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by Zarephath

<누나>


"안녕, 오랜만이야""응 누나, 정말 오랜만이군. 이게 얼마만이지?"

10 수년의 세월의 간극을 넘어 둘은 마주했다. 서로는 알고 있었다. 그 십수 년의 간극을 다 집어던져서라도 서로를 원한다는 것을.

처음 둘의 만남은, 교회 대학부에서 이뤄졌다. 나를 담당하는 조장으로 그 누나가 정해졌는데, 그 누나에 대한 첫 이미지는, 한마디로 '여대생 다움'이었다. 섹시하지도, 글래머러스하지도 않았지만, 그 단아한 몸매과 총명한 눈빛은 전형적인 '여대생 다움' 그 자체였고, 내 모든 감정적 헌신은 선택의 여지없이 그 누나를 향하고 있었다.

첫 만남이 누나와 동생이라는 지극히 상투적이고 자연스러운 관계였기 때문에, 아주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난 모든 시간 모든 공간에서 그 누나에게 흠뻑 젖어들 수 있었다.

단지 누나라는 핑계로 쓸데없는 일들로 사적인 연락을 취할 수 있었고, 그 누나는 흔쾌히 응했고, 둘이서 밥 먹고 영화 보고,,, 그런 시시콜콜한 일들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그러다, 나에게 입영통지서가 날아왔고, 나는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위해 훈련소에 들어갔다.(의대생이었던 나는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후 공중보건의사로 복무하게 되었다.) 훈련소 내내 편지 쓰는 시간엔 그 누나에게 편지를 썼고, 훈련소를 퇴소하자마나 연락한 사람도 역시 그 누나였고, 그 누나도 싫어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기를 의지해가고 좋아해 주는 동생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만남이 이어지면서, 점점 특별한 날들, 예를 들어 크리스마스이브나 밸런타인데이 때 만나는 사람도 그 누나가 되었고, 이상하게 그 누나에게도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어느 날은 애견인인 내가 강아지를 누나에게 선물한 일이 있는데, 누나가 키우다 못해 다른 사람을 줘 버린 일이 있었다. 난 "누나 그건 내 마음을 누나에게 준 건데..."라고 말하자 무척이나 곤란해했던 그 누나가 생각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누나는 나를 만날 때 하지 않던 화장을 하지 시작했다. 향수도 뿌리기 시작했다.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던 누나가 술을 좋아하던 날 만날 땐 한두 잔씩 술을 입에 대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 둘은 너무너무 자연스럽게 애매모호한 사이를 넘어 극도로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누나는 전산과를 다녔다. 덕분에 그때까지만 해도 생소하던 PC통신이며, 채팅, 이메일 등을 누나를 통해 다 배웠다. 그리고, 나는 공중보건의로 일하고, 누나는 공무원이 돼서 전산직 일을 하고 있었다. 첨엔 재미로 이메일이며 채팅이며 둘이서 하던 것이, 거의 하루 대부분을 누나와 대화하면서 보내게 됐다. 누나도 싫지 않은 것 같았다. 한 번도 내가 말을 걸어오면 씹지 않고 아무리 시시한 얘기라도 다정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지루한 공중보건의 시절을 누나와 함께 나름 재미있게 보내건 중, 이젠 더 이상 그런 어중간한 상태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나는 이미, 나에게 세상 모든 여자를 포기한다 해도 누나만 있으면 좋을, 그런 존재였다. 그런 마음을 어떻게 아무런 일 없는 듯 지나가게 둘 수 있겠는가? 여느 때처럼 채팅을 통해 누나에게 말을 걸었고,,, 이런저런 잡담을 좀 하다가,,, 내 마음을 고백했다. 아! 그런데, 정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누나는 연하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그렇다면 그동안 나에게 보인 태도와 나와의 그 친밀한 관계는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혼란스러웠다. 내 인생에 없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이제 없어지게 되는 순간이 되고 만 것이다. 마음에 심각한 트라우마를 입고, 난 거의 폐인이 되었다. 쓰라린 마음, 세상이 무너진 마음을 부여잡고 있는 나에게 누나는 몇 번 휴대전화 문자고 괜찮으냐고 안부를 물어왔지만, 뭐가 괜찮냐는 말인가? 도대체 위로는 왜 하는 것 일가? 그렇게, 그 누나와의 관계는 끝나고 말았다.


“누나, 그땐 왜 그런 거야? 정말 난 아니었던 거야? 나랑 그렇게 친하게 지내고, 나중엔 나 만나려고 화장도 하고, 밥 먹고 영화 보면 내가 돈도 다 내고, 우리 데이트한 거 맞잖아? 누나도 나 좋아한 거 맞잖아?””야, 넌 십 년도 넘게 만나서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해? 그냥 우리 반가워만 하자. 옛날 행복했던,,, 아니 재미있었던 얘긴 해서 뮈하니?””누나 방금 뭐라 그랬어? 행복했다 그랬지? 분명히 그랬지?” 내가 과거에 이렇게 집착하는 이유가 있었다. 누나가 날 거절한 이유가 연하라는 것이었는데, 누나는 나랑 똑같은 나이의 연하남과 결혼한 것이었다. “누난 나보곤 연하라사 안된다 그래놓고 나랑 똑같은 나이의 연하랑 결혼했잖아? 내가 지금 안 따지게 됐어?""너,,, 아직 나 좋아해? 그럼 얘기해 줄게."난, 잠시 망설였다. 난 아직 미혼이지만 누나는 엄연히 결혼해서 애가 셋이다. 애 셋 딸린 유부녀에게 감정을 고백해 봐야 뭣하겠는가? 그렇지만 난 아직, 아니 영원히 누나를 좋아한다. 그것 만큼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할 수가 없었다. 난 무겁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얘기해 줄게. 나도 너 좋아했어. 아니 어쩜 지금도 널 좋아하는지도 몰라. 그렇다고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단 얘긴 아니야. 그건 그렇고 그때 널 거절한 이유는 네가 의사이기 때문이었어. 넌 그때도 철이 없지만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내가 너와 결혼하려면 우리 가족이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인지 아니? 열쇠 3개 같은 말이 그냥 있는 소리인 줄 알아? 나 하나 행복하자고 우리 가족들을 고통 속이 빠트릴 순 없었어."누나는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얘기를 이어갔다. "나도,,, 힘들었어" 난 망치로 뒤통수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최소한 좋아하는 여자에게, 아니 날 좋아하지 않는 여자라 해도 당당하게 사귀자고 할 수 있는 조건이라 은근히 자뻑하고 있던 것이 진정 좋아하는 여자에겐 거절당할 이유였다니. 누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결혼도 목회자와 했는데 교회가 잘 안 돼 그나마 누나 공무원 월급으로 어렵게 사명감으로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가슴이 찢어졌다. 그리고 아무 소용없는 얘길 이어갔다. "누나는 내가 누나를 그런 것들로부터 지켜줄 순 없을 거라 생각했어? 누나를 결혼 때문에 생기는 그런 지저분한 일들, 내가 막아 줄 수 있었잖아?""아니, 넌 감당 못했을 거야. 결혼은 우리 둘만 하는 게 아니라고. 그리고, 난 너한테 그런 거 막아달라고 하기도 싫었고. 그냥 네가 평범하게 행복하길 바랐어. 남들처럼.""누나,,, 누나,,, 너무하잖아...""우리, 다른 애기 하자."그러더니 누나는 한껏 예전 재미있었던 애길 슬프고 아쉬운 기색 하나 없이 한참을 이어 나갔다.


누나와 나는 카페를 나왔다. 그리고,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한참 후에야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물어보고 데려다줬다. 순수했던 내 첫사랑. 한 점의 욕정도 없었던 눈꽃 같던 내 첫사랑 누나와 그렇게 걸었다. 걷다가 손을 잡고, 어깨를 감싸 안아도 거부하지 않았다. 누나도, 이게 나와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순간, 내 눈꽃 같던 마음에 욕정의 불이 붙었다. 걷는 도중, 곳곳에 모텔이 보인다. 왠지, 이 마지막 순간, 누나를 안고 싶었다. 그냥 잃고 싶지 않았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누나,,, 저,,, 저기 갈까?" 누나는 몸을 돌이켜 날 한참 응시했다. 누나 역시 날 갖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내게 남긴 마지막 한마디, "잘 가, 행복해" 그 말을 남기고, 누나는 자기 길을 홀로 걸어갔다. 그것이 누나와의 영원한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후회했다. 눈꽃 같던 내 첫사랑의 추억마저 욕정으로 더럽히고 말았다는 생각에, 다 망쳐버렸다는 생각에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더 이상 후회도, 뭣도, 소용이 없어져 버렸다. 나도 발길을 돌이켜 내 길을 걸었다. 그렇게,,, 내 첫사랑은 망쳐버리고 나서야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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