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장을 묵상하던중 "둘로 하나를 만드사(엡 2:14)"라는 구절이 평소라면 무심코 지나쳤을 것 같은데 이 날은 유난히 마음에 깊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공대생 출신다운 작은 호기심이 먼저 일어났다. '어떻게 둘이 하나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짧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면서 교회와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분열과 갈라짐의 모습들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한걸음 물러나 바라보면,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작은 차이로 인한 것인데, 서로간 벽을 쌓아가는 우리네 삶의 모습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래서인지 나뉨과 다름을 넘어 하나 되게 하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는 호불호를 떠나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편가르는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학연, 지연, 혈연 같은 사적 인연을 바탕으로 집단을 나누고 이익을 공유하는 것이 낯설지 않다. 가까운 역사의 현장에서는 조선시대 붕당(朋黨) 간 당쟁이 대표적인 사례로, 노론과 소론,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다름의 의견을 모으기보다 권력다툼으로 흐르며 조선 후기 사회 전반에 걸쳐 큰 폐단이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동서로 나뉘어 정치적/정서적 대립이 지속되고 있고, 정치나 이념의 갈등 속에서 진실보다 이념이 앞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편가르기는 차이를 구분하고 정체성을 세워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 있지만, 그 과정이 어느 지점에서 멈추어 다름과 틀림이 혼동될 때 사회적 갈등이 될 수 있다. 다름이 존중되어야할 때 틀렸다고 단정하고, 틀림이 다름으로 합리화 되는 모습들은 화합을 방해하고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라는 말씀은 우리 사회와 교회에 필요한 화해와 화합의 메시지이다. 종교적/문화적 차이로 인해 결코 화합할 수 없었던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가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사람의 힘으로 절대 좁힐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들의 깊은 골과 적대감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이 두 집단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막힌 담을 허무심으로, 마침내 하나가 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를 만드셨다'는 의미가 단순히 두 집단을 기계적으로 합쳐 놓았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품어내며, 그 다름 위에 더 큰 하나됨을 이루셨다는 의미일 것이다. 혈통이나 과거의 종교적 배경과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동등하고 새로운 하나의 영적 가족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더 나아가, 이 하나됨은 외형적인 연합이 아니라 마음과 존재의 깊은 변화에서 비롯된 참된 연합임을 깨닫게 한다.
현재 출석중인 교회의 본당에는 골고다 언덕의 세 십자가를 형상화한 십자가상이 세워져 있다. 그 형상은 상하로는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좌우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상징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십자가 상에는 없지만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 화해와 일치의 완성이 담겨져 있다. 교회안의 크고 작은 나뉨이나 사회의 양극화된 대립이 치유되고 하나 됨에 이르는 길은 단순한 바람이나 선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완성되었듯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내려놓음과 희생이 필요하다. 크고 거창하지 않더라도 각자가 내려놓을 수 있는 것들을 기꺼이 내려놓고 십자가 앞에 올려드릴 때 비로소 교회가 치유되고, 사회는 화합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