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과 루시퍼, 타르코프스키와
라스 폰 트리에

2021년 5월 19일의 글

by 육육삼의 삼삼칠

"나는 히틀러를 이해한다."


2011년 칸 영화제에서, 한 미치광이는 영화계 역사상 가장 논란이 될 한 마디를 뱉어냈다. 자신의 개인사가 투영돼 생겨난 이 황당한 실언은 그를 영화제 사상 최초로 '외교상 기피 인물'로 지정되게 만들었다. 그의 이름은 '라스 폰 트리에'. 영화 역사상 가장 논란의 중심에 위치하는 감독이다.


이보다 2년 앞선 2009년, 영화 <안티크라이스트>의 엔딩 크레딧에서 트리에는 "이 영화를 타르코프스키에게 바칩니다."라는 사뭇 이질적인 헌사를 건넸다. 혹자의 말처럼, 영화 사상 대표적인 '크라이스트'에게 이 <안티크라이스트>의 감독이 그러한 존경을 바치는 모양새가 영 일반적인 형태는 아니었을 테니까.



트리에는 타르코프스키를 존경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다녔다. 시선을 한 발짝 물러나 두 감독의 작품을 비교한다면 두 감독은 제법 닮은 구석이 많다. 작게는 <솔라리스>와 <멜랑콜리아>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눈 속의 사냥꾼'이란 회화에서부터 크게는 다루는 소재나 세속과 문명에 대한 반발적인 태도에서까지. 두 감독은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닮았다. 또한 생각하기도 싫지만 라스 폰 트리에는 가톨릭 신자이기도 하다. 그리스 정교회 신자로 이미 유명한 타르코프스키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그 숭고한 신성을 생각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옥의 비전이 트리에의 영화엔 가득하다.


타르코프스키와 라스 폰 트리에, 두 감독은 아마도 영화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감독이자 가장 독창적인 감독일 것이다. 두 감독의 작품에선 다른 어떤 감독들에게선 찾아보기 어려운 독창적인 작법을 통해 독보적인 비전을 체현해낸 방식이 항상 감탄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감독은 가장 결정적인, 그들이 만들어내는 영화에서의 주제인 구원을 대하는 태도에서 거의 정반대의 시선을 보인다.


사실 개인적으론 타르코프스키를 압도적으로 좋아하는 편이며 더 위대한 감독 역시 타르코프스키라고 생각하고, 트리에의 일부 영화들은 상당히 언짢음을 느껴 좋아하지 않지만, 분명 나에게 있어 두 감독의 작품들은 어떤 감독들의 영화보다 흥미롭고 관심 있는 영화들이다. 사실상 타르코프스키의 '아치 에너미'처럼 보이는 라스 폰 트리에, 이번 글에선 서로 다른 듯 닮은 두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라스 폰 트리에의 미학과 비전, 그리고 연결점과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특별하다. 그의 영화는 어떤 감독의 영화와도 다르다. 우선 그는 지금까지도 영화 문법의 기본으로 남아 있는 '몽타주 이론'에 동의하지 않은 감독이다. (※몽타주 이론의 예를 들자면, <기생충>의 중반 강력한 리듬으로 몰아치는 복숭아 시퀀스(??)를 떠올리면 된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를 '수법'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데, 몽타주 수법은 관객으로 하여금 스크린 앞에서 벌어지는 시각적으로 고정된 경험을 철저하게 자신의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을 '스크린 위에 나타난 삶'과 관련시킬 수 있는 영화 특유의 수용 방법을 침해하는 전제주의적인 방법이라 여겼다.


또한 타르코프스키는 상징이라는 수단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타르코프스키는 화면을 구성하는 연출이 단순한 표시나 틀 또는 특정한 개념이 되어 버린다면 모든 것은 허위적인 도식에 머무르며, 더 깊이 생각해 보려 하는 가능성들을 배제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단독적인 이미지들은 '상징(Symbol)'의 개념이 아닌 '은유(Metaphor)'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그렇기에 그의 이미지들은 분명하게 특정 의미와 일대일로 대응되는, 해석해야만 하는 상징으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닌 이미지 그 자체로서의 순수성과 생명력을 가지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연 '시간'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영화라는 매체가 인류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시간을 직접적으로 사로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예술이라고 생각했으며, 언제든 시간을 반복하여 재생할 수 있으며 언제든 그 시간 속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타르코프스키가 생각하는, 시간을 사로잡을 수 있는 영화 예술의 핵심이 되는 요소는 바로 '롱테이크'이다. <올드보이>의 장도리 액션신, <살인의 추억>에서의 살인 현장신, <그래비티>에서의 오프닝 롱테이크, <1917>에서의 원 컨티뉴어스 숏 등등 수많은 영화에서 롱테이크는 효과적으로, 때로는 차력쇼를 연상케 할 만큼 과시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롱테이크의 가장 큰 시사점은 프레임 속 인물이 경험하는 시간과 프레임 바깥 관객이 경험하는 시간이 동일시된다는 것이다. 숏이 많아질수록 템포는 빨라지지만 인물과 관객이 경험하는 시간의 총량은 점차 동떨어지게 된다. 숏이 많아질수록 관객이 의미를 찾아가는 능동성은 사그라든다. 타르코프스키는 롱테이크라는 방법을 통해 관객들에게 의미를 주입시키는 방식을 거부했다. 그는 프레임 안에 서정성 가득한 이미지를 필사적으로 담아냈으며, 그의 영화에서 무엇을 보든지 무엇을 느끼든지 아마 많은 것은 관객에게 달린 문제일 것이다.


(※보편적인 영화에서 한 숏의 평균 길이는 4.71초라고 한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의 한 숏의 평균 길이는 잘은 모르지만 대략 분 단위로 짐작된다. 그렇기에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지루하다며 푸념하고, 심지어는 관람 도중 꿀같은 단잠에 빠졌다는 후기는 자못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생각되긴 한다.)



타르코프스키는 독실한 기독교(러시아 정교회) 신자였다. 그의 영화의 인물들에겐 고난과 시련이 함께하며, 그들은 자신뿐만 아닌 전 지구적인 구원을 위해 시련을 감내하고 희생을 자처한다.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주인공이 세상의 어두운 현실에 대한 경험자와 목격자로서 존재하였듯, <잠입자>의 주인공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구역'으로 향하였듯, <노스탤지아>와 <희생>의 두 주인공이 '믿기 어려운 것'에 대한 믿음을 통해 구원을 갈망하는 모습 등에서 우리는 타르코프스키가 갈망하는 구원과 믿음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느낄 수 있다.


감독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그의 특징을 짐작할 수 있는데, 감독의 아버지는 러시아의 유명한 시인이자 교수인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였으며 어머니는 인쇄소의 직원이었다. 타르코프스키의 부모는 그가 어렸을 시절부터 별거에 들어간 상태였으며 타르코프스키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보냈다고 한다. 감독의 이러한 개인사는 그의 작품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누군가를 그리워한다. <솔라리스>와 <거울>, <노스탤지아>의 인물들에게서 그러한 정서가 가장 잘 드러난다. 이밖에도 그의 모든 영화에선 신에게서 오는 구원의 시간을 기다리고 믿음을 잃지 않는 인물들의 정서가 깊개 배여 있다.


또한 타르코프스키는 지질학을 공부한 이력이 있다. 그 과정에서 해저 탐사반이 되어 심해를 탐구한 경력도 있으며 이를 통해 물의 이미지를 영화로 담아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의 영화에서 매번 등장하는 물의 운동하는 이미지와 드넓은 대자연의 풍경은 타르코프스키의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에 의함이 다름 아닐 것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그냥 느끼면 된다. 화면에 담긴 자연을 만끽하며,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관찰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영화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왜 자신의 영화에선 그토록 많은 비, 불, 물이 등장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혼란에 빠졌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가 밝히길 "나의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자연 현상들은 그저 내가 자라난 환경의 특성이었을 뿐이며, 일부 사람들이 이를 가지고 그 무슨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 노력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라고 말하였다. 타르코프스키는 생전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 많은 평론가들이 보편적인 영화 이론적 견해와 규정의 틀로 해설하는 것들을 혐오해 왔으며, 그저 한 낯선 관객이 스스로의 생생한 감지력으로 작품을 통해 직접적으로 느낀 것을 고백해온 편지를 통해 예술가로서의 보람을 느꼈다고 이야기한 적 있다.


아름다운 것은 진실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감춰진 채로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와 목적에 대해 고민해 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채로 예술을 수용하려는 자들의 태도는 "재미없군!"이라는 간결화된 평가를 내림으로 나타나지만 진실을 추구하려는 자들은 예술가의 고통을 통해 얻은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타르코프스키는 가지고 있다.


하나 비약해서 말하자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감상할 때에는 지금까지 많은 영화를 통해 숙달되어 왔던 감상법을 온전히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전 숏과 현재 숏과의 논리적 인과를 내내 맞춰가며 '이해해' 간다거나, 영화가 제공하는 수많은 이미지들을 반사적으로 머릿속에 받아 적듯이 집어넣으며 1초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비장한 태도의 감상법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선 그다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저 영화가 보여주는 압도적인 장면의 미감을 온전히 느끼며,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는 등 능동적으로 영화를 향유하면 된다. 그렇게 한다면 어느샌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그 모든 것들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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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이 그런 것인지 머리가 나쁜 탓인지, 나는 우울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나는 한 영화에 대한 '후유증'을 강하게 앓는 경우는 극도로 적으며 영화가 끝난 이후엔 남들보다 쉽게 영화에서 빨리 빠져나오는 편이다. 우울증을 경험했거나 앓고 있는 중인 이들이 트리에의 영화를 보게 되면 다면적인 공감과 기이한 해방감을 느낀다고 한다. 우울증이라는 병증을 경험하지도 알지도 못한 나로서는 그저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를 관찰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리에의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그 강력한 멜랑콜리함에 나 스스로가 잠식되곤 한다. 나에게도 라스 폰 트리에는 분명히 특별한 감독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이만 제쳐두고,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는 매혹적인 작품이다. 자극적인 소재와 주제, 연출로 인해 상당수가 불호를 표하는 감독이지만 우선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영상의 아름다움만큼은 쉽게 눈을 떼기 어렵다.


때로는 초정밀하게, 때로는 초현실적이게, 라스 폰 트리에의 영상미는 기이한 분위기가 가득 함유되어 있다. 극단적으로 미니멀한 <도그빌>의 이미지부터 초현실적인 공간을 묘사한 <살인마 잭의 집>까지, 이미지를 만들고 담아내는 라스 폰 트리에의 능력은 그 다재다능함에 있어서 탁월하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가장 먼저 들어오는 연출적 특징이 롱테이크라면,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에서 가장 먼저 파악되는 연출적 특징은 핸드헬드라고 할 수 있다. 1995년 덴마크의 영화감독들이 주창한 '도그마 선언'에도 담겨 있는 원칙인 이 핸드헬드는 때로는 영화에 사실성을 불어넣기도 하며 때로는 극도로 불안한 정서를 만들어 주인공의 우울함과 혼란스러운 내면을 표현한다. <멜랑콜리아>의 케이스를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데, <멜랑콜리아>는 유려하게 공간과 인물들을 훑는 카메라 워킹과 초현실적인 영상을 배치하는 한편 동시에 시종 주인공에게 달라붙는 핸드헬드를 섞어가며 두 연출 간의 충돌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데 이때 생겨나는 혼란스러움과 가라앉는 우울함의 정서가 단연 일품이다.


이야기적으로 본다면, 라스 폰 트리에의 많은 영화는 여성 성녀 수난사 혹은 여성 해방사의 구조를 띄고 있다. '골든 하트 3부작'이라 흔히 묶이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 <백치들>, <어둠 속의 댄서>의 주인공들(모두 여성)은 수난과 위기를 겪는 성녀 수난사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우울 3부작'이라 흔히 묶이는 <안티크라이스트>, <멜랑콜리아>, <님포매니악>의 경우 여성 주인공들은 (그의 영화에서) 남성으로 대변되는 '규정'과 '속박'에서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트리에의 많은 영화에서 남성은 허례에 가득 차고 여성을 억압하는 "전문가" 혹은 "지식인"으로 설정된다. <안티크라이스트>의 '그'는 '그녀'를 자신의 지식으로 속박하는 장벽으로 그려진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남성(특히 종교인)들은 기독교적 교리와 규범이라는 미명을 앞세운 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를 돌보지 않으며 저주를 일삼는 위선적인 행동을 드러내는 인물들로 등장한다. <멜랑콜리아>에서의 클레어의 남편 '존' 역시 자신의 천문학적 지식을 뽐내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으론 가장 먼저 현실에서 비겁하게 도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밖에도 그의 많은 영화에서 남성들은 자신의 욕망을 저열하게 배설하는 동물로 등장한다.


이에 비해 여성들은 세상의 부조리함 앞에서 굴종하지 않으며, 수난을 당하더라도 자신의 주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인물들로 그려진다. 이러한 설정 이후에 영화는 이들을 '죽음을 통한 역설적인 구원'의 대상으로 삼거나 혹은 이들의 수난을 통해 종교와 세상을 비판하는 기세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비록 다시금 좌절에 빠질지언정 <백치들>의 주인공 카렌은 진정한 '백치 행위'의 전유를 이뤄냈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선 마녀사냥과 여성 착취에 대한 굴레를 전복시키는 여성 해방의 혁명으로 나에겐 보인다. <도그빌>의 주인공 그레이스의 수난을 통해 트리에는 '인간들의 죄를 대속한 예수'라는 존재는 세상에서 존재할 수 없다며 세상에 조롱하는 듯하다. 죽음을 통해 역설적인 구원을 경험하는 주인공은 <안티크라이스트>, <멜랑콜리아>, <어둠 속의 댄서>, <브레이킹 더 웨이브> 같은 영화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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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나 <브레이킹 더 웨이브>와 <어둠 속의 댄서>의 주인공은 사실상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대신 속죄하는 성녀의 이미지로 강력하게 그려진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질 것을 제안하는 남편의 말을 이행한 주인공 베스가 창녀로 취급받아 저주를 받고 추방을 당하는 수난을 겪는 이야기는 동정녀 마리아의 예수 잉태 모티브를 비틀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어둠 속의 댄서>의 주인공 셀마는 아들의 눈 치료를 위해 세상의 부조리를 경험하면서도 이를 놓지 않으며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그녀가 재판을 받는 순간부터 죽음을 맞는 과정은 마치 예수의 죽음을 연상케도 한다. 또한 상술했듯 이러한 주인공의 수난 서사를 통해 전자에선 종교의 위선을, 후자에선 미국이라는 나라의 혐오스러운 부조리를 비판하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두는 듯하다.


이 지점에서 많은 논쟁거리가 되는데, 과연 감독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여성 해방, 현대 미국의 부조리, 종교의 위선 등)를 관철시키기 위해 이토록 자극적인 서사와 캐릭터 학대를 자행하는 '방법'을 과연 어디까지 허용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그의 영화가 개봉한 이후엔 항상 많은 설왕설래가 오고 갔다. 추악한 세상에 '희생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종교와 현세를 비판하는 영화라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성녀라는 그럴듯한 숭고함을 간편하게 앞세워 주인공을 '희생시키는' 목적만을 가진 고문 포르노라고 보아야 하는가?


나의 경우 트리에의 방식이 단순한 캐릭터 학대에 지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트리에가 그의 영화에서 인물들의 고통을 값싸게 동정하지 않으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믿음과 그들을 향한 구원을 긍정하는 방향의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라스 폰 트리에만큼 여성 서사를 다층적이고 숭고하게 그려내는 감독을 보지 못했다, 다만 그 방법론이 항상 지독하기에 매번 문제가 되지만.


다소 감상적이고 비약적인 표현을 쓰자면, 라스 폰 트리에라는 인물은 현실의 추악함으로 인해 '상처받은 영혼'을 지닌 인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트리에의 영화에서 주를 이루는 구도는, 현세의 자연을 추악한 지옥으로 그리면서도 한편으론 그 지옥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인물들의 이상과 노력, 구원과 좌절의 과정을 담아내는 것에 있다. 폭력이 가득하고 학대가 만연한 지옥도를 설정하면서도 순수한 이상을 추구하는 주인공의 노력을 진지한 태도로 응시하는 그의 영화를 보면서, 감독의 그 표현 과정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잔인무도한 자극성이 뒤따르기에 항상 마음이 무겁지만, 이 감독 역시 일말의 순수성은 가지고 있는 한 명의 인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곧잘 들곤 한다.




혹자는 트리에의 작품들이 유아적이고 자기과시적이라며 비난하곤 한다. 나의 생각을 앞서 이야기하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한다. 우선 트리에의 영화는 특별한 깊이를 지닌 영화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한다. 트리에는 그저 자신의 혼란스러운 정신적 상황을 영화라는 수단을 통해 뱉어낼 뿐이며 탐미적인 이미지도 자극적인 순간들도 모두 그의 본능의 결과물일 뿐이라는 생각이 우선 든다. 내 기준에선 트리에는 깊이 있고 철학적인 사색을 하게 만드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절대로 아니다. 그의 영화에서의 주제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의 그것보다 단순하며 직접적이고 꽤나 일방적이다. 때론 주제를 펼쳐내는 과정에선 유치하다고 느낄 만큼 도식적인 상징들도 가득하다. 주제를 말하기 위한 플롯 또한 때로는 작위적이고 특별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트리에의 영화들이 '유아적'이라는 평가엔 나 역시 한편으론 동의할 것 같다.


반대로 자기과시적이란 비판엔 쉬이 동의하지 못할 것이, 트리에는 스스로 수없이 밝혔듯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영화를 만드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상술했듯 자신의 증세와 주제를 영화를 통해 오롯이 쏟아낼 뿐이며 단지 본 것을 본 대로, 느낀 것을 느낀 대로, 다만 일말의 미화도 없이 그려낼 뿐이다. 그의 일부 영화에선 상징의 흔적들이 가득하지만 트리에의 상징은 이를 풀어가는 게임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닌, 영화의 레이어를 두텁게 만드는 보조 수단으로 머무른다는 것에 있어 긍정적이다.


이 감독의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순간은 서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 철학을 온전히 배격하고 이를 조롱하며 전복시킨다는 그 대담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 있다. 다른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며 도발적인 상징과 내러티브를 통해 어떤 감독도 시도하지 못했던 인간의 심연과 종교의 허위를 건드린다. 그렇기에 나는 트리에의 영화는 어떤 감독의 영화보다 솔직하고 진정성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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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서 짧게 서술했듯, 타르코프스키와 라스 폰 트리에는 제법 많은 부분이 유사하다. 두 감독 모두 현세를 고통스러운 공간으로 직시하며 현대 문명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또한 두 감독은 종교와 실존성의 주제를 즐겨 사용한다. 현세에서 종교가 하는 역할은 무엇인지, 해야 하는 역할은 무엇일지를 놓고, 두 감독은 방향은 다르지만 자신의 작품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묻고 강구했다.


실제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과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들은 유사하게든 거꾸로 뒤집혔든 여러 지점에서 겹쳐 보이게 된다. 트리에의 <멜랑콜리아>를 보면서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트리에의 <브레이킹 더 웨이브>와 <어둠 속의 댄서>에선 <거울>과 <노스탤지아>의 성녀의 이미지가 오버랩된다. <안티크라이스트>는 <잠입자>가 연상되는 동시에 서로 도치된 구조가 눈에 띄며, <살인마 잭의 집>은 끔찍하게도 타르코프스키의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비전이 뒤집힌 결과물처럼 나에겐 보인다. 트리에의 <님포매니악>은 영화 전체에서 타르코프스키에 대한 오마주로 가득하다.(사실 이 경우는 좀 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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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과 <멜랑콜리아>의 설정과 작법은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다.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공간은 두 영화 모두 도심에서 분리된 고즈넉한 저택이며, 두 영화 모두 예고 없는 위기가 주인공에게 찾아온 뒤 극중 시간은 주인공의 시선대로 더디게 흘러간다. 주인공은 놀랄 만큼 침착한 반면 주변 인물들은 위기에 절망을 느끼며 발버둥 친다.


두 영화의 외적인 작법은 비슷하나 방향은 전혀 다른데, <희생>의 주인공은 전 지구적인 위기를 신성한 믿음의 희생으로 극복하지만 <멜랑콜리아>의 주인공은 걱정과 긴장의 끈을 일순간 놓아버린 뒤 현실에서 발버둥 치는 많은 이들(<희생>의 주인공도 함께)을 조롱의 시선으로 응시한다. <희생>의 주인공은 세상을 짊어진 채 성녀와 동침을 하지만 <멜랑콜리아>의 주인공은 결핍을 달래기 위해 남자를 강간한다. 타르코프스키는 <희생>의 결말에서 아이와 나무에게 생명을 선사하며 세상에 희망과 구원을 밝혔다. 이를 비웃듯 트리에는 <멜랑콜리아>의 엔딩에서 나무와 아이를 비롯한 지구를 모조리 태워 일순간에 몰살시키는 이미지를 선사한다. 트리에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의 모티브를 그대로 가져와 전혀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타르코프스키의 <거울>과 <노스탤지아>에서 등장하는 여성은 성녀의 모티브를 가져온 인물로 그려진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와 <어둠 속의 댄서>에서의 두 여성 역시 타르코프스키의 작품들에서 등장하는 성녀의 이미지를 가져온 듯 보인다. 그러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여성은 순결하며 절개를 지키고 다가오는 욕망에도 궁극적으론 그 순수성을 회복하리라는 지극히 기독교적인 관점의 이상향이 투영되어 있기에, 일각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이러한 여성상 혹은 캐릭터 '직조술'이 다소 구태의연한 관념이라고 비판할 여지는 있어 보인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에서의 '성녀'들은 타르코프스키의 여성들과 사뭇 다르며, 보다 현실적이다. 그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여성들은 꽤나 세속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으며, 욕망을 겉으로 표현하는 데 있어 숨김이 없다. 그의 영화 속 여성들은 성녀이기 이전에 인간이다. 트리에의 성녀들은 언뜻 보기에만 좋은 감상적인 여성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나 트리에의 성녀들은 세속적인 면모를 보이는 동시에 지나칠 정도로 순수함을 드러내기도 하며,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믿음을 보인다. 그의 영화에서 성녀의 '아가페'는 신성한 가치를 대표하는 한편 이를 현세에서 발현되는 과정에서의 고난과 역경이 동시에 존재하는 관념으로 묘사되기에, 그의 영화에서의 여성들은 소모적이지 않으며 다면적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는 어린아이를 구원의 희망으로 비추며 영화를 끝마친다. 트리에는 <안티크라이스트>의 오프닝에서부터 어린아이를 창밖으로 내던진다. 전자에서 희망과 생명을 어린아이라는 심볼로 대표했다면, 후자에서의 어린아이의 추락은 생명의 탄생인 성관계와 병치되는 프롤로그를 통해 명백히 죽음과 절망의 이미지로 환기된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나무토막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통해, 윌럼 데포가 분한 '그'를 예수의 아버지인 목수 요셉과 연결 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잠입자>에서의 마지막 어린아이를 재림 예수로 바라보는 관점이 많은 지지를 받기에, 이를 뒤집은 <안티크라이스트>에서의 어린아이가 상징하는 바는 이와 개념은 같되 관념은 뒤집은 결과물일 것이다.


두 영화의 주인공은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구역'과 '에덴'이라는 공간으로 각각 향한다. 초자연적인 에너지와 비와 안개의 습습한 공기가 가득한 '에덴'의 이미지는 잠입자의 '구역'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아있으며, '그'가 창문 바깥의 유리컵에 물이 고이는 순간을 바라보는 이미지는 노골적인 <잠입자> 속 이미지의 오마주로 보인다.


한편으론 인류의 시작인 아담과 이브가 연상되기도 하는 <안티크라이스트>의 두 남녀는 세상의 시작인 동시에 죽음의 에너지가 흐르는 '에덴'이라는 공간으로 향하며 <잠입자>의 지식인들은 운석이 떨어진 세상의 끝인 동시에 구원을 소망하는 공간으로 향한다. 이렇듯 두 영화의 구조적인 대비는 흥미롭다. 두 공간이 인물에게 미치는 영향력 또한 주목할 만한데, <잠입자>에서의 '구역'은 인물이 진정 강구하는 것을 상기시키고 확인시키는 내적 성찰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이를 뒤집어 <안티크라이스트>에서의 '에덴'은 인물(영화에선 '그녀')의 폭발적인 본성을 발견하고 확인하며 발현시키게끔 하는 외적 발화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주인공은 세상의 참혹한 현실을 마주하며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를 체험한 뒤 가장 낮은 곳에서 신성한 예술을 탄생시킨다. <살인마 잭의 집>에서 주인공은 "예술"을 만들어내며 이를 세상에 고하며 정당화하고,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자신을 학대하며 다그친다. <안드레이 루블료프>이 세상에 필요한 고귀한 예술의 탄생을 그리는 영화라면, <살인마 잭의 집>은 사람들이 원치 않는 추악한 예술을 벌할 수 없는 세상을 그리는 영화인 듯 보이기도 한다.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세상의 가장 낮은 참혹한 현실들이 수렴되어 만들어진 예술을 다룬다면, <살인마 잭의 집>에서의 "예술"은 세상의 단면을 반사하고 발산하며 투영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며 예술은 파괴와 해체를 통해 창조된다 말하기에 그 대비가 선명하다.



라스 폰 트리에의 <님포매니악>에서 타르코프스키를 향한 오마주와 동시에 그와 종교에 대한 풍자는 절정에 다다른다. 님포매니악 볼륨1의 오프닝은 다음과 같은데, 열차의 소리와 빗물이 떨어지는 이미지가 등장하며, 집을 나서는 인물과 상점에 들르는 인물의 이미지가 병렬된다. 가라앉은 그레이 톤의 색감까지, 이건 명백한 <잠입자>의 오마주다. 볼륨1의 챕터 1에서 배경으로 등장하는 수초의 이미지는 <솔라리스>의 오프닝 시퀀스의 오마주이며, 제롬의 헛바퀴질은 <노스탤지어>에서의 도메니코의 동일한 행동을 연상케 한다. <솔라리스>는 바흐의 '주 예수여, 당신을 소리쳐 부르나이다.' 라는 제목의 음악을 메인 테마로 하여 감독 특유의 사색적이면서도 진중한 무드를 환기했는데, 님포매니악 볼륨1은 이 음악을 엔딩의 섹스신에 배치하며 기막힌 대비와 조롱을 만들어낸다.


볼륨 2는 오프닝에서부터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공중부양'의 모티브가 등장한다. 영화에서도 언급되지만 이는 또한 예수의 '변화산의 기적' 모티브를 냉소적으로 비꼰 방식으로 드러난다. 극의 청자인 셀리그먼의 집 벽에는 '루블료프 풍으로 복제한' 이콘이 걸려 있어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환기한다. 예수가 붙잡힌 이후 채찍으로 고문당한 이야기를 주인공의 SM 경험과 병렬하는 시퀀스는 도발적인 신성모독이며 담력 있는 교리 비틀기로 읽힌다. 직전 등장하는 거울의 사담과 함께 챕터 7의 제목은 대놓고 'The Mirror'이며 주인공이 산에 올라가 마주하는 나무의 형상은 <희생>을 상징하는 죽은 나무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볼륨 2의 엔딩 장면은 성선설을 믿는 것처럼 보이는 타르코프스키를 비꼬는 듯한 성'성'설의 주제로 귀결된다.


자, 이렇듯 라스 폰 트리에는 타르코프스키와 많은 지점에서 관계된다. 때로는 오마주의 형식으로, 때로는 유사한 구조를 가져와 이를 변주하는 방식으로 트리에는 타르코프스키를 자신의 영화에 지속해서 끌어들인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트리에는 강박적이다 싶이 하는 이러한 떡밥들을 첨가하는 것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타르코프스키는 영화계 역사상 가장 유명한 크리스찬이며 가장 독실한 신자로 기억되고 있다. 하나의 거대한 정전과도 같은 타르코프스키의 예술관은 현세의 구원을 믿지 않는 트리에에겐 자신의 철학을 강조할 흥미로운 대척점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트리에는 오마주와 조소의 형식으로 종교적으로나 영화적으로나 가장 신성시되는 불가침의 존재를 소환해 자신의 어두운 비전을 대비하는 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영화에선 끊임없이 타르코프스키가 등장하며 끊임없이 타르코프스키에 대한 냉소와 조롱이 이어진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그의 영화를 통해 현세에서의 구원을 소망하며 촛불을 밝힌다. 그는 세상을 죄악이 가득한 공간으로 분명하게 인식하지만,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채 기적을 믿으며 촛불을 밝힌다. 라스 폰 트리에는 타르코프스키에게 "과연 그 듣기 좋은 '구원'이 이 추악한 세상에서 가능하리라 생각해?"라며 되묻듯 현세에서의 구원을 부정한다. 그 역시 신을 믿으며 구원을 갈망하지만 현세에서 그 구원의 기적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내일 세상이 멸망해도 진심을 다해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예술가로 느껴진다. 라스 폰 트리에는 더러운 세상에 존재하는 남은 한 개의 사과마저 모조리 불태워버릴 예술가로 보인다. 악마 루시퍼는 천사가 타락해 만들어진 형상이다. 트리에는 타르코프스키를 흠모하는 동시에 그의 믿음을 혐오하며 스승의 작품을 조롱하듯 뒤집어 구원의 저편을 그려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30여 년 전 사망했으며, 라스 폰 트리에는 2018년에 개봉한 <살인마 잭의 집>을 끝으로 은퇴를 암시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두 감독의 새로운 작품이 우리를 찾아올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두 감독이 만들어낸 세계는 서로 닮은 동시에 전투적으로 반대되며, 두 감독 모두 자신의 비전을 타협 없고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두 감독이 남긴 영화들의 에너지가 대립하는 그 형형한 공력이 나는 여전히 흥미롭다.


타르코프스키와 라스 폰 트리에, 그들 모두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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