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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연 Mar 10. 2023

터널

아주 잠깐의 휴식

  차 와이퍼가 많이 낡았는지 어느 순간부터 앞 유리가 깨끗하게 닦이지 않았다. 눈이 얕게 쌓였던 흔적과 그 눈이 녹으면서 만들어낸 얼룩들이 시야를 가려 주행하는 데에 불편함이 꽤 있었다. 그래서 그걸 닦아보고자 워셔액을 뿌리면서 와이퍼를 작동시켰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 앞 유리를 더욱 지저분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불편함 정도가 아니라 진짜로 앞이 잘 안보였다. 그 상태로 친한 동생을 만나러 서울로 향했다. (불행의 서막)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주야장천 수다만 떨어대도 시간이 모자랐다. 할 말이 어찌나 많은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대화를 지속할 체력이 필요해서 동생이 직접 내려준 커피 두 잔을 마셨더랬다. 평소 나는 카페인을 다량 섭취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영원히 잠에 들지 못하는 카쓰(카페인 쓰레기)였기 때문에 커피를 전혀 마시지 않는다. 근데 그날따라 나는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고 심지어 부작용이 졸음이라는 항히스타민 알약을 아무 생각 없이 복용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쭉 만성 알레르기와 피부염으로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항히스타민 복용은 루틴이다. 커피와 항히스타민제.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다만 내 체질에는 이 두 가지를 같이 복용하면 크나큰 부작용이 따른다는 사실을 잠깐 망각했던 것이 과실이었다. 커피는 각성제고 항히스타민제는 졸음을 유발하는 약이다. 새벽 3시가 넘어 동생이 마련해 준 게스트 방에서 잠을 청하려는데 드디어 이상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면서 시야가 어지럽고 토할 것 같은 증상이 시작된 것이다. 차라리 잠이라도 들면 낫겠다 싶은데 미친 듯이 쏟아지는 졸음에 대항하듯 카페인은 내 뇌를 자꾸 각성시켰다. 두 시간 반동안 뒤척이던 나는 결국 집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대로라면 해가 밝아서도 잠들지 못할 것이 자명한데 그때가 되면 장거리 운전을 해서 집으로 가는 길이 더 부담이 될 거란 판단을 해서였다. 안방에서 자고 있는 동생에게 인사도 못한 채로 집을 나왔다.


 새벽 다섯 시 반, 서울의 아침. 한산할 거란 예상과 달리 도로에는 벌써부터 꽤 많은 차들이 있었고 심지어는 버스도 여러 대 다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비가 쏟아졌다. 초행길, 공사 중인 도로, 흐릿한 차선, 정신이 몽롱한 컨디션, 쏟아지는 비, 그리고 낡은 와이퍼. 운전하기에 이만한 악조건이 어딨 을까. 집으로 돌아가려면 110km를 1시간 40분에 걸쳐 달려야 한다. 나는 정신을 똑바로 고쳐 잡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큰일이 나겠다 싶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아 밤 같은 새벽의 도로는 그렇지 않아도 흐릿한 차선을 더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옆 차와의 간격이 아예 가늠이 되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앞 유리를 때려대는 굵은 빗줄기들을 끼익 끼익 소리를 내며 열심히 닦아내 보려는 와이퍼가 안쓰러웠다. 서울을 벗어나 고속화도로에 올라섰을 때야 주행 중인 차량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조금은 마음이 놓였지만 여전히 차선은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고 빗줄기는 더 굵어졌다. 한 코스,  한 코스가 두려웠고 좋지 못한 컨디션에 점점 몸과 정신이 지쳐갔다. 평소 드라이브를 즐기고 운전에 대해 거의 스트레스가 없는 나로서는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었다. 운전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덜덜 떨면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입술을 꽉 깨물던 순간, 저 멀리 터널이 보였다. 터널이 이렇게 반가운 존재라니. 아니나 다를까, 터널에 진입하자마자 어두웠던 사방이 밝아졌다. 차선이 명확하게 보였으며 앞 유리창을 부술 듯이 떨어지던 비도 사라졌다. 고요한 적막 속에 내 차가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몸의 긴장이 탁 풀렸다. 잠시나마 평소처럼 편안하게 운전했다. 그러다가 터널을 나오는 순간 다시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려댔고 주변이 캄캄해지면서 차선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다음 터널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운전을 했다. 


사람들은 인생의 암흑기를 터널에 빗대어 말하곤 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터널 속에서"라는 표현은 익숙하다. 하지만 그날 내가 겪은 터널은 험난한 외부환경에서 잠시나마 피할 수 있는 안락한 휴식 공간 같은 곳이었다. 그때가 밤이었고, 비가 세차게 내렸고, 내 컨디션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밝은 빛과 살랑이는 바람과 아름다운 풍경들을 감상할 수 있을 때에는 터널이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이겠지만 어두운 곳에서 폭풍이 몰아칠 때에는 터널이 잠시나마 빛을 제공해 주고 폭풍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방공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나를 둘러싼 외부 환경이 언제나 좋은 조건일 수는 없다. 내가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모든 것들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어쩌면 인생의 암흑기는 터널이 아닐지도 모른다. 악천후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발버둥 치다가 잠깐 쉬어가는 쉼터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음 놓고 달리다가 다시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여전히 악천후일지라도, 다음 터널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다시 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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