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늙은이의 마지막 기억
여기가 요양원인지 병원인지도 모른다. 그저 해 뜨면 밥 주고 시간 되면 기저귀 갈아주고, 또 때 되면 밥 주고. 대 되면 닦아주고, 그러는 곳이다. 젊은 시절 어떻게 살아서 지금 여기에 있게뙜는지는 모르지만, 그저 손주들 뒷바라지하고, 친딸의 무시무시한 폭행을 하루하루 견디다 보니, 어느 날 친딸이 날 여기다 데려다 놨다. 크게 물만은 없다. 밥 주고 재워주고 보살펴 주니, 뭘 더 필요로 하겠는가? 친딸은,,, 어릴 적 바람피운 남편의 무시무시한 폭력을 견디다 못해 잠시 집을 나간 적이 있었는데, 딸은 그게 자기르 버린 거라 생각하고 평생의 원망거리로 삼고 있다. 그래도, 손자가 마음이 어질어 엄마에게 그러지 말라고도 하고 엄마 몰래 맛있는 것도 챙겨주고 하는 것이 그나마 인생의 위로였다.
집이 이사를 간다고 했다. 난 당연히 함께 가는 줄 알았는데, 지들끼리 마나 가고 난, 어디 오래된 바으한칸을 얻어 준다고 한다. 오래되고 오래된 집이라 뭣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나랑은 더 이상 같아 못살겠다고 하니, 따르는 수밖에. 여름에는 더위에 죽고 겨울엔 추위에 죽는, 밥은 복지기관에서 주는 걸로 배줄리는, 독거노인의 삶이 시작됐다. 물론 손자는 극렬히 반대했다.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엄마에게 눈물로 호소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때부터 정기적으로 손자가 날 찾아와 맛있는 거 사주고 하는 게 내겐 큰 기쁨이 되었다.
그러던 중 손자가 ‘할머니를 저렇게 혼자 둘 순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지들이 사는 집으로 억지로 가게 되었다. 함께, 살게 되었는데, 정말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친딸은 내 목소리 자체를 싫어하고 가족의 일원으로 말한마디 하는 그 자체를 죽도로구 싫어했다. 그래도, 사람이 말을 하지 않고 살 수 없진 않은가? 한마디라도 입을 열면 날아드는 핀잔과 폭행은 정말 차라리 독거노인으로 살고 싶었다.
어느 날, 손자 직장이 멀어 일하러 간 사이 딸은 여기저기 전화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매우 다급해 보였고 그 모든 걸 아들이 없는 기간에 해 치우려는 것 같았다. 한참을 전회로 여기저기 알아보더니, 갑자기 집 앞에 앰뷸런스가 와 있었다. 요양병원 차였다. 나를 요양병원으로 보내르작정이었다. 난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그 차에 올라 타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야만 했다. 덜커덩 거리는 승합차의 박자에 맞춰 그동안 살아온 삶들과 앞으로의 시간들이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손자는 알고 있을까? 손자는 동의했을까? 들리는 얘기로는 손자는 분노하며 집안을 뒤잡어 엎었다 한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손자가 날 데리러 왔다. 병원 직원들 줄 간식을 가득 싣고서. 그리고 며칠 후 손자는 날 퇴원 시키고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손자가 내 배를 만져보더니 갑자기 펑펑 우는 것이었다. 그냥 손으로 만져도 만져지느느종양 덩어리가 있다는 것이다. 친딸마저 놀라게 하한 이 말은 나를 큰 병원으로 데려갔는데, 다행히 악성은 아니고 커다란 양성종양이었다. 수술을 하고, 회복을 하고, 다시 집으로 왔다. 난 큰 수술까 받았으니 당연히 집에서 지내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딸의 생각은 달랐다. 수술까지 받았으니 당연히 요양병원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한바탕의 집안싸움 후 결국 내가 얘기했다. “내가 가마” 그때부터 나의 요양병원 생활은 시작되었다. 정시 정각에 밥 먹고 씻고 하는 편하고도 슬픈 생활. 그래도 손자는 일주일에 세 번 오기를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너무 자주 온다고 그럴 정도였다. 올 때마다 맛있는 거 사 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나마 손자 덕분에 견딜만한 생활이었다.
한 번은 손자가 할머니를 꼭 집에 한번 모시고 싶다고 해서 억지로 억지로 집에 외출한 적이 있다. 집은,,, 집이다. 무슨 편지풍파가 있어도 사람은 집에서 살아야 한다. 오래 있지는 못했다. 병원 규정상 하루 만에 병원으로 갔는데, 너무 괴로웠다. 아직 집인 것 같고 내 있으르곳, 집에 있지 못하는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이 코로나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에 병원이 폐쇄가 되자 손자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점점 희미해져 가던 손자의 얼굴도 나중에는 기억이 나질 않고, 손자가 있다는 사실조차 다 잊게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치매환자라고 불렀다. 언젠가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아저씨가 이상한 옷을 입고 와서 “할머니, 할머니”하며 눈물짓기도 했던 것 같다.
내가 원래 심장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거기에, 코로나에 치메에,,, 언제 제 세상으로 가도 이상하지 않을 고령에,,, 그렇게 몸뚱이만 굴리고 있었지만 손자의 사랑만큼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나는 지금 눈을 감아간다. 장례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래, 나도 때가 되면 가는 것이지. 손자와 딸이 와 있는 것 같다. 부디 그냥 장례식 하지 말고 유골은 네 집 마당에 묻어다오.
화장을 당하고,,, 나는 소원대로 손 자네 집 마당에 유골이 묻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