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생은 그냥 이렇게 살련다.

by 수호천사

요즘 왕삭의 글들을 번역하고 쓰다 보니 알게 모르게 나랑 닮은 점이 많아 보인다.

감히 책 한 권 내본 적도 없는 작가도 아닌 사람이 자신을 대작가에 비교하여 자신의 지명도를 올리려는 것은 아니다.

굳이 글로서 작가가 되어 출판하고 싶다는 욕망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수년간 풍상고초를 다 겪고 나니 돌이켜보니 평범한 내가 평범한 인생을 살았고 그것이 좋았던 내가 한두 번의 잘못된 선택을 하고 온갖 시련을 다 경험했었던 것을 느끼게 된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2011년부터 정신없이 부딪히며 싸워오고 심연 같은 시련에 빠져나오기 위해 허둥거리며 미처 뒤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던 세월들

이제 잠시 멈춰 서서 돌아보니 평범한 인생은 아니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내 친가도 외가도 94세에 살아 계시는 외할머니도 보통 사람 보통 성격은 아니고

외삼촌 이모들 모두 나르시시스트적 기질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친가를 보니 큰 대의에서는 어긋남이 없으나

나의 아버지 형제 6명 고모 한 명 막내 삼촌 외 아버지 형제들 사촌형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쉽고 고분고분 져줄 인물 들은 아니었다. 그런 가정배경을 두고 태어난 내가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다면

운명이 주는 매를 그대로 맞고 좌절하며 굽신거리며 살았을 리가 없다.

스스로에게도 외가의 피를 받아 어느 정도 나르시시스트 적인 면도 있고 일본군과 싸우다 희생된 아버지의 외삼촌 아버지의 외할아버지 등등 외갓집 피를 좀이 라도 물려받았다면,

전주 전 씨의 담력과 복수심 반항심도 어느 정도 있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트라우마 생존가 같은 심정이다 깊은 심연에서 잘 빠져나왔고.

몸이든 맘이든 아픈 곳 없이 멀쩡히 생존해 있는 것이 스스로도 기적같이 느껴진다.

하루아침에 치유되고 강해지고 조금이라도 현명해졌다면 쉽게 현명해진 것은 아니다.

수많은 시간을 잠식당하고 수많은 책을 읽고 심리학 공부 철학 불경 성경을 읽고서 겨우 헤쳐 나온 트라우마 생존자라고 스스로를 생각한다.

그 과정을 언젠가 글로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왕삭 작가가 쓴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나서는 그런 결심이 더욱 확고해졌다. 그

편지 하나가 내 나머지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줄 것 같다.

드라마 영화가 아닌 글을 읽으면서 번역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려 본 적은 첨인 것 같다.

스스로를 진단하자면 이렇게 공감능력이 남아있는 나는 나르시시즘 경향은 조금 있어도 나르시시스트는 아닌 것 같다.

개인이든 한 나라든 주변에 나르시시스트들이 사이코 패스들에 둘러 쌓여있고 그런 나르들이 부끄러움을 모르고 주류가 되고 중요한 권한을 갖고 있는 부서들을 잠식하고 있다면 그 개인과 공동체의 미래는 볼보듯 뻔하다. 그런 인간들은 사기를 쳐도 반란을 일으켜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반성도 모르고 사기 행각이 성공하지 못한 것만 회한스러워할 것이다.

그런 인간들을 알아보는 안목을 키우고 그런 능력을 글로서 공유하여 그런 사이코 패스 나르시시스트들이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면 양심을 지키며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기 좋은 사회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거라 믿는 고난과 시련을 겪고 있는 에코이스트들이 희망을 갖고 좌절하지 않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 시련을 끝내는 이겨 낼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누구나 자신의 가치관에 의해서 세상과 타인을 보기 마련이다. 내 가족 외가편의 치부라면 치부를 드러내 보이는데 부끄러움 혹은 망설임이 없다. 그로 인해서 수십 년간 괴로움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새발의 피도 되지 않는다.. 말로 차근차근 얘기해도 전혀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이 가까운 주변에 있었다는 것이.

예전의 나라면 망설이거나 눈치를 보거나 하여 많은 생각들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겠지만

최근 십수 년간 나 개인에게 생긴 시련 내 부모님께 생긴 시련들을 대부분은 주변 가가운 친인척 인간관계로 인해서였다.


스트레스의 극한까지 다녀오고 그런 스트레스로 인해 교통사고로 인해 큰 사고로까지 이어질 뻔 한 일을 경함 한 나는 이젠 걸릴 것이 없다.

다시 태어났다.


그것을 기록해 두는 일도 가능하면 소설 혹은 에세이로 세상에 기록을 남기는 일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끝마무리에 왕삭과 나의 닮은 점을 몇 가지 적어두자면, 협객정신, 자잘한 금액 일들에 신경 쓰지 않으며 가끔은 즉흥적이다. 한 번은 왕삭이 나의 천수한 이란 책을 집필 중인데 뭔가 막혀서 쓸 수가 없었다. 집문 앞에서 자전거 수리를 하는 수리공을 봤다. 왠지 드나들 때마다 눈에 거슬렸고 더욱더 그의 창작영감에 영향을 줬다. 다가가 서 물어보니 한 달에 얼마 버냐 물어보니 1500위안 정도 번다고 했다. 그는 뜬금없이 3만 위안 줄 테니 우리 집 문 앞에서 수리하지 말고 먼 곳에 가서 수리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수리공은 반신 반의 하면서 그럴게 하고 는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다른 곳에 옮겨가서 몇 달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 호주머니에 있던 3만여 위 앤 다 털어 주었다고 한다.

그 수리공이 불쌍해서 적선한 것도 아니고 그냥 그게 맘에 걸리고 맘에 걸리는 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그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렸을 적 케익가게 하던 엄마 대신 가끔 가게를 볼 때가 있었다. 초콜릿도 팔고 케이크도 팔고 가격표대로 팔면 되는 일이었다. 한 번은 옆 아파트에 사는 첨 보는 10살쯤 되어 보이는 애가 상차림용 백지 몇 장 팔 수 있냐고 물었다. 짐작하건대 200원 300원 좌우받으면 될 것 같긴 한데 정해진 가격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을 받기도 그래서 그냥 줬다. 엄마가 돌아 온후 가격 몰라서 몇 장 그냥 줬다고 하여 꾸지람 들은 적 없다.

엄마가 넌 장사하면 안 되겠다며 몇 해 동안 외우곤 했다.

가업을 잇지는 않았지만 나름 20년간 조직생활을 잘해 왔다고 자부한다.

상해 북한 식당에 들러서도 종업원들한테 항상 2만~3만 원씩 팁을 주는 편이고,

몇 해 전 한번 사기 성질에 가까운 사업에 잘못 참여했을 적에도 사기인지 아닌지 봐달라고 먼 곳에서 사업하는 친구들 불러서 봐달라고 한 적 있다. 수십만 원이면 되지만 비행기 티켓 200만 원 넉넉히 주었고 사기인지 경영에 이상없는지 잘 봐달라고 내가 받은 종이 지분 중 10분의 1도 흔쾌히 준 적도 있다. 돈으로 가치로 따지면 이천만 원 넘는 돈이었다. 몇 달 안 지나서 사기행각임을 알게 되고 멈췄기에 어느 정도 투자금을 회복하고 큰 손실을 입었음에도 그때 그 선택들에 대해서는 자문으로 내가 받은 지분의 10분의 1을 주기로 한 것은 잘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투입대비 그만큼 한 효과적인 자문을 받지는 못했지만 난 내가 스스로 맞다는 일을 하고 뭔가 도움을 받으면 내가 적정하다고 생각하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적성이 풀리니까.

나중에 돈을 빌려준 것으로 인해 다른 분쟁이 생기기도 했었지만 나는 항상 정정당당하고 도움을 받으면 그 도움의 몇 배 이상은 갚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행동했었기에 관계가 끊겨도 맘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결국엔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이제는 당분간은 동업하여 뭔가 할 계획은 없다만 혹여라도 친한 친구와 그럴 필요가 있다면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함께 일을 하고 만약 투자금을 잃게 될 경우라도 전혀 개의치 않을 자신이 있다. 자잘한 것은 계산치 않을 것 같다.

타고난 성격이라 고쳐지지 않는다.


이번생은 그냥 이렇게 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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