루 6시간 반을 학교에서 보내다 보니 영어는 순식간에 늘었고, 혼자 해야 하는 일들이 많은 이곳에서 아이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점점 늘어났다.

혼자 옷 갈아입고, 신발 갈아 신고, 간식 먹고, 점심 먹고, 자기 짐 챙기고, 화장실도 혼자 간다.

가끔 학교에서 화장실에 혼자 갔다가 옷이 조금 젖으면 옷이 젖었다고 선생님한테 갈아입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하고 갈아입고, 집에서는 내가 화장실을 따라가면 문 닫고 나가라고 한다. 혼자 할 수 있다고.

정말 놀라운 변화다. 한국나이 5살, 여기 나이 3살의 딸이 6개월 만에 부쩍 큰 느낌이 든다.


외동이라 그런 건지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혼자 놀기를 정말 못하는 딸아이는 조금씩 혼자 놀 줄 알기 시작했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학교 첫날 담임선생님이 혼자 노는 시간은 정말 중요하다고, 우린 그걸 가르칠 거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걸 배운 건지, 같은 반에 한국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혼자 놀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가끔 데리러 가서 교실 안을 살짝 들여다보면 혼자 놀고 있을 때가 있어 대견하기도 하다. 

그렇게 혼자 놀기도 하지만 친구들과 같이 놀고 싶은 3살 딸아이는 학교가 끝나면 같이 놀 친구가 없어서 슬퍼하며 왜 남아있는 사람이 없냐고 묻는다.

한국에서는 어린이집이 끝나면 모두 다 어린이집 앞이나,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를 향해 달려가서 그곳에서 아무런 약속 없이 당연한 듯 같은 반 친구를 만나서 놀았다. 하루 한 시간 정도 신나게 놀이터에서 뛰어놀다 집에 들어왔던 그 시간들이 얼마나 그리운지 모르겠다.

여기서 놀랐던 점 중 하나는, 학교가 끝나면 모두 바로 집으로 간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아무도 같이 놀 친구가 없다. 처음 알게 되었다. 외국은 한국처럼 끝나고 유치원 앞 놀이터에 모여서 놀거나 하지 않고, 약속을 잡아서 친구랑 논다는 사실을.

그걸 플레이데이트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Playdate' 뭔가 이름도 거창한 이 데이트는 한국에서 자라 30대 후반인 된 나에게는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너무 부담스러운 데이트다. 그래도 나는 엄마이니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위해 플레이데이트를 해야만 한다.

그래서 하루는 아이한테 같은 반 친구 누구랑 놀고 싶은지 물어봤다.

아이는 대답한다. " 올리비아, 엘리자, 라이네뜨"

우리 딸이 놀고 싶어 하는 친구들은 영국, 네덜란드에서 온 금발머리 아이들이다. 

아이가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엄마, 우리 반 누구 머리는 노란색이야, 이뻐'라고...

아이의 눈에 금발머리 백인들이 이쁘게 보이고 친해지고 싶었나 보다.

'조금 더 편하게 아시아 친구들부터 같이 놀면 안 되나?' 하는 속마음을 숨긴 채 아이한테는 알겠다고 우선 대답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부족한 영어실력이 이번에도 나의 발목을 잡는다.

영국 엄마야 영어가 모국어니 말할 필요도 없고 네덜란드도 영어를 엄청 잘하는 나라이니 그들의 영어실력은 원어민 그 자체. 가끔 그 엄마들과 얘기를 할 때면 나는 토익 시험 때보다 더 집중해서 들어야 하고, 가끔은 너무 어려운 주제를 얘기해서 한마디도 끼지 못할 때가 있어 기가 죽을 때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유럽인이라 그런지 너무 빠르게 친해지고 그들만의 관심사와 공통점이 있는 듯하다. 

학기 초반에 같은 반 엄마들끼리 coffee morning이라고 해서 아이들 들여보내고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떤 적이 있었는데, 첫날 우리의 대화 주제는 여기서 일하면 세금 얼마 내나 이런 이야기였다. 아이 같은 반 엄마들끼리 처음 모여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것으로 예상했던 나는 세금, 복지, EU국가 내에서 일 구하기 등에 대한 주제의 이야기에 말문이 막혔다. 한국에서도 내가 내 급여의 몇%를 세금으로 내는지 잘 몰랐는데 이걸 영어로 얘기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나도 영어를 엄청 잘한다면 그런 대화를 이어 나가는데 문제가 없겠지만, 나의 영어실력으로는 무리가 있다. 영어를 잘하지는 않지만 못하지도 않는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는 영어 못했네, 못했어'하며 현실을 깨닫고, 부족한 나의 영어실력을 탓하며 집에 돌아왔던 첫날의 커피모닝을 잊을 수가 없다.

영어 울렁증이 아닌, 유럽엄마 울렁증이 생길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엄마들에게 내가 먼저 플레이데이트 요청을 해야 한다니...

심지어 다들 학교 근처에 살지만 나는 차로 20분 정도 거리라 집도 멀어 평일 플레이데이트는 어렵고, 주말에 약속을 잡아야 한다. 또 친구들이 놀러 오면 무슨 음식을 줘야 할지, 뭘 준비해 두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한국이면 놀이터에서 놀면 되고, 집으로 초대해도 배달음식이 있어 걱정이 없는데 말이다.

이런 걱정들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약속 잡기를 차일피일 미루던 어느 날, 네덜란드 친구 엄마가 먼저 와서 아이가 우리 딸이랑 놀고 싶어하는데 자기 집에 오라고 한다.

오예!! 차마 말 못 하고 있었는데, 먼저 불러주는 친구가 있어 너무 고마웠다.

그렇게 처음 우리 딸은 네덜란드 친구네 집에서 플레이데이트를 하고, 또 다른 네덜란드 친구 생일파티에 초대받아 놀러 가기도 하고, 우리 집에 그 친구들을 초대해서 같이 놀기도 했다.

이놈의 플레이데이트가 뭐길래, 이 약속 하나에 기분이 좋았지는 걸까?

아직 3살 아이들의 플레이데이트에는 엄마가 동행하기 때문에, 아이가 놀고 있는 2-3시간의 시간 동안 나도 자연스레 그 엄마와 대화를 하게 된다. 여유 있게 차 마시며 대화하고 즐기는 시간을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눈으로는 아이가 잘 놀고 있는지 봐야 하고, 두 귀는 영어 듣기 평가 시간처럼 초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그렇게 2-3시간의 플레이데이트가 끝나면 아이는 신나게 놀고 컨디션이 한껏 올라가지만 나는 시험이 끝난 학생처럼 녹초가 된다. 그래도 딸아이의 플레이데이트 덕분에 나도 여기서 친구가 생기는 느낌이다. 

한국에서는 엄마가 스케쥴을 짜고, 아이의 친구를 만들어준다는데, 아무리 어려도 아이의 의견을 중시하는 독일에서는 내 아이가 원해야 그 친구를 생일파티에 초대할 수 있고, 플레이데이트도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처럼 엄마가 먼저 다른엄마와 약속 잡고 "오늘은 OO랑 놀자" 하는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엄마인 내가 우리 아이 덕분에 친구가 생기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거창하고 부담스러운 플레이데이트가 점차 익숙해지고 적응이 되면, 우리의 독일 생활도 더욱 즐거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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