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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ddhi kim Mar 17. 2021

정인이가 빼앗긴것 세 가지

우리는 이래서 가슴이 미어진다

16개월 된 영아를 잔인하게 떠나보낸 양부모에 대한 분노는 우리 모두를 격앙 시키고 있다.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언론과 정치권은 진단과 해결책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입양에 문제점은 없었나 입양기관의 사후 조치는 어땠나 아동학대에 대한 처벌은 어땠나 등등의 진단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항상 그러 듯이 이번에도 이미 국회에서 법안 발의가 있었는데 통과 못 시켰다. 처벌이 너무 미약했다 등등의 자책성 기사가 나오고 그러다가 또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유야무야되고 만다. 그리고 또 우리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익숙한 일상의 삶으로 되돌아가리라. 왜 그럴까? 왜 항상 비슷한 사건들이 되돌이 표로 자리매김되고 그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뇌리에서 사라져 버릴까?

 

동거남의 9세 아이를 가방에 넣어 숨지게 한 극악무도한 사건 보도를 접하면서 어쩌면 인간의 탈을 쓰고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안타까움은 이 뿐만 아니다. 음주운전으로 인해 누군가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다는 뉴스는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진다. 이런 소식들을 접할 때 마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는 것은 필자 만이 아닐 것이다.       

 

생명의 소중함 아니 인간이 고귀한 존재라는 생각 자체가 우리 뇌리 속에 자리잡고 있지 못해서 아닐까. 인간의 존엄성과 그 가치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고 느껴 보지 못해서다. 왜 존엄한가 왜 가치를 지녔는가. 바로 ‘생명’ 이기 때문이다. 이 생명은 한번 끝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불가역적인 단 한번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그로 인해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해도 관용과 용서라는 행위를 통해 언젠가는 화해할 수 있고 회복될 수 있기에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항상 열려 있다. 그러나 한번 가버린 생명은 어떻게 해도 되 돌릴 수 없으니 씻을 수 가 없다. 아마 조금이라도 양심이 남아 있다면 그런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은 감옥에서 후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되돌리고 싶을 것이지만 그게 불가능하다. 

 

우리의 생명이 왜 존엄하고 왜 가치가 있는가의 두번째 의미는 그 생명이 지녔을 무한한 ‘가능성’에 있다. 인간의 능력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아인슈타인을 떠올린다. 그는 뇌를 10퍼센트만 썼다는 것이다. 필자는 문득 그의 뇌가 나머지 90퍼센트까지 다 사용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를 상상하곤 한다. .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이 지구상에 살아있는 생명체 가운데 이토록 엄청난 문명과 문화를 창출한 것이 바로 인간이기에 그러리라. 이런 거창한 사회학적 논의는 접어 두더라도 인류사에서 참으로 훌륭한 인물들은 너무나 많았으며 그 분야도 정말 다양하다. 과학 철학 정치 종교 예술 문학 등등 수많은 분야에서 나온 몇몇 인물들의 업적 덕분에 온 인류의 삶이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고 발전을 이루고 나아가 우리 삶의 좌표 설정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었던 헤아릴 수 없는 예들은 인류 역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편리함도 모두 이런 인물들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도 코로나19같은 전염병을 해결할 수 있는 해법도 제시하지 않았을까 아니 아예 일어나지 않는 방법까지 설명하지 않았을까 하는 막무가내식 상상을 해본다. 그러면서 인간이 가진 능력의 무한함은 어디까지 일까를 종종 가늠해 본다. 

 

인간의 가치는 바로 그가 어떤 인물로 성장해서 인류를 위해 어떤 깃발을 꽂아 줄지를 아무도 예상 할 수 없는 그 무한한 ‘가능성’에 있다. 그 ‘가능성’을 양모는 그만 앗아가 버린 것이다. 어쩌면 이런 사건들은 우리 모두가 받을 이익을 앗아간 것이기도 하다면 억측일까. 필자는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그저 땅을 치며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세번째는 그 생명이 지녔을 ‘소명의식’이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날 때 그 자신만의 이유와 타당성이 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소명의식이라 거나 불교식으로 업력이라 부를 수도 있다. 말하자면 태어나면서부터 각자 나름의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남에게 베풀어야 하는 사명일수도 있고 아니면 죄의 대가로 고통의 시간들을 가져야 하기도 하고 아니면 남에게 많은 이익을 주는 삶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얽힌 매듭을 풀어야 한다거나 더 큰 성장으로 일을 이루어 나가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인간은 살아야 할 각자 나름의 이유와 방식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이 삶의 과정들을 통해서 그 영혼은 더 성장할 수도 있고 아니면 타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나 그 모두는 각자의 몫이고 책임이다. 그리고 그 책임과 몫은 반듯이 해내야 할 개인의 몫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새하얀 큰 백지 한 장이 생명 앞에 펼쳐졌으니 거기에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는 각자 삶의 여정을 어떻게 그려내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반듯이 완수해야 할 그리고 치뤄 내야 할 각자의 삶의 과정인 것이다. 정인이는 그걸 그만 빼앗긴 것이다. 그들은 한 인간의 소중한 꿈과 의무를 그리고 권리를 짓밣은 것이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그 소중한 ‘소명’을 빼앗아갈 자격은 없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저들은 정인이로부터 생명만 앗아간 것이 아니라 그 생명에 고유하게 부여된 소중한 가치와 목적성까지 무참히 앗아가 버렸다는 것에 그만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그래서 한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는 천벌을 받아 마땅한 죄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 모두 분노하며 달려가 혼내 주고 싶은 마음이 바로 ‘하늘의 마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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