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포드라는 것, 존 포드다운 것

2022년 1월 20일의 글

by 육육삼의 삼삼칠

글에는 <역마차>, <수색자>, <말 없는 사나이>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영화감독들의 영화감독'.


존 포드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이 거대한 수식어를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였던 것 같다. 만신전에 오른 감독들의 발자취를 좇는 것만큼 의미 있고 강력한 감상법은 더 없겠지만, 한편으론 내가 이 위대한 족적을 남긴 감독들의 예술관과 미학을 온전히 음미하기엔 너무 이른 것은 아닐까, '내 수준에 맞지 않는' 영화들에 접근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막연한 두려움은 늘 가지고 있다. 두려움과 기대감을 동시에 안고 영화를 마주했을 때 그저 '이성적인 감탄'만이 내 감상을 지배한 적도 있었고, 감탄과 감동을 넘어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예술가와 작품을 만난 적도 있었다. 다행히도 존 포드는 나에겐 후자의 경우였다. 사실 나는 존 포드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한다. 존 포드는 생전 140여 편의 작품을 만들었고 나는 그중 절반의 작품도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비단 이 때문만은 아니다. 보수적인 가치를 드러내는 작품들을 만드는 동시에, 노동자와 혁명의 가치를 조명하는 '좌파 영화'들을 맛드는 감독이었다. 정치적으론 보수로 분류되는 사람이었지만,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었을 때 이를 반대하는 연설을 한 바가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그의 형인 프랜시스 포드의 언급대로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노인을 폭행한 뒤, 그가 죽는 날까지 금전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는 일화는 그의 '종잡을 수 없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여전히 그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것보단 모르는 것이 아직도 많은 듯 느껴진다.


나는 존 포드의 전문가가 아니다. 어떤 권위도 없으며 영화에 대한 감식안이 다른 시네필들에 비해 뛰어나다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제목을 거창하게 '존 포드라는 것, 존 포드다운 것'으로 지었지만 솔직히 제목에 걸맞은 깊은 내용을 담을 자신도 없다. 그럼에도 이야기해 보고 싶다. 한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완주한 모든 이들이 그의 전문가는 아닐 테지 않겠는가. 존 포드라는 감독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나눠 보고 싶다. 이 글을 통해 나 개인적으로 존 포드라는 감독에게 갖고 있었던 상념들을 정리해 보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두고 있지만,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존 포드라는 이 탁월한 감독에 대해 처음 알게 되고 더불어 그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이어진다면 그것만 한 보람은 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부극은 존 포드이지만, 존 포드는 서부극이 아니다. 놀랍도록 간단한 명제이지만 이견과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그가 만든 대부분의 영화를 스릴러로 조각했고, 그 이후 등장한 수많은 스릴러 영화에게 영원한 교본을 만들어 주었기에 "스릴러는 히치콕이자 히치콕은 스릴러다."라 칭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의 흥행작들을 통해 블록버스터의 공식과 왕도를 정립했기에 "할리우드는 스필버그이자 스필버그는 할리우드다."라 칭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서부극은 존 포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는 타협할 수 없다. <리오 브라보> 등을 연출한 하워드 혹스, <서부의 사나이> 등의 걸출한 서부극을 연출한 안소니 만과 같은 감독들이 당대에 있었고, '달러 3부작' 혹은 <옛날 옛적 서부에서>와 같은 작품들을 남긴 세르지오 레오네나 <장고>와 같은 작품으로 유명한 세르지오 코르부치, 폭력 미학의 거장이라 불리는 샘 페킨파가 존 포드 이후 세대의 '서부극 거장'이라 불리지만, 그 누구도 서부극이란 장르 아래서 존 포드를 대체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존 포드보다 다면적이고 심층적인 서부극을 걸출하게 만드는 감독을 만나지 못했고, 존 포드보다 넓고 아름다운 서부극을 잘 만드는 감독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서부극 아래 존 포드보다 앞에 설 수 있는, 혹은 같은 자리에 설 수 있는 감독은 단언컨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존 포드는 결코 서부극이란 장르 아래 가둘 수 있는 감독이 아니다. 서부극이란 장르 안에서 가장 빛나는 성취를 이뤄낸 감독은 분명 존 포드겠지만 존 포드를 서부극 전문 감독이라 칭하기엔 걸리는 점들이 있다. 140편이 넘는 작품 활동 중 서부극의 비중은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아카데미 감독상 역대 최다 수상자인 존 포드는 모두 4번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밀고자>,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분노의 포도>, <말 없는 사나이> 이 4편은 모두 비서부극이다. 존 포드의 예술적 야심이 정점에 달한 영화를 나는 <젊은 링컨>이라 생각하고, 존 포드의 가장 미학적인 영화를 나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와 <말 없는 사나이>로 꼽고 싶다. 존 포드의 '어떤 비서부극'에서 그는 표현주의자들의 방식을 연상시킬 만큼 독창적인 아이디어의 숏들을 연쇄시킨다. 존 포드의 '어떤 비서부극'에서 그는 두려움 없이 정치적 논란의 중심을 향해 걸어간다. 존 포드의 전경은 서부극만으론 설명할 수 없다. 존 포드는 서부극이 아니다.



시간을 견뎌 오랫동안 회자되는 영화의 조각은 '씬'과 '시퀀스'겠지만, 결국 영화의 기본은 '프레임'과 '숏'일 것이며 결국 그 프레임과 숏이 뛰어나야 훌륭한 씬과 시퀀스가 만들어지는 것이라 나는 믿는다. 존 포드의 숏에는 생명력이 넘친다. "매 번의 쇼트가 세상에 대한 그 어떤 총체적 사유를 던진다."라는 모 평론가의 감상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가 만드는 숏들이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탁월한 기술과 독창성을 보여주는 총체라는 것만큼은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아직까지 존 포드의 <역마차>가 보여준 것보다 더 탁월한 롱숏의 사용 사례를 본 적이 없다. 텍스트의 여백에 채색되는 모뉴먼트 밸리를 가득 담은 롱숏을 볼 때면, 최소한 영화라는 예술 아래선 이미지가 텍스트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젊은 링컨>의 작법과 화법은 사실상 모더니즘의 그것을 떠올릴 만큼 과감하고 독창적이었다. 나뭇가지를 세우고 우연인지 필연인지를 점치는 숏이나, 재판이 끝나고 묘지 앞에서의 비장함이 느껴지는 숏에선 존 포드가 단순히 서정적이고 감상적인 숏만을 생산하는 연출가가 아닌 기술적이고 예술적인 '작품'을 빚어내는 예술가의 기질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의 몇몇 프레임과 숏들은 정말 평생 기억에 남을 것만 같은 거대한 감동을 나에게 선사해 주셨다. 주인공 아이가 다시 온전히 걷게 되었을 때의 순간이나, 탄광촌의 전경을 수직적인 구도로 장대하게 담는 순간들을 어찌 쉽게 잊을 수 있을까. 또한 존 포드의 컬러 영화 걸작 중 한 편인 <말 없는 사나이> 속 이니스프리의 모습은 영화가 선사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생각한다. 수평과 심도의 구도를 효과적으로 사용해 '위대한 낙관주의자'는 프레임 속에 푸른 낙원을 만들어냈다.


상술한 모 평론가의 말을 <수색자>에선 어렴풋이 공감할 수 있었다. 영원히 기억될 역광을 사용한 이미지들이나, 테크니컬러가 아름답게 담아내는 모뉴먼트 밸리, 가장 심연의 감정을 은유하는 놀라운 구도의 숏들까지. 존 웨인 최고의 연기까지 더해져, 유명 평론가 로저 이버트의 말을 빌리자면 <수색자>는 그야말로 '장엄함을 품고 있는 이미지들'로 가득했다. 때론 기이할 만큼 치밀한 구도의 숏들을 배치하고, 때론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던 독창적인 숏들을 능청스럽게 집어넣는다. 스스로를 예술가가 아닌 기술자로 칭하고, 영화감독을 자신의 생계를 위한 직업일 뿐으로 여겼던 그이지만, 감히 내가 평하자면 존 포드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예술가이다.


image.jpg?type=w773


존 포드의 '어떤 영화들'에선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장장 2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의 서사는 단 몇 줄로도 요약될 만큼 초라하고, 서사적으론 쓸데없어 보이는 숏들과 씬들이 오히려 영화의 주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황야의 결투>와 <웨건 마스터>가 특히 그렇다. 존 포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그 부분에 있고, 실제로 존 포드는 <웨건 마스터>를 두곤 "내가 만들고 싶었던 서부극에 가장 가깝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기에 위 두 영화는 존 포드의 최고작처럼도 느껴진다.


<황야의 결투>를 떠올려보자. 복수라는 목표를 가진 주인공이지만, 러닝타임 대부분 영화는 그의 '복수의 행적'에 집중하지 않는다. 복수극의 골조는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만 짧게 다뤄지며 영화는 (서사적으로) 필요 없어 보이는 것들에 초점을 기울인다. (여담으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원제인 <My Darling Clementine>을 <황야의 결투>로 바꾼 선택은 미스처럼 느껴진다.) 간편한 서사 구조를 만들 수 있는 복수라는 소재를 두고서 어떤 순간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유달리 인상적으로 만들었다. 이 영화는 잉여를 위해 만들어졌고 오히려 내러티브를 스리슬쩍 붙여놓은 듯한 인상까지 준다.


<웨건 마스터>는 어떠한가. 출애굽기의 서사를 모티브로 삼은 것이 분명한 이 영화는 그럼에도 이들의 파란만장한 서사를 그려내려 하지 않는다. 에피소드와 소동에서 생겨날 '불안의 정서'를 만드는 덴 심드렁해 보이며, 위기의 순간조차 이유 모를 낙천적인 기운이 흐른다. <웨건 마스터>는 그 대신 대지를 가로지르는 역마차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숏의 운동성을 오롯이 체감하게끔 리드미컬한 편집을 통한 '숏의 배치'를 보여준다.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다. <웨건 마스터>에는 이야기 대신 에너지가 가득한 영화라고.


"나의 영화가 낳은 진정한 스타는 대지다."라는 유명한 말을 존 포드는 남겼다. <황야의 결투>는 대지 안의 '조그만 인간들'의 사랑스러운 이야기이며, <웨건 마스터>는 대지에 생명력이 감도는 '어떤 순간들'을 담아낸 이야기이다. 잉여들이 형형히 살아 숨 쉬는 것이야말로 존 포드의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차별화되는 특징일 것이다.


Monument-Valley-view-from-Hunts-Mesa_shutterstock_2400.jpg
mitten-shadow-allison-yamamoto-sparks-.jpg
Monument-Valley-1-1140x760.jpg
Monument_Valley.jpg


서부극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들어오는 단 하나의 공간적 이미지는 단연 '모뉴먼트 밸리'일 것이다. 위압적인 형태의 사암들이 벌판을 채우는 이 공간을 존 포드는 서부극의 요람으로 만들어냈다. "다른 이들의 영화에서 등장한다면 표절과도 같은 것."이라며 <시민 케인>의 감독인 오손 웰스가 칭했던 공간이 바로 모뉴먼트 밸리며, "<햄릿>을 만든다면 촬영지로 삼고 싶은 곳."이라며 타르코프스키가 경의를 포한 공간이 바로 모뉴먼트 밸리다.


"나의 영화가 낳은 진정한 스타는 대지다."라 존 포드가 말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존 포드의 영화에서 모뉴먼트 밸리가 등장하는 어떤 순간, 존 포드의 관심은 달리는 마차 안의 인간들이 아닌 전경을 독점하고 있는 거대한 모뉴먼트 밸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존 포드의 모뉴먼트 밸리는 특별하게 사용된다. 존 포드의 서부극 중 어떤 씬은 공간적인 논리가 결여되어 있는 듯 보인다.


https://youtu.be/m597TtqsFkQ?si=5W8ovmP6UydRdVe8


역마차 안에서의 일행들의 대화 장면 앞과 뒤에 걸려 있는, 21:35초부터의 숏과 22:52초부터의 숏 간의 연관관계를 생각해 보자. 방향성이 맞지 않는다. 사암과 멀어졌던 마차가 다시 사암과 가까이 가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처럼 광야를 헤매고 있는 것일까. 의도적인 혼란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 논리적 오류의 원인을 찾아내려는 것은 무익한 탐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존 포드는 숏과 숏 간의 논리성에 집착하지 않는다. 존 포드는 단지 이 숏에 가장 어울릴 만한 암석과 구도를 찾아, 가장 효과적인 정서를 만들어내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존 포드는 카메라의 위치를 설정할 때 '본능'으로 정한다고, 그런 것은 배워서 되는 게 아니라 이야기한 바가 있다. 그렇다면 그의 영화의 매 숏이 주는 신비한 서사성과 서정을 오롯이 향유하는 것이 그의 영화를 받아들이는 가장 좋은 자세가 아닐까.


존 포드의 영화에선 배경이 주연보다 중요해 보이는 경우가 많고 그 배경은 대부분 모뉴먼트 밸리였다. 배경이 주연보다 포커스를 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다른 말론 그럼에도 모뉴먼트 밸리는 여전히 배경으로 복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웨건 마스터>는 이러한 특징의 반례 같은 영화로 보인다. 존 포드의 다른 영화에선 인물들이 이 거대한 사암들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웨건 마스터>에선 인물의 입으로 명확히 모뉴먼트 밸리를 가리킨다. 또한 원경으로 걸려 있던 적이 대부분이었던 모뉴먼트 밸리가 이 영화에선 한 발짝 인물들과 가깝게 만난다. 인물들은 거대한 사암 위에 올라가 서 있기도 하며 사암을 가로질러 길을 건너기도 한다. 존 포드의 <웨건 마스터>에서 모뉴먼트 밸리는 풍경으로 종속되는 위상에서 벗어났다.


75ca0d0d570a47c3ddd7b81740223597.jpg?type=w773


존 포드에 대한 주된 비판 혹은 오해의 소재는 그가 지나치게 인종적이고 성차별적이며 강경 우파적인 스탠스를 자신의 작품에서 드러낸다는 것에 있다. 때문에 '정치적 올바름'이란 측면에 있어 존 포드와 그의 영화들은 여전히 첨예한 갈등의 소재가 된다. 거두절미하고 <역마차>부터 이야기해 보자. <역마차>는 분명 영화 역사에 있어 중요한 작품일 것이며 개인적으로도 존 포드의 걸작 중 한 편이라 생각하는 영화이다. 그러나 동시에 존 포드의 영화 중 가장 많은 논란에 시달리는 영화이기도 하다. 쟁점은 이렇다. <역마차>는 인종차별적인 영화인가? 영화의 주인공 '링고'는 역마차를 쫓는 인디언 무리를 호쾌하게 몰아낸다. 인디언들은 말에서 떨어져 땅을 구르고 링고는 유유히 위기에서 탈출한다. 인디언들은 분명 톰 일행과 대립하는 집단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역마차>에서 주인공은 '선'이고 인디언들은 '악'인가? 우선 <역마차>의 주인공 링고는 선으로 채색되지 않은 인물이다. 악명 높고, 제멋대로이며, 제도권 밖을 부유하는 아웃사이더다. 또한 존 포드는 링고를 끝내 신화의 영웅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링고는 사회적 명망을 보장받을 곳으로 돌아가는 대신 또 다른 황무지로 길을 떠난다. 나는 <역마차>의 링고를 선인으로 볼 수 없다.


<역마차>의 인디언들을 선과 대립하는 '악'의 집단으로 보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링고의 일행들을 완전한 '선'의 집단으로 보는 것이 어려울뿐더러, 존 포드는 인디언들의 캐릭터라이징을 그들의 악성을 부각하는 방식으로 그리지 않았다. 영화 속 등장하는 두 집단의 전투는 그저 주인공 일행이 그들의 여정 중 경험하는 하나의 '사건'처럼 느껴진다. 그들의 전투에선 사선으로 질주하는 말들의 역동적인 운동성이 중요할 뿐, 피비린내 나는 유혈의 서사는 애초 영화의 관심 밖인 것처럼도 보인다. 존 포드는 대지 안의 사건을 다룰 뿐 사건의 선악을 판정하려 하지 않는다. 또한 <역마차>의 메인 히로인인 댈러스는 매춘부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것으로 소개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그 어떤 인물보다 자유로우며 주체적이다. 그녀는 동승한 귀부인보다 한층 성숙한 위엄을 보여주는 한편 링고를 굳게 지지해 주는 인물이다. <역마차>의 댈러스라는 여성은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남성들보다 빛났다.


영화 밖의 이야기이지만 <역마차>에 등장한 수많은 인디언들은 실제 나바호 부족들이었으며 이들은 <역마차>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이전보다 크게 번성했다 전해진다. 그들은 존 포드를 키 큰 지도자로 불렀으며, 나바호 인디언들은 여전히 모뉴먼트 밸리에서 존 포드의 향수를 찾는 이들을 대상으로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역마차>와 <수색자>에 출연했던 나바호 인디언 스탠리 형제(존, 잭, 조니)의 후손 '돌리 스탠리 로버트슨'은 인종주의의 파도에 자신의 선조들이 이용된 것이라 여기지 않았다. "인디언들이 등장하는 장면 이전까지는 모두들 조용했죠. 그러더니 다들 웃음을 터뜨렸고, 화면에서 본 인물들의 이름을 외쳐대기 시작했죠. 마치 가장 웃기는 코미디 영화를 본 것처럼 분위기가 바뀌어 버렸죠."


한편 흔히 기병대 3부작이라 묶이는 <아파치 요새>, <황색 리본>, <리오 그란데>에선 미 기병에 대한 찬미 등 존 포드의 보수적인 성향이 잘 드러나지만, 인디언들에 대한 태도가 많은 이들의 편견처럼 구태의연하지는 않았다. <아파치 요새>의 인디언들은 분명 주인공들의 적으로 그려지긴 했지만 <아파치 요새>의 진짜 '악'역은 인디언들이 아닌 헨리 폰다가 분한 오웬 더스데이 중령이었을 것이다. <황색 리본>에서 일부 인디언들은 주인공 집단과 함께 생활하며 부분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리오 그란데>에서의 인디언들은 주인공 집단에 분명한 동맹군으로 나타난다. 의도한 부분인진 모르겠지만 3부작으로 흔히 묶이는 이 작품들에서 인디언들의 위치가 두드러지게 변화한다는 것은 짚어볼 만하다.



존 포드의 영화에서 여성은 남성주의 속의 부속품이 아니다. <말 없는 사나이>의 여주인공 메리는 영화 역사상 손꼽힐 만큼 강인하고 개성적인 여성 캐릭터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녀의 모습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와도 전혀 뒤지지 않을 만큼의 인상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줬다. 성차별적인 시선이 분명했던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자신의 위엄을 보여주었다. 메리의 태도는 다시는 싸움을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숀을 변화시켜 그로 하여금 메리의 명예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그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라며, 서부극의 또 다른 거대한 이름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존 포드에 대한 평을 남겼다. 여담으로, <말 없는 사나이>에는 지금까지도 유명한 논란의 장면이 있다. 메리의 엉덩이를 걷어찬 후 질질 끌고 가는 숀의 모습.


화면 캡처 2026-04-10 153611.png


이 장면의 함의를 온전히 꿰뚫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이 장면이 등장하는 순간에서는 이 장면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감독의 어떤 강단과 확신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선, 심지어 혐오적 표현으로도 읽힐 수 있는 방식이지만 존 포드는 그런 것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진정 끝까지 밀어붙인 사나이일 테다.


존 포드의 많은 영화들에선 그의 보수주의 이념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의 모든 영화가 우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영화라곤 할 수 없다. 각각 1940년과 1941년에 개봉한, <분노의 포도>와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같은 영화들이 그 예시가 될 것만 같다. "나는 존 포드요, 서부극 만드는 사람이올시다."로 시작하는, 매카시즘에 반대하는 그 유명한 연설을 한 1950년에서 정확히 10년 전 개봉한 <분노의 포도>는 분명 '좌파 영화'처럼 느껴진다. 경제 대공황기 미국 노동자들이 당면했던 억울하고 비통한 상황을 내내 들끓는 어조로 그려낸 이 <분노의 포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존 포드의 스탠스와는 거의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한 영화로 저돌적인 에너지가 영화를 지배하며 일면 혁명적인 기운마저 도는 놀라운 영화다. 가족의 온정을 다룬 휴머니즘 영화이자 감독 자신의 정치 성향과 반대되는 원작의 이야기임에도 경탄할 만한 창의성으로 사회주의 예술의 한 봉우리를 세운 존 포드는 이 영화의 제작이 원인이 돼 이후 매카시즘 시기에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41년 개봉한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는 탄광촌에 거주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감상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파업을 지속한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비난보다는 동조와 연민이 느껴지며 노동의 가치를 바라보는 존 포드의 온기 어린 시선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이외에도 <도노반의 산호초>나 <말 없는 사나이> 같은 작품에선 과하게 이야기해 존 포드의 아나키스트적인 활력이 보이기도 한다. 거장의 작품이라곤 믿기 힘든 '유치함"과 순수함이 이 영화들에는 담겨 있다. 때론 존 포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자유를 영원히 꿈꾸는 몽상가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역마차>와 쌍을 이루는 존 포드의 서부극 걸작은 <수색자>가 꼽힌다. 존 포드의 전문가인 '태그 갤러거'는 존 포드의 <수색자>가 오히려 <역마차>보다 인종차별적인 영화일 수 있다는 의견을 펼쳤지만, 또 한편으론 전통적인 서부극의 인종주의적 특징에서 벗어난 '수정주의 서부극'의 시작을 바로 이 <수색자>부터로 여기는 의견들이 적지 않다. <수색자>는 어떤 영화인 것일까. 주인공 이든과 대립하는 '스카'는 분명 악인이다. 데비를 납치한 주범이고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러나 그렇기에 인종주의적이고 증오와 복수심에 눈이 멀었으며 기어이 스카의 머릿가죽을 벗기기까지 하는 이든은 선인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일까. 이든은 고결한 인물이 아니다. 제수인 마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수많은 해석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실제로 포드는 이든과 마사가 부적절한 관계였을지도 모른다는 귀띔을 촬영 중 존 웨인에게 했었다고 전해진다. 이든은 불살의 신념을 가진 성역의 히어로도 아니며, 절대 선인으로 남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든은 끝내 안식처로 돌아가지 못하는 인물이다. <역마차>의 주인공 링고와 이든은 유독 닮아 보인다.


<수색자>는 여전히 다양한 입장들이 오가는 영화다. 인종주의적이라는 입장도 이해가 가고, 수정주의의 시작이라는 입장 또한 이해가 간다. 나는 이것 하나만큼은 단언할 수 있을 것 같다. <수색자>는 정치적인 선동 영화가 아니다. <수색자>의 의의는 선동과 정치 그 너머에 있다.


monument%EF%BC%8Dvalley%EF%BC%8D1024x683.jpg.jpg?type=w773


우연히 그러나 운명처럼 만나는 영화들이 있는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그러한 영화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나에게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 리스트에 존 포드의 영화들을 추가해야 될 것만 같다.


가장 미국적인 장르인 서부극을 가장 뛰어나게 만든 감독이 존 포드이기에 혹자는 존 포드를 가장 미국적인 감독이라 칭할지 모르겠다. 때문에 그의 영화는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와 문화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온전히 도달할 수 없다며 누군가가 평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존 포드의 영화를 볼 때면 나에게는 그 '문화의 벽'이 큰 걸림돌이라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존 포드의 영화에는 문화를 초월하는 심연과 감각이 있었고 보편적인 인간이 경험하는 정념과 서정이 있었다.


여전히 존 포드의 유산들은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우리가 영화에서 지평선이 서사적인 구도로 등장하는 것을 볼 때, 또한 우리가 사선으로 무진하게 질주하는 무언가를 볼 때 이는 아마도 존 포드에서부터 시작된 이미지일 것이다. 나는 이제 존 포드를 배우는 것이 영화 그 자체를 배우는 것과 동의어처럼 생각된다. 존 포드는 하나의 순간이 아니라 영원한 시간을 만든 감독이다. 존 포드는 서부극의 아버지가 아니다. 존 포드는 영화의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