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려서 안으로 집어넣다

by 박 현


어떤 일이든 핵심 목표가 있다.

요리를 하는 것은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이고, 운동을 하는 것은 건강 또는 재미를 위한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에도 그저 '쉬는것'에 그 뜻이 있다.


그런데 그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효율성'이라는 개념이 도입된다.

바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효율성은 시간과 노동을 덜어주는 유익한 개념이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효율성'이라는 포장지속에 '귀찮음, 게으름, 자기이익'이라는 내용물이 들어 있을 때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충'이라는 말로 번역될 수도 있겠다. 온전히 나에게 속한 일을 대충한다면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본인에게는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길 수도 있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로부터 서비스를 제공받아야 하는 상대방에게 '효율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대충'이라는 태도로 재화를 공급한다면 양상은 달라진다.

거기에는 '편의주의'라는 개념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행정 편의주의' 는 공익보다는 행정 기관의 시간, 비용, 인력을 절약하기 위해서 업무가 진행될 때 사용되는 용어다.

모든 시민에게 형식적, 일률적으로 어떤 기준이 적용되다 보니 반드시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존재하게 된다.

'사법 편의주의'는 법원이나 수사기관이 정의와 공정보다는 사법절차의 간편함, 사건 처리의 효율성 등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로 인해 사실 확인보다 기존 판례나 관행에만 의존한다거나 사법적 판단을 피하거나 지연하거나 더 나아가선 권력에 유리한 방향으로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그래서 사회속에서 타인과 연관된 어떤 일을 진행할때는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와 "어떻게 하면 더 편할 수 있을까?" 사이에서 늘 고민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결국 내가 편한 것이 아닌 상대방이 편할 수 있는 길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하며 그럴때 공동체 모두가 편리하고 정당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영어에 'turn in'이라는 표현이 있다. 첫번째 뜻은 (문서, 과제 등을) '제출하다'이다.

나는 이 표현에 내가 아닌 상대방을 위한 편의주의가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은행부스에서 작성한 어떤 서류를 맞은편 직원에게 건네준다고 가정해 보자.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작성한 서류를 직원에게 그대로 밀어 넣어 주거나 아니면 상대방이 보기 좋도록 돌려서 넣어주는 방식이다.

첫번째는 내가 좀 편한 방식이다. 서류를 위에서 아래로 돌려야 될 노동과 시간을 덜어준다.

하지만 두번째 방식은 상대방이 편한 방식이다. 서류를 받고서 다시 본인이 보도록 돌려야 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turn - 돌리다', 'in - 안으로 넣다 = 제출하다' (내생각)


정말로 이 단어가 이런 의미로 만들어진건지는 모르겠지만 늘 상대방에게 서류 같은 걸 줄때 나는 이 단어를 떠올린다.


나는 학생들에게 합당한 수강료를 받고 강의와 자료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다.

학생들이 나로부터 좋은 강의와 자료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내가 제공한 재화와 용역의 품질이 어땠냐는 것은 당연히 시험 결과가 말해주겠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학생 스스로가 열심히 노력했거나 능력이 뛰어나서 결과가 좋을 때도 있다.

그래서 가급적 내 수업을 듣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공평하게 좋은 강의와 자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나에게는 '학생 편의주의'가 필요한 것이다.

나의 편의를 위한다면 당연히 수업준비도 덜 꼼꼼해지고 25년동안 해왔던 관성으로 그냥 저냥 시간을 '떼우면' 되고 그러고도 '떼우지 않았다'고 예쁘게 포장할 관록도 있다.

나의 편의를 위한다면 인터넷 상에 넘쳐나는 영어학습 관련 사이트에서 자료들을 구매하여 대충 짜깁기해서 엄청난 양으로 학생들에게 융단폭격을 가할 수 도 있다.

물론 공부할 때는 문제의 양도 중요하기에 나도 여러 사이트의 도움을 받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편해지는 만큼 학생들이 손에 쥐는 자료나 수업의 퀄리티는 떨어지게 되어 있다.

진정 학생을 위한다면 꼿꼿이 서있던 자세를 엉거주춤하게 구부려 눈높이를 맞춰주는 수고와 노력을 해야 한다.


내 컴퓨터 모니터에는 포스트 잇이 한 장 붙어있다.


'학생편의주의 - 내가 편한만큼 자료의 퀄리티는 떨어진다. 학생이 자료를 받았을 때 가장 시험공부에 적합한 내용과 형식이라고 생각되어야 한다.'


나도 모르게 편한 쪽으로 자꾸 흐르려는 관성을 억지로라도 다시 학생 중심으로 맞춰일으켜 세우려는 일말의 장치이다.

시중에 널부러 져 있는 자료가 아니라 오직 내가 맡고 있는 학교의 영어 시험에 맞는 워크북과 수업내용을 만들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왜냐면 그 학교 영어선생님이 어떤 문제 유형을 선호하며 어떤 식으로 지문을 변형하며 또 고난도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꼬아서 내는지를 끊임 없이 기출문제를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맞도록 직접 문제를 제작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소위 '빙의'라는 형식의 의식을 나는 반드시 거친다. 내가 학교 선생님으로 분하여 직접 문제를 내보는 과정이다.

이것은 당연히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영어문제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라는 방향과 틀을 버리고 온전히 기출문제 분석을 통해서 습득한 학교선생님만의 스타일을 내 영혼에 모셔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좀체 쉽게 풀리거나 시간이 적게 걸리는 문제가 아니다.

비유를 하자면 똑같이 생긴 바늘하나를 해변가 모래사장에서 찾아 내는 일 정도이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학교 시험문제와 아주 유사하게 만든 문제라고 자랑스럽게 말을 해도 실제 문제를 어떻게 낼 지는 온전히 출제자의 마음이다.

지난번 스타일과 판이하게 다르게 낼 수도 있고 학생들의 평소실력 그 자체를 묻는 문제를 낼 수 도 있고 아예 배우지 않은 외부지문을 몇문제 낼 수도 있다.

그래서 아무리 '학생 편의주의'로 강의와 자료를 준비한다고 할 지라도 늘 예측이 대부분 맞아 떨어지는것도 아니고 결과가 좋게 나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학생 입장에서 고민하고 생각하고 시간을 들이는 만큼 나의 편의를 위해서 준비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좋은 결과를 항상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 시점은 2학기 중간고사 대비의 중간즘 시기에 접어들었다. 다시 한번 더 나는 모니터 아래에 붙어 있는 포스트 잇을 바라본다.


'학생 편의주의'


그리고 마음에 그분을 모실 준비를 하고 영어 지문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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