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과 지중해 사이에 반쯤 몸을 담근 듯한 그 모습은 한 나라의 경계를 넘어 하나의 대륙처럼 보인다. 동쪽으론 피레네 산맥이 프랑스와의 국경을 날카롭게 가르며 서쪽으로는 포르투갈과 맞닿는다. 남쪽으로는 좁은 해협 하나를 두고 북아프리카와 시선을 주고받는다. 바로 이곳,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지리, 북아프리카와 유럽의 경계가 스페인을 오랜 세월 ‘문명의 문턱’으로 만들었다. 스페인의 지리는 단지 자연의 선물이 아니라, 역사와 전쟁, 무역과 종교가 부딪힌 투쟁의 무대였다.
스페인의 해안선은 총길이가 약 5,000km에 이른다. 지중해와 대서양을 동시에 끼고 있는 이 형태는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품고 있다. 북쪽의 칸타브리아 해안은 날카로운 절벽과 깊은 만이 섞여 방어에 유리했다. 남쪽의 안달루시아 해안은 8세기 초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장악한 이슬람 세력 *우마이야 칼리파국이 상륙하여 상단기간 지배하였다. 이후 스페인의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구국회복운동 '레콩키스타(Reconquista)'를 통해 재정복 하는 투쟁의 해안이었다.
*우마이야 칼리파국 : 611~750년까지 존속한 이슬람 제국, 북아프리카와 중동일대 장악, 수도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특히 지브롤터 해협은 스페인의 복잡한 지리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장소다. 이 좁은 해협은 기원전 264년 로마 공화국과 카르타고 공화국(튀니지 중심의 북아프리카와 중동 연합국가)이 영토 확장과 지중해 제해권을 두고 벌인 포에니 전쟁의 무대였다. 그리고 8세기 초부터 700년간 *무어인의 유럽 진입로가 되면서 과학, 철학, 예술, 건술 등 유럽의 르네상스를 여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 무어인 : 피부색이 어두운 자라는 뜻으로 아랍인과 북아프리카 인을 지칭하는 말
스페인의 해양 전략은 중세부터 이어진 해상공화국의 전통 속에서 성장해 왔다. 구국회복운동(레콩키스타라)을 통해 재정복 한 에스파냐는 현재의 사라고사 일대의 '아라곤'과 마드리드 일대의 '카스티야' 왕국으로 나뉘어 각각 동지중해와 대서양 연안에서 무역과 해전을 주도했다. 1516년 두 왕국이 통합하며 스페인(에스파냐) 공화국을 선포하고, 콜럼버스의 항해를 지원하며 대양으로 활발하게 진출했다. 이 해양 역량은 16세기 대서양과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하고 전성기를 구가하며 무적함대(Armada Invencible)라는 거대한 해군력으로 성장했다.
1588년 스페인 왕 펠리페 2세는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정책과 해적의 스페인 선박 공격에 불만을 품고 영국 원정을 감행했다. 전투결과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처참히 패했다. 이는 단순한 전투의 패배가 아니었다. 당시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기동성, 전술, 조선기술에서 영국에 뒤처졌다. 이 패배는 해양 패권이 서서히 영국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영국 원정 이전까지 스페인은 바다를 지배했던 진정한 해양 강국이었다. **마젤란이 태평양을 횡단한 항로, 아르마다가(Armada, 스페인어 해군) 북해를 누비던 시절, 바다는 스페인의 창과 방패였다.
*프로테스탄트 정책 : 성서 중심의 신앙으로 교회 권위 도전, 윤리를 강조하는 정책
**마젤란 : 포르투갈 출신 스페인 항해사, 세계 최초의 지구 일주 항해 성공
이러한 해양 전략은 현대에도 이어진다. 스페인은 항공모함급 전력은 없지만 상륙작전능력, 해양 감시체계, 중거리 해상 타격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이는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북미와 유럽 국가들의 집단 방위 조약 기구)의 남부 해상 전략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다. 특히 지브롤터 해협은 지중해의 입구로, 해양 안보와 무역로를 감시하는 대테러작전의 관문이다. 스페인은 이 지역에서 상시 해군 작전을 수행하며 지중해와 대서양의 연결고리를 통제하고 있다.
이 나라의 이야기는 바다에서 끝나지 않는다. 내륙의 중심은 이베리아 고원 (Meseta Central, 중앙 고원) 지대다. 이 고원은 해발 600~700미터의 평탄한 고지대로, 외세의 대규모 기동에는 불리하지만, 동시에 침입을 저지하는 천연의 방패였다. 이 고원은 지방 간 연결을 제한하며 도시국가나 소왕국의 분열을 낳았고, 이는 중세 스페인의 분권 구조와 연합왕국 체제로 이어졌다.
현재에도 도시국가 갈등은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에스파냐어 문화권인 카스티야와 바르셀로나 지역의 카탈루냐어 문화권인 카탈루냐의 대립이다. 축구경기로 알려진 엘 클라시코는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축구 경기이지만 단순한 스포츠 경기를 넘어 카스티야와 카탈루냐의 지역적 대립을 상징한다.
이러한 지리는 산악 요새의 발달과 유격전술의 진화를 유도했다. 대표적으로, 1808년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한 대륙 봉쇄령의 일환으로 나폴레옹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을 침공했다. 당시 스페인은 정규군보다 민병대와 게릴라의 전술로 대응했다. 이른바 '게릴라(guerrilla)'라는 단어는 이 시기 탄생했으며, 게릴라들의 저항은 나폴레옹 군을 소모시켰다. 이는 나폴레옹의 대륙봉쇄 전략을 흔들고 러시아 원정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역사적 파장을 불러왔다. 이처럼 스페인의 지형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무대였다.
강과 운하 역시 충분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다. 에브로(Ebro) 강, 과달키비르(Guadalquivir) 강, 타구스(Tagus) 강, 도루(Duero) 강은 모두 동서 방향으로 흐르며,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수송로 역할을 했다. 특히 과달키비르 강은 세비야에서 대서양까지 이어지며, 신대륙과의 교역을 연결하는 수로였다. 로마 시대에는 이 강을 따라 군단과 물자가 이동했고, 스페인의 대외 원정에도 큰 기여를 했다. 근대에는 과달키비르 강의 본류에서 세비야 시가지로 운하를 개통하고 군수물자 수송, 병참선 확보 등 전략적 지원 기능을 수행했다. 베네치아와 유사하게 운하와 수로로 연결된 수상 교통로를 활용한 전시 물류 시스템은 스페인 군의 장기작전의 기반이 되었다.
스페인은 지리적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대서양과 지중해의 교차로에 위치한다. 이는 외교적으로는 균형 전략의 기초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코 정권은 중립을 유지하며 양측의 군사적 긴장 완화에 기여했다. 이후 NATO에 가입하면서 유럽 방위체제의 남방 축을 담당하고 있다.
* 프란시스코 프랑코 : 내전 종식, 스페인 재건에 기여, 독재 체제하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갈등을 야기한 독재자로 평가.
현재 스페인은 난민 문제와 영토 분쟁이라는 외교문제에 직면해 있다. 지브롤터 해협 넘어 북아프리카 지역이 있는 스페인 영토인 세우타와 멜리야는 모로코와의 지속적인 갈등의 원인이다. 그리고 1975년 이전까지 스페인령 서사하라 지역 난민 발생으로 인도적 지원을 하고 있지만 현재 실효적 지배국인 모로코와 관계에서 안보의 불안정 요인이 되고 있다.
기후 변화 또한 중요한 변수다. 북아프리카의 사막화, 인구 유출, 물 부족 현상은 남유럽 전역에 걸친 이주 압박을 야기하고 있다. 스페인은 이들 난민의 최전방 접경지로서 남방 방어선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이는 단순한 국경의 방어를 넘어 인도주의, 안보, 외교를 포괄하는 복합적 전략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스페인의 해양 전략은 더욱 정밀하고 종합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해상 감시체계의 고도화, 무인기와 인공위성을 통한 해양 정찰, 중거리 미사일을 장착한 전투함의 배치 등, 스페인은 첨단 기술과 전략적 유연성을 결합해 미래 전장에 대비하고 있다. 이는 NATO의 해상 작전에서 스페인이 단순한 보조국이 아닌, 남부 해역의 주도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스페인의 지리는 고립과 연결, 침략과 방어,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고민이 겹겹이 쌓인 다층적 무대이다. 피레네를 넘어온 무어인의 말발굽 소리, 안달루시아 해안에 울려 퍼진 함성, 이베리아 고원에서 바람을 견딘 병사들의 숨결이 지금도 에스파냐의 대지 위에 남아 있다. 그리고 이 땅은 지금도 조용히 묻고 있다. 어떻게 전쟁을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평화를 지켜갈 것인가를. 바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스페인의 지리는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