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

by 안흥준

한국 교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교인들의 삶에서 복 받는 축복에 대해 언급해 왔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기 위해 해야 할 일들과 간증을 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복 받는 삶을 추구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나,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일인가 하는 것에는 의문 부호가 붙는다. 내가 좋아하는 성경의 한 부분은 개역 한글 성경의 창세기 12장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복의 근원이라 칭하시면서 그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부르시는(창 17:5) 장면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단순히 복 받는 삶을 넘어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삶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아서 이다.


물은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강과 하천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여 물고기, 곤충, 식물 등 다양한 생물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통해 생명이 숨쉬게 하고, 그 흔적이 지나간 자리에서 자연이 재생하도록 치유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해서 물의 흐름은 생명의 호흡과도 같다. 물이 멈추거나 정체 되면 고인물이 되는데, 고인물의 표면은 잔잔하여 평온한 듯 하지만 그 평온함 아래에서는 산소가 고갈 되고, 유기물이 쌓여 생태계는 크게 훼손된다. 물이 계속 흘러 간다는 의미는 오염물질을 희석·배출시키는 자정 작용을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물의 흐름이 멈추거나 막힌다면 수질은 급격히 악화 되어 생태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흐름이 멈춘 물은 원래의 성질을 잃게 되고, 시간이 지날 수록 유용한 물의 기능이 멈춤은 물론 오히려 모든 생물들에게 독이 되어 돌아 오게 된다. 고인물에서 말라리아와 뎅기열 등의 원인이 되는 모기들의 유충이 자란다. 또한 흐르는 물에 비해 훨씬 더 많고, 다양한 박테리아와 기생충 등이 배양 되어 생물과 환경에 위협을 가하게 된다.


하나님을 통해 오는 축복들이 교회안과 교인들에게만 머무는데 관심을 갖는 것은 교회 스스로가 고인물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그 고인물들은 하나의 높은 성을 쌓고, 지역사회로 나가야 할 나눔과 사랑의 통로를 막고, 교회의 개혁과 더 나은 발전을 가로 막는다. 어찌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정과 익숙함에서 안주하며 변화를 싫어한다. 새로운 시도가 자칫 불필요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고, 변화를 위한 대가(代價)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는 무의식 중에 고인물들이 되어 가게 된다. 어느 한 부분의 정점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지키고, 그 성취를 이룬 자신의 방식만 옳다고 생각하는 반면, 새로운 방식이나 생각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일지 모르지만, 곧 그것은 공동체 전체의 생명력을 잃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고인물의 다른 해석을 우리는 흔히 기득권이라 부른다. 이 기득권을 타파하지 못하면 사회든 교회든 썩게 되는 것 같다. 흐르는 물은 스스로를 비워냄으로써 깨끗함과 생명력을 유지한다. 흘러간다는 것은 잃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워지는 과정이다. 살아 있는 생명은 모두 흐른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더 깊고 넓게 만들어 간다. 교회와 구성원들이 모든 관심은 내부에서만 공유하고, 정작 필요한 교회 밖의 이웃들에게 무관심하게 될 때 교회와 그 구성원들은 정작 품어야 할 사회에서 고립 되는 섬이 될 지도 모르겠다.


통로는 흐름을 위한 길이자 새로운 곳으로의 연결을 의미한다. 축복의 통로는 우리 안에 머무는 축복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타인에게 전달 되는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회가 자신들의 복을 찾아 내면의 평안만을 쌓게 된다면, 교회는 사회와 단절된 구조 속에 머물게 되고, 교회의 미래는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굳게 닫힌 교회의 모습이 되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교회와 교인이 축복의 통로가 되는 복의 근원이 되는 지향점을 찾아 우리의 생각을 좀 더 성숙시킬 필요가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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