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향 그녀>
언젠가부터 도서관 한편에서 복숭아 향기가 났다. 복숭아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다. 아무리 맛이 없어도 복숭아는 그 향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힘이 있는 신비로운 과일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복숭아 향이 도서관 한편에서 계속 나를 신경 쓰이게 했다. 그 아이가 숨을 내쉴 때마다 내 모든 후각과 모든 감 감을 복숭아 향으로 물들이던, 그 아이... 도저히 그냥 나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건 분명, 나에게 의미이고, 변화이고, 생의 기쁜 다가옴이었다. 나보다 한 학년 아래인 그 아이는 자신에게서 복숭아 향이 나는지, 그 향이 근처의 누군가를 물들이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그저 책에만 눈을 내리꽂고 있었다.
빈틈없는 그녀, 어떻게 하면 그녀의 복숭아 향기가 날 아프게 하고 있다는 걸 알게 할 수 있을까? 무서울 정도로 책에만 눈을 꽂고 있는 그녀에게 나는 하나의 빈틈일 수 있을까? 난 그녀의 언저리에서 그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때는 크리스마스 시즌, 연인들과의 고백, 또 고백을 통해 연인이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계절, 나 역시 이 감정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무서우리만큼 아름다웠지만, 난 가장 비겁한 방법으로 다가가기로 했다. 편지를 썼다. 언젠가부터 너의 복숭아 향기가 날 아프게 한다고... 그리고 정성껏 준비한 카세트테이프에 가득한 사랑 노래들... 그리고,,, 그녀를 마주칠 준비를 했다.
그녀는 너무나, 너무나 아팠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아팠다. 어느 정도의 빈틈만 보여줬어도 말을 걸고, 내 마음을 보여주고, 그랬을 것인데, 그 편지를 받아 본 후 그녀와 마주쳤을 때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은,,, '경멸' 그 자체였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저지러렀던 그 어떤 나쁜 짓에 대해서도 받아본 적이 없던 경멸의 눈빛. 그 눈빛 아래서 난 그저 버러지였다. 내가 편지를 쓰고 노래를 녹음하고, 그녀를 상상하며 행복해하던 그 모든 것들이 세상에서 가장 몹쓸 짓이라는 듯, 그녀의 눈빛은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부딪힘 이후 난 완전 바보가 되어 버렸다. 단 한 번의 눈길이 내게 부딪혔을 뿐인데, 아무런 변명 한마디 못하고, 그때부터 그녀를 도망 다녔다. 숨어 다니다, 그녀 비슷한 실루엣만 보여도 심근경색이라도 온 듯 가슴을 부여잡고 도망 다니기 일쑤였다. 때는 겨울, 곧 방학이었지만, 단 하루도 그렇게 보낼 순 없었다. 결국 난 휴학을 했고, 마음을 추스르고 잊기 위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복학을 하면 그 아이와 같은 학년을 다니게 된다. 아! 그건 괜찮을까??? 난 대체 왜 그녀에게서 복숭아 향을 맡아서는, 아니 왜 복숭아 따위를 좋아해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절을 보내게 돼 버렸을까???
복학을 했다. 마냥 휴학을 하며 그녀가 졸업할 때까지 숨어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같은 학급이라니, 너무 가혹하다. 첨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녀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으나,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내 심장 바닥까지 훑어보는 듯한 그녀의 눈길은 정말 너무너무 무서웠다. 일부러 보통 남자애들이랑 다를 바 없다는 듯한 행동을 한답시고 야동 동영상 돌려보는 패에 들어가 순서 싸움을 하기도 하고, 여하튼 최대한 한심하고 지질하게 보이려 애썼다.
그러던 어느 저녁, 도서관 앞을 서성이고 있는데, 그녀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거의 미친 척하며 물어봤다."데려다줄까?" 그녀는 의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자취방까지 갈 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집 앞. 그녀는 이번에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 들어갔다. 이것이 꿈인가??? 이렇게 집에 데려다 주기까지 할 수 있다면, 내가 조금만 더 미친 척했다면, 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내일이라도 용기를 내 볼까?
그러나, 그 내일, 나는 청청벽력 같은 소식을 마주했다. 학급의 남자애 하나와 그 여자애가 사귀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럼, 내가 데려다주도록 허락한 것은 마지막으로 베푼 불쌍하기 그지없는 인간에 대한 코딱지많한 동정이었나?
뭐 어떻게든 버텨내야 했다. 내 온 육체와 정신은 그녀의 복숭아 향에 글려 들어 버렸고, 난 최대한 내 인생을 살아내야 했다. 시힘도 치고 공부고 해야 했다. 그 어둡고 긴 터널 같은 삶 속에서도 한걸을 한걸음을 걷는 방법을 배워야 했고, 나중엔 꽤나 능숙하게 터널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는 도중 그녀는 사귀던 애랑 헤어지기도 하고, 뒤돌아 보면 일상적인 일들이 하나, 둘 지나갔다.
졸업이 다가오고, 인턴 지원병원을 정해야 하는데, 그 애가 본교 대학병원에 남는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네가 여기 있겠다는데, 너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품을 수 없는 나지만, 어디로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나도 본교 대학병원에 남겠다고 지원을 했다. 그랬는데, 성적이 잘 나왔다며 그 아이는 서울의 대형병원으로 진로를 바꿨다. 그렇게, 그 애는 떠나고 나는 남는 것으로, 이 고통스러운 터널 속의 복숭아 향은 끝이 나게 되었다.
뒤돌아 보면, 참 병신스럽기 그지없는, 아무런 스토리 하나 남기지 못한 짝사랑 얘기다. 단, 사랑 때문에 병신이 되고, 인생 길이 뒤틀리고, 뒤틀리지만 그 뒤틀린 길을 그저 걸을 수밖에 없던,,, 바보 같았던 시절의 사랑 한 자락이 떠올라,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